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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 “현행법으로 충분” 정계 “경제민주화 법 필요”

한화 회장(가운데)이 16일 선고공판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서부지법 법정으로 들어가고 있다. 법원은 관행을 깨고 김 회장을 법정 구속했다. 김형수 기자
횡령ㆍ배임 등의 혐의로 기소된 김승연(60) 한화그룹 회장에 대해 법원이 관행을 깬 법정구속과 함께 4년 징역형을 선고해 재계에 충격을 주고 있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재벌 개혁을 중심으로 한 경제민주화 논쟁도 달아오르고 있다.

김승연 회장 판결 이후 재벌개혁 논쟁 재점화

재계는 현행법의 엄격한 집행만으로도 재벌 오너의 전횡 방지, 투명경영, 공정거래를 이룰 수 있다는 입장이다. 김승연 회장에 대한 판결이 이를 일정 부분 보여줬다는 것이다. 반면 정치권은 재벌 총수의 범죄 재발방지와 엄정한 처벌을 위해서라도 경제민주화법안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민주통합당은 김 회장 선고 후 “재벌기업들이 이번 판결의 의미를 무겁게 받아들이고 비자금 조성, 편법 승계, 내부거래 등 사회적 질타를 받았던 기업문화를 시급히 개선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양측의 대립은 재벌개혁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 차이에서 비롯된다. 정치권은 경제민주화를 위해선 지배구조까지 바꿔야 한다는 논리다. 이에 맞서 현행법으로도 경제민주화를 이룰 수 있는데 이중삼중으로 법안을 만드는 것은 과잉입법이란 게 재계의 인식이다.

