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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고 못 하면 선비라 할 수 있나 … 한국인 DNA엔 본디 음악이 있었네

조선 후기 화가 김양기(김홍도의 아들)가 그린 ‘월하선인취생도’(月下仙人吹笙圖). ‘달빛 아래에서 생황을 부는 신선’이라는 뜻이다. 생황은 여러 개의 대나무 관이 둥글게 박혀 있는 국악기. [사진 태학사]

‘손가락 끝의 음악이 아닌 마음 깊이 우러나오는 음악을 연주하라.’

 명문대 음대 교수의 충고가 아니다. 조선 후기 문인으로 거문고 악보집 『현학금보(玄鶴琴譜)』를 펴낸 오희상(1763~1833)의 말이다. 기술로 연주하는 음악을 경계하라는 뜻이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우리 음악인의 삶을 담은『한국 음악의 거장들』(태학사)이 나왔다. 한국 음악문화사를 연구해온 송지원 박사(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가 옛 문헌에 묻혀 있던 명창, 이론가와 작곡가 등의 이야기를 찾아 모았다. K팝의 문화적 연원을 탐색한 셈이다.

 조선시대에 거문고는 문인들의 필수 악기였다. 오희상은 거문고 연주의 규칙을 ‘오불탄’(거문고를 연주하지 않아야 할 다섯 가지 상황), ‘오능’(연주자가 지켜야 할 다섯 가지 자세) 등으로 정리했는데, 의관을 제대로 갖추지 않았을 때는 연주하지 말라는 내용도 들어있다.

 옛 사람들은 악기에 대한 욕심이 유별났다. 김일손(1464~1498)은 항상 자신이 직접 만든 거문고를 갖고 싶어했는데, 결국 100년 된 남의 집 문짝을 얻어다가 거문고를 만들었다고 한다. ‘탁영금’이라 불리는 그의 거문고는 지금까지 잘 보존돼 전해지고 있다(보물 제957호). 사대부집 종이었으나 하루 종일 노래만 부르다가 결국 가수의 꿈을 이룬 석개 이야기도 눈길을 끈다. 집주인의 허락을 받아 정식으로 노래를 배운 석개는 탁월한 실력으로 좌의정·영의정·우의정 등 명상들을 감동시키고 부를 축적했다.

 전문 음악인들의 후원자도 적지 않았다. 영조 대에 예조 판서를 역임한 인물 이정보(1693~1766)는 1763년 관직을 은퇴한 후 자신의 집에 음악인을 여럿 두었으며, 그의 밑에서 명창들이 배출됐다. 박지원을 필두로 이덕무·박제가·유득공 등이 모인 ‘연암 그룹’은 음악 애호가로 유명했다.

 세조는 절대음감의 소유자였다. 저자는 “바람결에 묻어 들려오는 소(휘파람의 일종)의 소리를 듣고 그 절대 음높이를 알아맞힐 만큼 음감이 뛰어났다”고 전했다. 정조 역시 사직 제례악의 선율을 꿰뚫고 있어 연주가 조금만 틀려도 지적했다.

 송 연구원은 90년대 초반부터 자료를 찾아왔다. 그는 “한국음악사 연구는 주로 악보·이론 등 거시적 분야에 치중해 왔는데, 우리에게도 풍부한 음악사가 있다는 것을 입체적으로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번 책에 소개하지 않은 음악인 50인을 다룬 제2부 집필도 마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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