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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을 현대미술 중심지로 만든 전설적 컬렉터

솔로몬 구겐하임 재단
미국엔 이른바 ‘7대 유대인 패밀리’란 것이 있다. 바르부르크, 쉬프, 리먼, 셀리그먼, 골드먼, 색스, 그리고 구겐하임가(家)다. 구겐하임을 제외한 6개 가문은 모두 독일계이며 금융을 주 업종으로 삼는다. 구겐하임가의 선조인 마이어 구겐하임은 1828년 스위스 독일어 지역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났다. 1847년 미국으로 건너와 모진 고생 끝에 광산왕이 된 입지전적 인물이다. 마이어는 일곱 아들을 뒀고 그중 여섯째인 벤저민은 1912년 타이태닉호 북대서양 침몰사고로 익사했다. 벤저민은 딸만 셋을 뒀는데 그중 둘째가 페기다.

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 사교계 여왕 페기 구겐하임

아버지는 타이태닉 침몰로 숨져
페기 구겐하임(사진)은 1898년 뉴욕 맨해튼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도 네덜란드계 유대인이다. 페기는 할아버지 덕으로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항상 무엇인지 부족함을 느꼈다. 아버지 벤저민은 페기를 귀여워했으나 천성적인 방랑벽으로 가정을 돌보지 않았다. 아버지의 잦은 외도 탓에 어린 시절 부모의 불화를 보고 자란 페기는 한동안 우울증을 앓았다. 타이태닉호 침몰사고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페기는 얼마간 유산을 받았다. 부유한 외갓집에도 불행한 일이 계속 일어났다. 그러다 외조부가 세상을 떠나면서 유산을 받은 어머니의 일부 재산도 상속받게 돼 페기는 어린 나이에 부자가 됐다.

페기는 루실 콘이란 유대인 여성 가정교사로부터 철학과 경제학을 배웠다. 콘은 컬럼비아대를 나온 사회주의자였다. 페기는 물질적 풍족함 속에서 컸지만 항상 공허함을 느꼈다. 가족애의 결핍과 또 소수자 유대인에 대한 사회의 차가운 눈초리를 의식했다. 그래서 콘의 진보적 성향에 끌렸다.페기는 소일거리 삼아 잠시 서점 점원으로 일했다. 아방가르드 예술서적을 뒤적거리다 전위예술에 흥미를 느낀다. 미술에 관한 전문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지만 그녀는 현대미술을 접해 보겠다는 충동을 느껴 1920년 돌연 파리로 갔다. 뉴욕 상류층의 권태로운 삶에서 벗어나 문화의 중심지 파리에서 새로운 삶을 찾은 것이다. 당시는 프랑스 문예 황금기인 ‘벨 에포크(La Belle Epoque)’가 막 끝나고 문화·예술 전 분야에 걸쳐 새로운 조류가 태동하던 때였다. 파리 시내 몽파르나스가엔 가난했지만 장래성 있는 화가·문인·예술가들이 카페에 모여 싸구려 포도주 몇 잔을 놓고 밤새껏 대화를 나누던 그런 시절이었다. 페기도 이들과 어울렸다.

아버지의 사랑에 굶주렸던 페기는 유독 남성편력이 심했다. 화가·조각가·문인 등 그저 눈빛이 맞으면 상대의 신분이나 장래성을 따지지 않고 어울렸다. 건달도 지성적으로 보이면 끌렸다. 첫 남편 로런스 베일이 그런 경우다. 베일은 화가·조각가·작가로서의 재능은 있었지만 생활엔 무능한 남자였다. 7년을 살다 헤어졌다. 그래도 수확은 있었다. 베일의 소개로 마르셀 뒤샹 등 당대 잘나가는 미술가 인맥을 얻었다. 뒤샹은 프랑스 태생 미국인으로 다다주의와 초현실주의의 대가다. 그는 1917년 뉴욕 독립미술가전시회에 남성 소변기를 출품해 세인을 경악하게 한 개념 미술가였다. 페기는 뒤샹의 도움으로 런던에 ‘젊은 구겐하임’ 갤러리를 차리고 이 화랑을 기지로 많은 대가와 교류했다. 루마니아 조각가 콘스탄틴 부랑쿠시, 러시아계 유대인 사진작가 맨 레이, 프랑스화가 이브 탕기 등이다. 탕기는 페기의 한 시절 애인이기도 했다.

페기는 제2차 세계대전 직전부터 본격적으로 미술품을 수집했다. 당시 유럽은 전운이 감도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덕분에 싼값에 좋은 그림을 살 수 있었다. 세 번째 남편인 독일 태생 화가 막스 에른스트의 조언으로 초현실주의 작품을 대거 구입했다. 샤갈·달리·에른스트·탕기·칸딘스키·뒤샹·피카비아·몬드리안 등의 작품이 그녀의 중점 컬렉션 목록이었다.

컬렉션 상속 않고 미술관에 기증
대전이 발발하자 페기는 나치의 위협에 시달리는 마르크 샤갈을 위시한 많은 유럽 유대인 예술가의 미국 피란을 도왔다. 카펫에 둘둘 말아 공수해 온 유럽 컬렉션으로 페기는 뉴욕에 ‘금세기 화랑’을 열었다. 당시 많은 뉴욕 갤러리는 유럽 작가의 그림을 파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페기는 그림 장사보다 신진 화가의 발굴과 지원에 몰두했다. 대표적 인물이 잭슨 폴록과 마크 로스코였다. 페기는 입체·초현실주의·추상화풍의 후원자가 된 것이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페기의 활약으로 전후 뉴욕이 파리와 함께 세계 미술시장을 양분하게 되고 아울러 현대미술의 중심지가 됐다.

미국 생활에 염증을 느낀 페기는 49년 다시 유럽으로 돌아갔다. 베네치아 운하변에 위치한 18세기 대리석 저택을 개조해 미술관을 만들어 자신이 소장했던 주요 작품을 전시했다. 이 미술관은 유럽뿐 아니라 세계 미술애호가의 사랑을 받았다. 79년 페기는 심장마비로 자유분방했던 한평생을 마치고 미술관 정원에 누웠다.
페기는 20세기 미술계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장래성 있는 신인을 발굴해 무명 시절부터 그들을 도와 성공으로 이끌었다. 그녀는 미술품 투기꾼들이 유명 화가의 작품을 오래 감춰 두다 세월이 지나면 경매장에 내놓아 큰돈을 버는 행태를 경멸했다. 모든 예술창작물은 한 개인의 독점물이 아닌 인류 전체의 공동 자산이므로 모두가 보고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지론을 폈다. 또 평생 이를 실천했다. 그녀는 돈 나가는 자신의 컬렉션을 단 한 점도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았다. 작은아버지 솔로몬이 뉴욕에 건립한 솔로몬 구겐하임 박물관에 대부분 기증했다. 부모로부터 받은 유산으로 풍족한 삶을 살면서 남자와 미술품 두 가지를 수집한 페기였지만 가진 자의 사회적 책무는 결코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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