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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목적이거나 감상적이 아닌, 새로운 모성의 시대

블록버스터 영화가 극장가를 압도하는 와중에도 비상업성 영화 한 편이 조용히 관객을 모으고 있다. 바로 린 램지 감독의 ‘케빈에 대하여’. 불과 17개의 스크린으로 개봉해서 (‘도둑들’과 ‘다크나이트 라이즈’는 각각 1000개 이상) 2만7000여 명의 누적 관객수를 기록했다.어떤 영화일까. 케빈(이즈라 밀러)은 지금 미성년 교도소에 있고, 그의 엄마 에바(틸다 스윈튼)는 살인마의 어미라는 욕설을 들으며 길가다 뺨을 맞기도 한다. 그런데 이 아들은 어릴 때부터 소시오패스 기질을 보였고 엄마와의 사이도 삐걱거렸었다.

문소영의 문화트렌드 조용한 돌풍, 영화 ‘케빈에 대하여’

사실 자유로운 기질의 여행작가 에바는 애초에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 덜컥 케빈을 임신한 후 어쨌든 잘 키워보려고 아이 아빠와 가정을 이뤘다. 그런데 워킹맘으로 사는 것도 피곤한 판에 이 아들내미는 (나중에 태어난 둘째와 비교해봐도) 유난히 계속 빽빽 울어대고 속을 썩였다. ‘너만 안 태어났더라면…’이라는 생각이 에바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이를 방치하거나 학대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조숙하고 예민한 케빈은 엄마의 속마음을 감지했던 것 같다. 어린 나이에 벌써 “익숙한 것과 좋아하는 건 다르지. 엄마는 내가 그냥 익숙할 뿐이잖아?”라고 말하며 엄마를 효과적으로 괴롭힐 일만 골라서 했다. 아빠 앞에서는 착한 아이인 척하면서.

이렇게 에바와 케빈의 모자(母子)관계는 끝없이 엇나가면서 악순환을 거듭했다. 이러한 과거의 회상이 현재와 교차하며 계속 나온다. 에바가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를 더듬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청소년 범죄가 심각한 이슈로 떠오른 우리나라에서 이 이야기는 결코 낯설지 않다. 사람들은 청소년 범죄자가 불우한 가정과 잘못된 부모 탓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경우에 그렇기도 하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에바는 본능적으로 자식을 사랑하고 희생하는 엄마는 아니었다. 그러나 사랑하려는 노력을 했고 양육의 의무도 다했다. 결국 에바도, 관객도, 정확히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끝끝내 알 수가 없다. 이것이 현실적인 애매함이다.

그러나 에바는 어쨌든 범죄자의 엄마로서 책임을 진다. 그래서 이 영화는 ‘엄마’에 대한 이야기다. 최근 몇 년간 한국문화계의 화두도 ‘엄마’였다. 문학 한류의 선봉이 된 소설 엄마를 부탁해, TV드라마 ‘엄마가 뿔났다’, 영화 ‘마더’ 등등. 이들은 엄마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시각에 반기를 들거나 강렬한 모성애의 어두운 면을 비추는 식으로 모성신화에 도전했다. 하지만 등장하는 엄마들이 이미 그 모성신화에 부합하는 일방적 희생과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반면에 ‘케빈에 대하여’는 자아가 강하고 독립적인 엄마의 새로운 모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파국이 일어난 뒤 에바는 한국 뉴스 속 일부 청소년 범죄자 부모처럼 “우리 애는 그런 애가 아니에요. 쟤(피해자)가 자극했어요”라고 하는 식으로 아들을 감싸고 돌지 않는다. 그녀는 아들의 악마성을 어릴 때부터 꿰뚫어 보아 왔고 자신도 피해를 입어 왔다. 그렇다면 정반대로 ‘나도 피해자야’라고 외치며 여행가답게 외국의 오지로 떠나버리는 것은 어떨까? 그러나 그녀는 도망치지 않는다.

에바는 피해자 보상금으로 재산도 다 내놓고, 간혹 마주치는 피해자 유족의 화풀이도 묵묵히 받아넘긴다. 그렇다고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것도 아니고, 의연한 태도를 유지하려 애쓴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아들을 면회 간다. 두 사람은 차가운 분위기로 마주 앉아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도 그녀는 계속 간다.
바로 이것이 새로운 모성의 이야기다. 본능적이고 맹목적이고 감상적인 그런 모성이 아니다. 에바의 행동은 ‘내가 원하던 아이가 아니었지만, 나에게 끔찍한 상처를 준 아이지만, 어쨌건 내 분신임을 인정하고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사실 케빈은 외모부터 성격까지 에바를 닮았다. 에바는 소시오패스가 아니지만 예술적으로 민감하고 가끔 잔인해지곤 하는데, 케빈은 그것이 강화되고 비틀린 버전이었다. 케빈은 자신과 닮았으면서도 멀게 느껴지는 엄마를 갈망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는 조금 다르다. 케빈에게 아빠는 증오의 대상조차 못되었다. 사랑이든 증오든 강렬한 감정으로 대면하고 자기를 봐주길 바랐던 인간은 오직 엄마였다. 에바는 거기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했다고 스스로 느낀다. 그래서 그녀는 도망치지 않고 남는다. 맹목적 모성애 때문도 아니고, 강요된 희생도 아니다. 숙고한 끝에 인간으로서 자신의 분신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엄마와 자식의 관계는 가장 원초적인 인간관계이고, 설령 미래에 결혼제도가 사라진다 해도 존속될 것이다. 그래서 모성의 진화는 계속되어야 하고, 그것이 ‘케빈에 대하여’의 조용한 돌풍의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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