재벌개혁, 현행법으로 가능한가
재계는 경제민주화란 구호 속에 ‘재벌 때리기’ 분위기가 있다고 본다. 경제력 남용 방지, 오너 전횡 방지, 공정거래, 국가 경쟁력 강화 등이라면 현행법의 엄격한 집행으로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전경련에 따르면 현재 대기업들은 자산총액, 종업원 수, 매출액 등을 근거로 공정거래법ㆍ상생협력촉진법 등 30여 개의 법령으로 규제를 받고 있다. 특히 자산총액 5조원 이상의 상호출자 제한 기업집단에 대해선 계열 상장사는 물론 비상장 기업도 거의 모든 거래를 공시하도록 하고 있다. 공정거래법은 또 자산규모별로 촘촘히 기업의 행위를 규제하고 있다. 등기이사로 등재되지 않아도 사실상의 이사로 간주되면 민형사상 책임을 지도록 하는 상법상 ‘사실상의 이사제도’로 오너의 불법행위를 처벌할 수 있다. 대선 주자들이 엄벌을 강조하고 있는 대기업의 사익 추구, 일감 몰아주기 역시 상법상의 ‘회사 기회의 유용금지’ 조항으로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전경련 관계자는 “우리나라에선 외국에 거의 없는 업무상 배임죄를 통해 오너의 범죄 행위를 거의 제한 없이 처벌할 수 있다”고 말했다. 홍익대 김종석(경제학·전 한국경제연구원장) 교수는 “횡령ㆍ배임 행위를 통한 오너 불법행위의 처벌뿐 아니라 경제력 남용 방지, 투명경영 등도 현재의 법으로 가능한데 이른바 경제민주화법안을 만들려는 것은 옥상옥”이라고 말했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재벌 총수 개인에 대한 처벌이 재벌개혁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순환출자 금지와 같은 지배구조 개편은 물론 불공정거래나 범죄를 저지른 재벌 총수에 대한 사면권 제한 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민주통합당 이용섭 정책위 의장은 “이번에 이례적으로 좋은 판결이 나왔다고 해서 현행법으로 경제민주화가 가능하다고 보는 건 어불성설”이라며 “현행법으로는 재벌 개혁, 불공정행위 근절과 같은 목표를 이룰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유종일 교수도 “기존의 법과 규제를 잘 지키도록 하는 건 기본일 뿐, 이는 경제민주화의 출발점이다. 이번 판결에 진일보한 측면이 있지만 양형기준에 따르더라도 최저 형량을 내린 것이고 편법적인 경영권 세습에 대해선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양측이 날카롭게 맞서는 가운데 그동안 대기업 오너의 전횡 방지 등을 위해 관련 법을 일관성 있게 집행하는 게 필요하다는 주장이 우세하다.
재계 관계자는 “그간 오너의 탈법 행위를 다소 관대하게 처벌한 부분이 있다. 이번과 같은 법 적용이 지속적으로 이뤄지면 불법 경영이 줄어들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용섭 의장은 “이번 같은 판결이 일관성 있게 유지되려면 사면권 제한 같은 경제민주화법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력 대선주자로 언급되는 안철수 서울대 교수는 공약집 성격의 저서 『안철수의 생각』에서 “기업주가 전횡을 일삼거나 주주 일가가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범죄다. 이런 행위는 처벌 대상이 되는데 지금까지 행정ㆍ사법부가 입법 취지대로 집행하지 않은 것이 문제”라고 밝혔다. 고려대 강성진(경제학) 교수는 “처음부터 엄정하게 법을 집행했으면 경제민주화 이야기까지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재벌 개혁, 경쟁력 약화시키나
재계는 재벌개혁을 핵심으로 하는 경제민주화 법안이 글로벌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순환출자 금지, 출자총액제한제 부활 같은 제도가 투자를 줄일 것이란 주장이다. 기업 경영의 불확실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대기업 오너가 구속될 경우 대규모 사업을 과단성 있게 추진하는 게 어려워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익명을 원한 대기업의 고위 임원은 “기업이 가장 싫어하는 게 불확실성인데,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에다 대선을 앞두고 정치적 불확실성까지 더해져 기업 활동이 크게 위축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재계 관계자는 “대기업 오너 경영의 폐해를 지적하는 시각이 있지만 한국 기업들은 오너의 강력한 추진력을 바탕으로 경쟁력을 키워 왔다. 오너 구속이 잦아지고 장기화되면 적절한 시기에 과감한 투자를 하기 어려운 게 엄연한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한 반격 역시 만만치 않다. 오너 1인에게 의존하는 체제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성공회대 유철규(경제학) 교수는 “오너 한 명의 움직임에 그룹이 흔들리는 구조를 고쳐야 할 때”라며 “최고경영자(CEO) 리스크를 줄이는 방안을 본격적으로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연세대 성태윤(경제학) 교수도 “오너의 불법행위로 인한 위험이 더 크다. 이를 인식하는 게 해당 기업이나 국민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순환출자, 경제민주화와 무관한가
경제민주화는 골목상권 규제에서 순환출자 금지 같은 지배구조 개편까지 폭도 넓고 내용도 복잡하다. 개념 자체가 모호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래선지 허창수 전경련 회장은 최근 “정치권에서 말하는 경제민주화의 진정한 뜻을, 의미를 모르겠다”고 말한 바 있다.

재계와 정치권의 가장 첨예한 대립 부분이 순환출자 금지다. 재계는 경제민주화와 관련 없다는 입장이다. 기업을 하는 사람들이 자기 돈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면서 경영권을 효율적으로 장악하기 위한 경영전략이란 것이다. 따라서 불법·탈법이 아니면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이다. 기업 투자 의욕만 저하시켜 성장 동력과 일자리 창출을 위축시키는 실익 없는 법안이란 인식이 깔려 있다.

경제민주화법안을 추진하는 쪽의 논리도 거세다. ‘순환출자가 재벌의 경제력 집중, 오너 전횡의 근간인 만큼 이것부터 해소해야 한다. 실제 지분 이상으로 경영권을 행사하고, 경제가 어려워질 땐 국민경제에 막대한 피해를 줄 수 있어 사전적 예방 차원에서라도 금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경제민주화법안이 실제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재계와 정치권의 입장 차이가 어떻게 조율될 수 있느냐다. 익명을 요구한 재계 관계자는 “경제민주화법안이 대선 득표전략과 국민감정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법안이 만들어질 때는 현실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새누리당 나성린 정책위 부의장은 “경제민주화는 정당·의원에 따라 재벌해체부터 동반성장까지 스펙트럼이 대단히 넓다. 앞으로 법안이 만들어지려면 당론을 마련하고 여론수렴, 여야 협의를 거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여론과 경제상황에 따라 경제민주화법안의 수위가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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