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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약진 운동의 광기?인육을 먹어야 했던 참담한 기억



▲허난(河南)성 상청(商城)현으로 들어가는 216번 성도 변에서 붉은 삼각건을 목에 두른 소년선봉대원들의 선도에 따라 초등학생들이 하교하고 있다.

홍은택의 중국 만리장정 <16> 중국 문명의 고향 허난 신양



여행하기가 점점 불편해진다. 건자재와 골재를 실은 화물차들이 길을 짓이겨놓아 통행이 빈번한 마을 길의 노면은 달의 표면과 같다. 게다가 화물차들은 제대로 차단막을 덮지 않아 모래나 흙을 바람에 까불리면서 반쯤은 흘리고 다닌다. 대지에 뿌옇게 가득 찬 먼지와 모래가 화물칸에도 다시 내려앉을 테니 총량은 불변일 것이다.



그래도 화물차는 중국 경제의 혈액이다. 도로라는 혈관이 헐더라도, 그리고 탁한 피라도 돌아야 경제는 살아 움직인다. 화물차가 지나가면 잠시 속도를 늦춰 화물차와 최대한 떨어지려고 하는데 한두 대가 아니라 심한 경우 100대가 넘는 화물차들이 끊임없이 지나간다. ‘경제 개발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으니 피할 수 없을 걸’이라고 나를 조롱하는 듯하다. 화물차도 여러 종류여서 경운기를 개조한 삼륜차는 석탄을 때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렇게 불완전 연소된 검댕을 뿜어대면서도 그렇게 천천히 갈 수 없다. 언덕길에서는 자전거와 엇비슷한 속도로 주행해서 뒤를 쫓아 가게 되면, 카드뮴·염소·불화수소·납·이산화황 등의 칵테일에 취하고 얼굴은 갱도에서 갓 빠져나온 것과 같다.



설상가상 예상한 대로 허페이(合肥)를 전후로 해 언덕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바람을 등에 업고 평원을 내달리던 기억은 잊어야 한다. 이제 중국의 두 번째 계단으로 올라가고 있다. 소인국에 간 걸리버의 눈으로 보면 중국은 세 개의 계단으로 이뤄져 있다. 첫 번째 계단은 해발고도 500m 이하인 동부의 구릉과 평원. 두 번째는 해발고도 1000m에서 2000m 사이의 광대한 고원과 분지. 거칠게 말해서 친링(秦嶺)산맥과 칭짱(靑藏)고원의 사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계단은 해발고도 4000m 이상의 서남부 칭짱고원으로 중국뿐 아니라 세계에서 지세가 가장 높은 지구다. 네팔에서는 에베레스트 산으로 불리는 높이 8843m의 주무랑마(珠穆朗瑪) 산이 여기에 있다. 내 여행은 첫 번째와 두 번째 계단을 오르내리게 된다.



그래도 60일 안에 만리장정을 완주할 수 있도록 하루 주행거리를 조금씩 늘려왔다. 허페이에서 류안(六安)을 거쳐 허난(河南)성으로 들어가면서는 주행기록을 갱신할 기회를 잡았다. 류안에서 312번 국도를 타고 가는데 40번 고속공로가 312번 국도를 집어삼켜버렸다. 사잇길이 있긴 했지만 노면도 안 좋고 많이 우회할 것처럼 보였다. 톨게이트로 직진해 차단목 사이로 그냥 빠져나갔다. 중국에서 배우고 있는 점은 ‘일단 해보고 안 되면 하지 말자’다.





▲허난성 신양(新陽)은 예부터 ‘어미지향(魚米之鄕)’으로 불릴 만큼 먹거리가 풍부한 곡창지대였다. 이곳에서 대기근이 발생해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는 것을 믿기 어렵다.



괜찮은가 보다. 제지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고는 마구 달렸다. 이제 중국에서 안 다녀본 길이 없다. 향도·현도·성도·국도에 이어 고속공로까지. 도로의 상태는 역시 고속공로가 최고다. 차량들이 별로 없다. 통행료를 아끼기 위해 화물차들은 이 좋은 도로를 놔두고 국도나 성도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자동차로부터의 위협도 전해지지 않을 만큼 길어깨도 널찍하다. 중간에 순찰차 두 대가 지나갔는데 잡지 않는다. 진짜 괜찮은가 보다. 길도 평탄하고 바람도 밀어줘서 평균 시속 30㎞로 가니 어깨나 엉덩이 통증도 잠시 잊는다.



그렇게 해서 파죽지세로 허난성에 진입했다. 오늘의 목적지인 구스(固始)로 빠지는 길이 나왔는데 길이 아까워서 멈추지 않았다. 10㎞쯤 가다 보니 톨게이트가 보였다. 혹시 저기서 붙잡혀 손 들고 서 있으라고 하는 게 아닐까, 아니 그보다는 다시 되돌아가라고 하지 않을까 두려웠다. 일단 부딪혀보자. 앳된 얼굴의 교통경찰이 제지했다. 아니나다를까 되돌아가라고 한다. 소스라치게 놀라고 쓰러질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312 국도인 줄 알고 달려왔을 뿐이다.” “다음 진출구에서 빠져나갈 테니 제발 봐달라.” 하지만 소용없다. 이 경찰관은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려는 듯 안 된다고 잘라 말한 뒤 부스 쪽으로 가버린다. 여기서 포기할 내가 아니다. 주위를 살펴보니 고참 2명이 톨게이트의 그늘 아래서 실실 웃고 있다.



