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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자와 틀어진 김좌진, 아나키스트와 연대

김좌진 장군과 아나키스트들이 한족총연합회를 운영했던 산시(山市)의 역. 대련에서 만주리까지 가는 중동선의 요지였다. [사진가 권태균]
1927년 10월 하순, 북만주 일대를 관할하던 신민부(新民府) 김좌진(金佐鎭) 장군의 목단강(牧丹江) 거처에 족제(族弟) 김종진이 찾아왔다. 대련에서 소·만 국경 만주리까지 연결하는 2400㎞의 중동선(中東線)상에서 목단강, 영안(寧安), 해림(海林) 등은 신민부의 요지였다. 김종진이 김좌진을 찾았을 무렵 신민부의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다. 1925년 3월 발족한 신민부는 김혁(金爀) 등이 이끄는 대한독립군정서와 김좌진 등이 이끄는 대한독립군단이라는 두 군사세력에 민간세력이 가담한 조직이었다. 김혁이 중앙집행위원장, 김좌진이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이었는데 목릉현 소추풍에 성동(城東)사관학교를 세워 무관들을 양성했을 정도로 무장투쟁을 중시했다. 남쪽으로는 백두산 북방의 돈화(敦化)·안도(安圖)에서부터 북쪽으로는 러시아 국경 부근의 밀산(密山)까지 15~16개 현에 50만여 명의 한인(韓人)들을 관장하고 있었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아나키즘 등장하다 ⑨한족총련 결성

그러나 신민부 결성 직후인 1925년 6월 만주 군벌 장작림(張作霖)이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三矢宮松)와 미쓰야협약(三矢協約)을 맺고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해 조선총독부에 넘겨주면서 사정이 급격히 나빠졌다. 심지어 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 김혁까지체포되어 조선총독부에 넘겨지는 상황이었다. 격분한 김좌진은 중국 국민당의 자금과무기지원을 받아 신민부를 중국 중앙군 제8로군으로 개편해서 장작림 군벌을 타도하려 계획했다. 그러나 국민당의 만주공작 책임자 공패성(貢沛誠) 등이 장작림에게 체포되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만주의 삼부⑧북만주의 통합바람 참조). 이때 신민부가 장작림 군벌 정권 타도에 나섰다면 독립운동사에 지각변동이 일어났을 것이다. 부패한 군벌정권이 의기충천한 독립군들을 상대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1 산시역 모습이다. 2 김좌진 장군이 거주하던 산시 정미소 자리. 단군 초상이 보인다. 신민부 군정파에는 대종교 계통의 민족주의자들이 다수 가담해 있었다.
이 무렵 신민부에서 활동했던 이강훈(李康勳)은 “당시 김좌진 장군은 중국 국민당의 밀사와 약속한 것이 수포로 돌아가 크게 실망하고 계셨다. 아무리 큰일이 일어나도 눈 한 번 깜짝하지 않는 분인데 이번만큼은 무척 상심이 크신 모양이었다(민족해방운동과 나(1994))”라고 회상했을 정도다. 설상가상으로 신민부는 1927년 12월 위하(葦河)현 석두하자에서 열린 총회에서 김좌진의 군정파(軍政派)와 김돈(金墩) 등의 민정파(民政派)로 양분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제 발로 찾아온 김종진은 김좌진에게 큰 힘이었다. 그에겐 김좌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운동 노선과 구체적인 방법론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종진은 먼저 만주를 근거로 한 한국 독립운동의 기본계획안을 작성해 제출했다.

김종진은 일제와 만주 토착지주들로부터 이중의 착취를 당하는 만주 교포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①의식주 ②토지 ③협조와 비호의 따뜻한 손길’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만주 한인들의 생활공동체로서 경제적 협력기구를 조직하고, 이를 중심으로 농촌자치제를 실시하려고 구상했다. 농사를 짓는 한편 군사훈련도 받는 병농(兵農)일치제의 둔전양병제(屯田養兵制)가 그 방안이었다(시야 김종진 선생전).

