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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달착륙 과정을 1865년에 예언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새 시대를 연 거목들-쥘 베른

쥘 베른의 소설에 나오는 신기한 과학ㆍ기술의 이기(利器)들은 세 부류 중 하나다. 베른 생전에 발명됐거나 사후에 발명됐거나 아직 발명되지 않았다.
‘사이언스 픽션(science fiction)’의 역사는 오래다. 기원전 24세기 작품인 길가메시서사시(Gilgamesh敍事詩)를 사이언스 픽션의 원조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사이언스 픽션을 우리말로 공상과학소설이라고 옮기는 것은 일본 번역계를 따라 한 것이다. 공상(空想)은 “현실적이지 못하거나 실현될 가망이 없는 것을 막연히 그리어 봄”이다. 부정적인 뜻이 담겼다. 공상이라는 군더더기 표현을 빼고 사이언스 픽션을 과학소설이라고 부르자는 주장에 설득력이 있다.



‘사이언스 픽션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은 쥘 가브리엘 베른(1828~1905)이다. 베른을 취재한 1902년 6월 28일자 뉴욕타임스 기사도 그를 ‘과학 소설가(novelist of science)’라고 불렀다. 그가 쓴 소설은 ‘과학적 소설(scientific novel)’이라고 지칭했다.



한 문학사학자에 따르면 베른은 역사상 228번째 과학소설가다. 하지만 작가ㆍ과학자ㆍ발명가에 미친 베른의 영향력을 넘볼 수 있는 과학소설가는 많지 않다. 베른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번역된 작가다. 일등은 추리소설가 애거사 크리스티(1890~1976)다.



우주시대 그린 SF의 아버지

베른의 소설은 어린이용이 아니었다. 외국 출판사들 입장에서 베른의 소설은 어린이물 독서 시장에서 승산이 있었다. 외국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베른의 소설은 원문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편집됐다. 다행인 것은 수많은 과학자들이 어린 시절부터 그의 소설을 만난 것이다. 우주 시대를 연 선구자들은 베른의 소설을 읽고 자란 ‘쥘 베른 키즈(kids)’다. 로켓ㆍ인공위성 연구의 선구자인 소련 항공학자 콘스탄틴 치올콥스키(1857~1935), ‘현대 로켓 공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로버트 고더드(1882~1945), 아폴로 계획을 성공시킨 베르너 폰 브라운(1912~1977)은 자신들이 베른의 『지구에서 달로(De la Terre <00E0> la lune)』(1865)를 읽으며 우주 여행을 꿈꿨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했다.



베른은 “뭐든지 한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이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베른은 『지구에서 달로』에서 인류가 달에 갔다 지구로 돌아오는 과정을 그렸다. 104년 후인 1969년, 아폴로 11호는 소설에서처럼 플로리다에서 발사돼 돌아올 때는 대양에 떨어져 회수됐다.



그의 작품에 나오는 것들 중에는 잠수함, 기구(氣球)와 같이 이미 세상에 등장했던 것도 있었다. 달여행 소설의 원조도 머터그 먹더멋(Murtagh McDermott)의 『달여행(A Trip to the Moon)』(1728)이다. 베른의 작품에 나오지도 않는데 그가 발명한 것으로 일반인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도 있다. TVㆍ원자폭탄ㆍ인터넷 같은 것들이다. 물론 베른이 실제 최초로 예언한 것들도 많다. 1920년에 처음 등장한 뉴스방송(newscast)을 베른은 1889년에 예언했다. 태양돛배(solar sail), 화상회의, 테이저(taser) 총, 사형용 전기의자도 베른이 원조다.



쥘 베른은 2남3녀 중 장남으로 프랑스 낭트에서 출생했다. 낭트는 항구다. 출생지의 영향으로 베른은 어려서부터 모험ㆍ여행에 매료됐다. 베른의 소설은 과학소설이기 이전에 모험소설이다. 나중에 소설가로 성공해 큰돈을 벌게 되자 베른은 요트를 구입해 영국ㆍ프랑스ㆍ지중해 해안을 여행했다. 아마추어 시인이기도 한 아버지 피에르 베른은 변호사였다. 아들이 가업을 이어 변호사가 되기를 바랐다. 아들이 딴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생활비를 끊었다.



베른에게는 10여 년간의 무명 시절이 있었다. 문학 살롱을 드나들며 희곡, 오페라 대본, 단편 소설을 집필했다. 짝사랑하는 여자에게 바치는 시를 수십 편 쓰기도 했다. 1857년 결혼한 다음에는 생계를 위해 증권중개인으로 일했다. 꽤 소질이 있었으나 베른은 자신이 하는 증권 업무를 혐오했다.



1862년 피에르-쥘 에첼(1814~1886)을 만나면서 운이 트이기 시작했다. 에첼은 드뮈세ㆍ발자크ㆍ보들레르ㆍ위고ㆍ조르주 상드 등 내로라 하는 문인들의 책을 출간했다. 번번이 거절당하던 베른의 원고를 에첼이 가능성을 알아보고 출간했다. 『5주간의 풍선여행』(1863)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베른의 출세작이었다. 기구를 타고 아프리카 나일강의 근원을 발견한다는 내용이다.