그들에게 다가가서 세상에서 가장 슬픈 눈빛으로 애원했다. 그들은 한국에서 왔다니까 호기심을 보이면서 이것저것 묻더니 앳된 경찰관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속으로 나는 ‘이게 중국이다’ 만세를 부르며 차단목 사이로 빠져나갔다. 등 뒤로 “조심해서 주행해” 소리가 들린다. 나는 다음 진출구에도 빠져나가지 않고 내친김에 신양(新陽)시 상청(商城)현까지 달려 하루 주행거리 142㎞를 기록했다.



신양은 중국의 100대 성씨 중 황(黃)·라이(賴)·루어(羅)·장(蔣)·바이(白)·천(陳)·판(潘)·랴오(廖)·쑨(孫)·장(江)·푸(傅)·선(沈)·셰(謝) 등 13개 성씨가 시작된 곳이다. 중국 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라는 뜻이다. 허난성 자체가 중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성이다. 이 성에만 뤄양(洛陽), 카이펑(開封), 정저우(鄭州), 안양(安陽) 등 역대 통일왕조의 수도가 네 곳이나 있다. 신양은 허난의 남쪽 끝이어서 황하문명이 회하를 건너 남하하는 기점이었다. 하지만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1959년부터 1961년까지 3년간 중국에서는 수천만 명이 굶어 죽은 참사가 일어났다. 경제학자 구준(顧准)은 우파로 몰려 상청현에 하방돼 노동개조교육을 받는 동안 목격담을 일기에 남겼다. 이에 따르면 1959년 겨울부터 1960년 봄까지 길가에는 굶어죽은 시체들이 즐비했고 사람들은 그 시체를 먹었다. 구준은 남편이 아내를 살해해서 먹고 고모가 조카를 먹는 끔찍한 사건까지 일어났다고 기록했다. 당시에는 이 일이 바깥에 알려지지 않았다. 지방 공산당은 도로를 폐쇄하고 검문을 강화해서 주민들의 외출을 막았고 우편물도 철저히 검열했다.



철강 생산을 위해 농기구까지 녹이도록 한 대약진운동과 무리한 집단농장화가 흉년을 초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1959년 곡창지대인 신양에서는 아사할 만큼 실제 식량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었다. 혁명의 열정이 우상숭배와 도그마가 되는 순간 집단광기로 감전돼 세상에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없게 된다. 진시황제는 전국시대를 종식시키고 통일왕조를 건국한 후 분서갱유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을 통일왕조의 이름으로 죽였다. 몽고족의 원을 무너뜨리고 명을 개국한 주원장 역시 수복한 한족의 왕조 이름으로 피비린내 나는 보복과 숙청을 벌였다. 1949년 사회주의 국가 수립 이후 1976년 마오쩌둥의 사망까지 신중국의 27년은 그에 못지않은 고난의 시기였다. 대기근 기간 동안 아사자는 최소 2000만 명, 최대 5000만 명까지 추산되고 있다. 신양에서는 59년 10월부터 60년 10월까지 1년 동안 당시 800만 인구 중 107만 명이 비정상적인 원인으로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다.



원인은 우파라는 유령이었다. 신양의 당서기는 목표를 초과 달성하지 못할 경우 우파라고 낙인찍힐 것을 두려워해 식량생산량을 두 배로 허위 보고했고 그에 맞춰 농민들에게 곡식을 징발하라고 지시하자 이번에는 하급관리들이 우파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것보다 더 많은 곡식을 빼앗았다. 말을 듣지 않는 농민들을 감금하고 거꾸로 매달아 때렸다. 농민들에게 남은 곡식은 3, 4개월치밖에 없었고 출입 통제로 식량을 구하러 나가지 못하게 되자 안에서 죽거나 죽여서 인육을 먹는 참상이 빚어졌다.



결국은 중앙당을 거쳐 마오쩌동에게 보고됐다. 보고서 중에 ‘우파들의 반혁명 공작’이라는 구절이 있는 것을 마오쩌둥은 놓치지 않았다. “신양지구는 민주혁명의 과업을 보강해서 지주계급과 공산당으로 위장한 국민당 잔존세력을 철저히 척결하라.” 대기근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대기근을 권력 강화의 구실로 삼았다.



대기근의 실상은 1980년대 이후 하나 둘씩 밝혀지고 있고 인육사건은 안후이성과 칭하이(靑海)성에서도 발생한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나는 광산(光山)현에서 신양의 시내로 들어갈 때 213번 성도를 따라 주행했는데 이 도로변의 한 마을에는 당시 숨진 동네사람들의 명단을 새겨 넣은 기념비가 논밭에 세워져 있다고 들었다. 2004년에 농민이 자비로 세웠다고 하는, 신양사건과 관련한 유일한 기념비다. 가끔 땅을 파다 보면 나오는 인골도 이 사건을 잊지 못하게 하는 ‘기념물’이다.



주민들은 얘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상청현의 레노보 컴퓨터 대리점 직원인 리창(李强)은 “할아버지 시절에 일어난 일이고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어서 사람들은 이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고 말했다. 너무 끔찍한 일이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얽혀 있는 일이어서 되새기고 싶지 않는 심정이 이해가 됐다. 하지만 마음의 상처마저 지울 수 있을까. 유독 이 일대에서 교회당을 자주 보게 되는 것은 혹시 이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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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택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에서 워싱턴 특파원을 지내는 등 14년간 기자생활을 했다. NHN 부사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 ?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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