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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년 결성된 민간 무장 조직 …무력으로 일본인의 상습 침범 결사 저지

1954년 11월 21일 새벽, 일본 해상보안청의 함정 석 대가 독도로 접근했다. 1000t급 PS-9, 10, 16 함은 좌우, 중앙으로 섬을 포위했다. 일본 항공기도 선회했다. 600m 앞. 권총 소리와 함께 일제사격이 시작됐다. M-1 소총이 불을 뿜었다. 박격포탄은 PS-9함 갑판을 때렸다. PS-10 함도 먹구름 같은 연기를 뿜으며 동쪽으로 도망쳤다. (홍순칠 『이땅이 뉘 땅인데』, 혜안)

원조 지킴이 ‘독도 의용수비대’

53, 54년 들어 독도를 침범하던 일본은 큰코를 다쳤다. 사상자는 16명.

‘겁도 없이’ 총과 대포를 해상보안청 함정에 쏴댄 이들은 독도 의용수비대였다. 일본인 야마자 엔지로가 독도를 삼키려는 음흉한 꾀를 낸 50여 년 뒤 몸으로 독도를 사수한 이들이 바로 의용수비대다.

독도 의용수비대 구상은 기갑부대 상이군인 출신 홍순칠(당시 23세)의 아이디어였다. 울릉도 출신으로 군에 입대했다가 6·25때 부상해 52년 7월 섬으로 돌아온 그는 어느 날 지팡이를 짚으며 울릉경찰서장을 찾았다가 이상한 물건을 본다. ‘島根縣 隱技郡 五箇村 竹島’라고 쓰인 표목. 일본이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한 표시를 우리 어부가 떼온 것이다.

피가 끓은 그는 곧 수비대 조직에 착수했다. 경찰의 총기를 몇 개 대여받고 합숙 훈련도 했다. 전쟁 중인 2군과 경북 병사구 사령부를 찾아가 소총, 권총, 경기관총 1정을 얻어낸다. 전쟁통의 부산 양키 시장에 가서 바다사자 1마리를 주고 권총과 소총을 얻었다. 다 자비였다. 그렇게 편성된 의용군은 15명 규모 전투대 2개 조, 보급 연락 담당 3명, 예비대 5명, 보급선 선원 5명 등 45명이었다. 장비는 경기관총 2정, M-2 소총 3정, M-1 소총 10정, 권총 2정, 수류탄 50발, 0.5t 보트 1척. 53년 4월 20일 의용대는 독도의 서도에 올랐다. 곧 일본의 독도 침범이 개시됐다. 5월 28일 오전 11시쯤 일본의 수산시험선 시마네마루가 선원 30명을 태우고 나타나 6명이 상륙했다. 고기를 잡던 한국 어부 30여 명을 불법으로 조사했다. 6월에도 함정 두 척이 미국기를 걸고 와서 독도 동도에 표지판을 만들었다.

의용수비대는 6월 24일 일본 오게 수산고등학교 지토마루호를 서도 150m 앞에서 붙잡아 ‘독도는 한국 땅’을 주지시켜 보냈다. 7월 12일 새벽 5시 일본 군함 PS-9 침범 때는 진가를 발휘했다. 함정 90m 앞에서 경기관총으로 200발을 쏟아부었다.

53년 7월 정전 뒤 대한민국 정부가 경찰 4명을 잠깐 파견하고, 해병대 815-LST함이 잠깐 들르고, 경북도경국장이 위문 왔지만 의용대를 대체해주진 못했다. 그 와중에 일본은 8월 5회, 9월 2회, 10월 1회로 끝없이 왔다. 한국 당국은 거의 몰랐었다. 홍순칠은 8월에 그들이 가까이 접근하는 게 목격됐을 때는 총을 쏴 저지했다.

54년에도 침범은 계속됐다. 10월 2일 오키ㆍ나가라호는 의용수비대가 만든 대형 가짜 나무 대포에 속아 도망갔다. 침범은 11월 21일 의용대의 공격 이후 사라졌다. 그렇게 의용대는 56년 12월 30일까지 독도를 지키고 대한민국에 임무를 인계했다. 모두 3년8개월이었다. 그들이 없었으면 독도는 일본의 실효적 지배에 놓일 수 있었다. 의용대는 66년 방위포장(훈장)을 받는다. 혁혁한 활동에 대한 보답으론 초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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