김종진은 탁상공론만 일삼는 지식인이 아니었다. 그는 먼저 북만주의 지리를 숙지하고 독립운동 현황과 교포들의 생활상을 체험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영하 30~40도의 혹한을 무릅쓰고 1928년 1월 중동선 해림역을 출발해 8개월 동안 신민부 전 지역을 방문했다. 다시 해림으로 귀환한 김종진은 답사 결과를 김좌진에게 보고하면서 앞으로의 대책을 건의했다. 한인들의 생활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면서 독립운동도 전개할 수 있는 조직체를 꾸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만 해도 김좌진은 김종진의 아나키즘에 관심은 있었지만 단체 통합까지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김좌진에게 더 중요한 것은 삼부(三府:참의부·정의부·신민부) 통합문제였다. 김좌진의 신민부 군정파가 1928년 9월 길림 근방 신안둔(新安屯)에서 열린 삼부 통합회의에 대표를 파견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민정파에서도 대표를 파견하면서 대표권 문제가 발생했다. 민정파가 정의부를 지지하자 군정파는 삼부통합회의를 탈퇴하고 1928년 12월 하순 정의부의 김동삼, 참의부의 김승학 등과 혁신의회를 조직하고 ‘유일독립당재만책진회(在滿策進會: 이하 책진회)’를 만들어 만주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에 나섰다. 그러자 신민부 민정파는 1929년 3월 길림에서 참의부의 심용준(沈龍俊), 정의부의 현익철(玄益哲) 등과 국민부(國民府)를 결성하는 것으로 혁신의회의 통합 요구를 일축했다. 김좌진이 이끄는 신민부 군정파는 통합운동을 포기하고 책진회를 떠나 북만지역으로 돌아갔다. 어떻게 보면 김좌진의 신민부 군정파가 고립되었다고 볼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에 아나키스트들과 더욱 가까워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1929년 7월 김종진·이을규·유림(柳林)·이붕해(李鵬海)·엄형순(嚴亨淳)·이강훈·김야봉(金野蓬)·이달(李達)·이준근(李俊根) 등 17명의 아나키스트들은 북만주 해림의 소학교에서 아나키스트들과 신민부 일부 인사들의 연합체인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滿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이하 연맹)을 결성했다. 연맹은 3개항의 강령에서 “①우리는 인간의 존엄과 개인의 자유를 완전 보장하는 무지배 사회의 구현을 기약한다… ③각인은 능력껏 생산에 근로를 바치며 각인의 수요에응하여 소비하는 경제 질서의 확립을 기한다”(이을규, 시야 김종진 선생전)라고 규정했다. 중요한 것은 연맹의 당명 강령 제6항에서 “우리는 항일독립전선에서 민족주의자들과는 우군적(友軍的)인 협조와 협동작전적 의무를 갖는다”고 명기했다는 점이다.

항일투쟁에서 공산주의가 아닌 민족주의와 협동전선을 펼치겠다는 뜻이었다. 삼부(三府) 중에서 신민부는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이 가장 강했다. 1921년 6월 러시아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에서 적군(赤軍)에 의해 독립군이 참살된 자유시 참변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여기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滿洲總局)이 신민부 조직 와해 공작에 나선 것이 상황을 악화시켰다. 1927년 9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위원이었던 김낙준(金洛俊: 김찬)은 1931년 일제 신문조서에서 만주에서 자신의 주요 활동 중에 “신민회에 대한 반대…”가 있었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신민부는 조선의 독립을 표방하지만 사실은 독립운동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가면을 쓰고 자금을 징수해서 농민들을 괴롭히고 있다”(김낙준 조서)고 선전했다고 덧붙였다. 김낙준은 1928년 9월 정의부의 중앙집행위원이 되고 이후에도 만주에서 민족통일전선의 지속을 주장하다가 그해 12월 만주 총국 위원에서 해임되는데, 정작 북만주에서는 신민부 와해 공작에 나섰다. 그 결과 신민부는 ‘주의(主義)에는 주의로 맞서야 한다’고 주장하던 아나키스트들에게 더욱 다가갔고 1929년 7월 21일 신민부와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연합조직인 재만한족총연합회(在滿韓族總聯合會:이하 한족총련)가 결성되었다.

위원장 김좌진, 부위원장 권화산(權華山)등 최고지도부에는 신민부 출신을 추대하고 농무(農務) 및 조직선전위원장 김종진, 교육위원장 이을규 등 아나키스트들은 실무를 책임졌다. 연합회는 강령에서 “1. 본회는 국가의 완전한 독립과 민족의 철저한 해방을 도모한다”고 명기했으며, 사업정강에서는 “혁명: 1. 파괴, 암살, 폭동 등 일체 폭력운동을 적극적으로 진행한다. 2. 일반 민중은 혁명화하고, 혁명은 군사화한다…”라고 규정했다. 신민부의 무장항일투쟁 전통과 의열단의 혁명노선을 결합시킨 것이다. 또한 중국인 지주에게 토지를 공동으로 빌려서 공동으로 경작하는 공농제(共農制)의 적극적 실시를 주장했다. 또한 ‘공동판매, 공동소비조합 설치를 장려하고, 농촌식산금융조합을 설립’해 이상적인 농촌공동체를 만들려고 시도했다. 또 중앙집권제를 배격하고 지방자치제 실시를 명기했는데, 아나키스트들 스스로 “4천년 조선 역사 이래 새로운 방식에 의한 농민자체의 조직체”(산시사변의 진상, 탈환 1930년 4월)라고 자부할 정도로 새로운 운동방향이었다. 정화암이 “지금까지 대부분의(독립운동)조직들은…교민 위에 군림하는 관료주의적 조직”으로서 ‘독립운동자금이나 조직운영비 명목으로 갹출되는 돈 때문에(한인 교포들은) 생활에 큰 타격을 받고 있었다’(몸으로 쓴 근세사)라고 쓰고 있었는데, 아나키스트들은 자신들의 식생활은 자신들이 해결하겠다고 선언해 농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일종의 직업혁명가로서 자체적으로 생계를 해결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한족총련의 아나키스트 활동가들의 생계는 곤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때 복음이 들려왔다. 국내로 들어갔던 아나키스트 신현상이 친지 최석영과 충청도 호서은행의 거금을 빼돌려 북경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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