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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정치적 야심 없어… 반대파와 화해하고 싶다”

“내 집, 내 침대에 누워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7년째 망명 중인 탁신 친나왓(63·사진) 전 태국 총리의 하소연이다. 그는 잉락 친나왓 현 총리의 친오빠로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2004년 동남아 16위 부자로 꼽았던 인물. 2006년 군사쿠데타로 실각해 해외 유랑 중인 그가 전용기로 방한했다. 18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만난 그는 “비행기가 내 집”이라며 여유롭게 농담했지만 조금은 지쳐 보였다.

7년째 망명 생활, 태국 탁신 전 총리 인터뷰


그를 바라보는 시각은 복잡하다. 왕립경찰대학 졸업 후 통신회사를 경영해 태국 최대 기업 중 하나로 키워내는 수완을 발휘했다. 이후 정계에 입문해 2001년 총리에 당선됐다. 저소득층 빚의 절반을 탕감해주거나, 30바트(약 1080원)만 내면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한 의료개혁 등 그의 ‘탁시노믹스’는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2005년 재선하며 태국 헌정사상 최초로 연임에 성공한 총리가 됐지만 이듬해 군사쿠데타로 실각해 망명했다. 2008년 궐석재판에서 부정부패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재산을 몰수당했다.

하지만 태국에서 그의 존재감은 여전하다. 정치 경력이 전무했던 여동생 잉락은 그의 후광을 업고 지난해 총리로 당선됐다. 2010년 4월 유혈 사태로까지 번진 친탁신 세력 ‘레드 셔츠’와 반탁신 세력 ‘옐로 셔츠’는 여전히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그는 인터뷰에서 “나는 정치적 희생양”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이젠 반대파와 화해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대중 인기에 영합하는 포퓰리스트라는 주장이 끊임 없이 나온다.
“내 정책의 일부만 본다면 그런 주장을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 궁극적 정책 목표는 개발도상국인 태국에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동시에 발전시키는 거였다. 자본주의는 경제발전엔 도움이 되지만 만병통치약은 못 된다. 개발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저소득층과 농민을 보듬고 가야 했다. 경제를 발전시키면서 동시에 그 혜택에서 소외된 계층을 위한 복지에도 힘써야 한다고 믿었다. 정부 운영에선 성장 또는 복지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성장과 복지를 모두 가져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과도한 저소득층 편중 정책이 아니었나. 2011년 미국의 아시아 전문 기자 톰 플레이트가 인터뷰 후 내놓은 책에도 ‘포퓰리스트’라는 표현이 들어간다.
“저소득층에게 기회를 주고 희망을 부여하면 인기는 저절로 얻어진다. 인기를 얻기 위해 그런 정책을 편 게 아니다. 자연스럽게 인기가 따라온 거다. 저소득층은 희망 없는 삶을 살다가 내 정책으로 기회를 얻었다. 그러니 오늘날까지 나를 지지하고 다시 내가 돌아오길 바라는 거다. 배고플 때 민주주의는 사치다. 하지만 어느 정도 생활 수준이 되면 민주주의를 갈망하게 된다. 지금 태국의 정국이 어수선한 건 민주주의를 원하게 된 민중과 기득권을 지키려는 엘리트 간의 충돌때문이다. 나는 그 정치적 상황의 희생양이다.”

-하지만 부정부패 혐의로 실형까지 선고 받고 망명 중인데.
“부정부패 혐의는 기득권을 잃을까 걱정하는 태국 내 일부 엘리트층이 내게 가하는 정치적 공격이다. 부정부패 혐의는 사실 세계 어디에서나 정적을 공격할 때 자주 쓰는 수단 아닌가. 요즘 태국 내 사법정의가 흐트러졌다고들 한다. 내 재판의 경우도 제대로 법 집행을 한다면 징역형을 먼저 치르게 하는 게 순서다. 그런데 대뜸 재산 몰수부터 해버리지 않았나. 옳고 그름이 무너지고 있다는 증거다. 한때 포브스가 내 자산을 22억 달러(약 2조4000억원)로 평가한 적이 있다. 지금은? (해외의 자금을 제외하곤) 자산이 100만 달러가 채 안 된다.”

-부정부패 혐의가 날조됐다는 주장인가.
“그렇다. 내겐 부정부패를 저지를 이유가 없다. 기업가로 성공했고 자산이 충분하다.”