40세 중반 무렵에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가 됐다. 베른의 소설은 에첼이 한 달에 두 번씩 내는 『교육과 여가』라는 잡지에 연재됐다. 사람들은 베른의 소설을 읽기 위해 잡지를 샀다. 베른과 에첼은 20년 출판 계약을 맺었다. 베른은 1년에 2~3편 이상의 소설을 쏟아 냈다. 평생 100권을 쓰는 게 목표였다.



에첼이 베른이 이룩한 성공의 일등 공신이었다. 에첼은 무자비한 편집권한을 행사했다. 반유대주의적인 내용은 삭제했다. 불행의 그림자를 지우고 해피엔딩으로 바꿨다. 『해저 2만리』(1870)에 나오는 네모 선장은 원래는 ‘성격 좋은’ 사람이었으나 에첼이 신비롭고 비합리적인 인물로 새롭게 탄생시켰다. 베른은 더 큰 부자가 될 뻔했다. 에첼은 베른에게 한동안 인세가 아니라 원고료만을 지불했다.



당시 사람들은 과학에 대한 관심이 컸다. 독자들의 목마름을 해갈한 것은 베른이었다. 그는 과학과 지리학을 문학과 접목시킨 후 모험ㆍ여행과 버무려 새로운 소설 분야를 창출한 것이다. 베른은 매일 15종의 신문을 읽었다. 최신 과학ㆍ기술을 모니터링했다. 국립도서관은 그의 개인 서재와 같았다. 메모광이었던 베른은 방대한 독서를 통해 소설에 담길 과학ㆍ기술을 흡수했다. 얄궂게도 베른은 과학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중등교육을 받을 때 베른은 그리스어ㆍ라틴어ㆍ철학은 잘하는 편이었으나 과학 과목과 작문은 겨우 패스하는 수준이었다. 그의 진짜 관심사는 지리학이었다. 과학ㆍ기술의 예견에 있어서는 천재였으나 베른은 자전거에 대해서도 시큰둥했다. 전화도 가급적 피했다.



베른의 문체는 시대를 앞섰다. 군더더기가 없고 사건이 속도감 있게 전개됐다. 베른은 알렉상드르 뒤마(1802~1870)와 빅토르 위고에게 글쓰기를 배웠다. 특히 뒤마는 매일매일 하루 중 정해진 시간은 집필에 할애해야 한다는 것을 베른에게 강조했다.



국제금융이 지배하는 암울한 세상 예언

베른이 세계적인 작가가 되자 그를 둘러싼 신화가 생겨났다. 그가 여행을 한 적이 없고 오로지 상상으로 글을 쓴다는 소문이 돌았다. 1880년대 후반 이탈리아에서는 그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설이 유포됐다. 어떤 작가 집단이 베른이라는 필명으로 책을 뽑아낸다는 주장이었다.



베른은 소설의 내용에서는 시대를 앞서갔지만 사회문화적으로는 그 시대의 산물이었다. 중년 이후에는 신앙심을 상실했지만 원래는 정통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한 보수적인 부르주아였다. 극우적 프랑스 민족주의자였으며 프랑스 제국주의를 지지했다. 소설 속에서 여성에게 특별한 임무를 주지 않았다. 사랑 이야기도 없었다. 사랑에 대해 쓸 수 있는 재주가 자신에게는 없다고 고백했다.



1871년 베른 가족은 아미앵으로 이주했다. 인구가 9만 명 정도였던 아미앵에 있는 그의 집은 루이 15세 시대 가구로 채웠지만 외양은 수수한 집이었다. 아미앵은 아내의 고향이기도 했다. 베른은 1856년 아미앵에서 거행된 친구 결혼식에 갔다가 아내 오노린을 만났다. 딸을 두 명 둔 과부였다. 둘은 이듬해 결혼했다. 부부는 베른이 1905년 당뇨합병증으로 사망할 때까지 해로했다.



오노린은 베른이 바람을 피운다고 의심했다. 베른은 소화불량, 안면근육마비 등의 증세로 고생했다. 그는 건강염려증(hypochondria) 환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베른을 아내는 부지런히 아들처럼 돌봤다. 오노린의 역할은 에첼 못지않게 중요했다. 『5주간의 풍선여행』이 번번이 출판사들로부터 무시당하자 베른은 원고를 불태워버리려고 했다. 아내가 막았다.



아들 미셸과 관계도 순탄하지 않았다. 베른은 아들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나이가 들면서 사이가 원만해졌다. 베른의 사후에 서랍 속에서 수많은 원고가 발견됐다. 아버지의 저서를 사후에 출간한 것은 소설가가 된 아들 미셸이었다. 미셸은 베른의 원고를 심하게 편집하거나 아예 새로 썼다.



베른은 1892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1872년께부터 아카데미프랑세즈 회원 물망에 올랐으나 실패했다. 열심히 로비를 했다. 질투 때문인지 아카데미프랑세즈는 그에게 결국 ‘신포도’가 됐다. 베른은 회원이 되는 것을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다고 주장했다.



베른은 디스토피아 소설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1989년 베른의 증손자가 『20세기 파리』를 발견해 1994년 출간했다. 에첼이 20년 후에 출간하라고 권한 소설이었다. 과학이 고도로 발전했으나 사람들이 국제금융의 지배하에서 신음하는 시대를 예견한 소설이었다.



김환영 기자 whan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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