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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호였지만 가장으론 낙제점부인 소피아에게 평생 큰 빚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모스크바 남쪽의 툴라시 인근엔 톨스토이의 영지 야스나야 폴랴나가 있다. ‘청명한 하늘 아래, 숲 속의 빈터’라는 뜻이다. 자작나무 오솔길을 걸으면 하얀 이층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작가가 삶의 대부분을 보내면서 『전쟁과 평화』『안나 카레니나』 『부활』 등을 집필하던 곳이다.

톨스토이 부부, 애증의 48년 결혼생활

여기에 둥지를 튼 톨스토이의 가정생활은 복잡하고 굴곡이 많았다. 신랑 톨스토이가 결혼식 전날 16세 연하의 신부 소피아 베르스에게 내민 일기장에는 그가 경험한 수많은 육체적 유혹, 심지어 농노가 임신한 자신의 아이 얘기까지 기록돼 있었다. 『안나 카레니나』의 시작 부분에 등장하는 ‘행복한 가정들은 모두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자신의 방식대로 불행하다’는 문구에 따르면, 톨스토이 부부는 두 번째 범주에 속한다.



갈등의 원인은 우선 남편에게 있었다. 젊은 시절 주색잡기에 탐닉하던 그는 야스나야 폴랴나의 본채 목조 건물까지 노름으로 날렸다. 자유분방한 영혼의 소유자였던 그는, 동시에 평생 삶의 근본적 문제들에 대한 끈질긴 탐구에 몰두한 이상주의자이기도 했다. 자전소설로 출발해 러시아 문학사에 큰 획을 긋는 장편 소설을 연이어 발표한 톨스토이는 점차 도덕주의자로 선회했다. 전에 쓴 자신의 소설들을 ‘나쁜 문학’으로 규정하고,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분명하고 강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또 글로 쓴 내용을 삶에서 실천하려 했다. 도덕주의자로 변한 예술가, 소박한 농부의 옷을 걸친 귀족의 후예, 수없이 많은 활동을 하나의 체계로 통합하려던 그는 모순투성이의 인물이었다.



자기반성을 통한 도덕적 완성을 추구하는 남편을 향해 아내가 가졌던 기대와 사랑은 실망과 미움으로 변해갔다. 두 사람 다 개성과 성격이 강한 것도 문제였다. 소피아가 출산의 고통을 호소하면, 톨스토이는 고통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에 이른다고 응수했고, 화가 치민 아내는 인류의 구원을 고민한다는 작자가 정작 자기 자식의 양육과 아내의 고통에는 무관심하다고 대들었다. 부부 싸움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들은 거짓과 위선, 진실 등이었다. 자식들도 아버지, 어머니 편으로 갈라졌다.



가정은 불행했지만 톨스토이가 작가 및 사회 활동가로 누리는 위상은 막강했다. 그의 가르침을 담은 저술들은 러시아와 해외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사상은 인도의 간디, 팔레스타인의 키부츠 운동에 영향을 미쳤으며 러시아 내의 권위는 황제와 교회에 필적했다.



톨스토이주의가 탄생했고 측근 그룹이 그를 에워쌌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고, 아내는 위대한 사상가의 삶에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속 좁은 여자로 비난받았다. 톨스토이 말년의 가출은 그녀를 더욱 곤경에 빠트렸고, 좌절한 아내는 두 차례나 연못에서 투신자살을 시도했다.



하지만 소피아가 없는 톨스토이의 삶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많은 자녀를 직접 키웠고, 방대한 분량의 남편 원고를 열심히 필사했으며,『크로이체르 소나타』가 출판 금지됐을 때는 문제 해결을 위해 많은 노력도 했다. 사진과 피아노 연주에 조예가 있었던 예술가적 기질의 그녀는 녹록지 않은 영지 살림을 꾸리는 데도 수완이 있었다. 그래도 여론은 늘 그녀에게 적대적이었다. 가출한 남편의 건강이 갑자기 악화돼 아스타포보 역에 누워 있다는 전보를 받고 자녀들과 함께 달려왔지만 소피아는 끝내 남편의 임종 입회를 거부당했다. 두 사람 사이의 생전 화해는 이루어지지 못한 셈이다.



세상을 떠난 톨스토이는 유언에 따라 야스나야 폴랴나의 숲 속에 비석 하나 없는 소박한 무덤에 묻혔다. 그리고 아내 소피아 베르스는 인근의 별도 가족 묘역에 잠들어 있다.



김현택 한국외국어대 교수?통번역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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