-정치 입문 전에 기업을 키웠던 이유는.
“난 정치를 하기 위해 먼저 돈을 벌었다. 우리 아버지는 집안이 아직 어려울 때 정계에 입문해 국회의원이 됐다. 힘들어하는 어머니를 보며 우선 재력을 갖춰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가난한 정치인은 부정부패의 유혹에도 약할 수밖에 없다. 집에 와서 배고파하는 식구를 보면 부정부패에 나약해지기 쉽다.”

-군사쿠데타 이후 귀국을 못하고 있는데.
“망명 후 첫해는 참 힘들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적응하는 게 인간이더라. 이젠 꽤 편안하게 생활한다. 세계 거의 모든 나라 입국 비자가 발급돼 여행도 자주 다닌다. 내가 갈 수 없는 나라는 나의 고국, 태국뿐이다.”

-두바이가 주요 거처인데.
“누가 내게 ‘어디 사느냐’고 물어보면 난 ‘비행기’라고 답한다(웃음). 여러 국가를 방문하다 보니 하늘 위에 붕 떠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서다. 미국·중국 등을 다니며 주요 지도자들을 자주 만난다. 최근엔 미국에서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을 만나 미국 정부의 아시아 정책, 특히 중국과 동남아국가연합(ASEAN)에 대해 대화했다.”

-한국 방문도 꽤 잦다. 4대 강 사업에 대한 관심도 표명했는데.
“내가 총리 시절 세웠던 계획과 일맥상통해서 더 관심이 갔다. 태국은 강 정비 사업에 110억 달러의 예산을 책정했다. 한국·중국 등 기업들이 진출을 모색 중인데, 한국의 기술은 뛰어나지만 가격 측면에서 경쟁력을 제고해줬으면 한다.”

-잉락 현 총리와 거의 매일 통화한다던데.
“맞다. 농담처럼 잉락에게 ‘나를 너의 백과사전으로 삼으라’고 얘기한다.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펼칠 수 있는 충직한 백과사전 말이다.”

-그러니 잉락 총리가 오빠의 꼭두각시라는 지적이 나오지 않나.
“리더로서의 잉락을 과소평가하는 말이다. 여전히 각료 중 일부가 내게 연락을 해서 정책 조언을 구할 때가 있다. 내 생각을 말해주긴 하지만 꼭 ‘총리와 상의하라’고 당부한다. 리더가 되기 위해선 ▶일에 대한 지식 ▶국민에 대한 순수한 사랑 ▶희생정신이 있어야 한다. 잉락은 이 삼박자를 고루 갖췄다. 처음엔 행정 경험이 전무하다 보니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간 묵묵히 인내하며 국정을 잘 익혔고, 이제 훌륭한 리더로 손색이 없다.”

-오빠의 영향력이 너무 강한 것 아닌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막내 잉락은 열여덟이었다. 임종 때 어머니가 ‘여동생을 잘 부탁한다’고 신신당부하셨고, 강한 책임의식이 생겼다. 잉락을 딸처럼 생각하고 뒷바라지했다. 해외 유학을 보냈고, 내 회사에서 사원부터 CEO까지 경험을 쌓게 했다. 잉락은 서른 다섯에 CEO자리에 올랐다. 내 도움도 있었지만 본인이 잘해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잉락 총리 측이 오빠의 사면을 추진하는 ‘국가화합법안’을 내놓아 논란이 뜨겁다. 이 법안이 귀국의 지름길이 되는 것 아닌가.
“아니다. 그 법안은 이름 그대로 국가의 분열을 끝내고 화합하자는 취지다. 정국이 불안한 건 내 반대파가 나의 귀국이 자기들의 정치적 손해로 이어질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와 왕실과의 관계도 이간질하고 있다. 국왕에 대한 나의 충성은 변함이 없다.”

-귀국 후 어떤 정치적 계획이 있나.
“여동생을 잘 보필하고 싶은 생각뿐이다.”

-이젠 아무런 욕심이 없다는 건가.
“마하트마 간디는 ‘폭력은 더 큰 폭력을 낳을 뿐’이라고 경고했다. 난 더 이상 정치적 야심이 없다. 벌써 상당수 정적이 내게 와서 용서를 구했고, 웃으며 등을 두드려 줬다. 이젠 화해의 손을 내밀고 싶다. 내 나라가 발전하는 걸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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