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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류업체가 후원한 지제크 강연, 2030 넥타이부대 1만 명 몰려

문화평론가이자 철학자인 이택광(44) 경희대 국제캠퍼스 교수는 지난 5월 한 캐주얼 의류업체로부터 생각지 않은 연락을 받았다. 25~35세 대상의 중저가 의류 브랜드인 ‘마인드브릿지’가 “슬라보이 지제크 방한을 후원하고 싶다”고 말해왔다. 지제크(63·사진)는 라캉·마르크스·헤겔 철학과 정신분석학을 접목해 세계적 명성을 얻은 슬로베니아 철학자다. 이 교수가 평소 친분이 있는 지제크로부터 “한국에 가고 싶다”는 연락을 받고 이 소식을 자신의 트위터에 올리자 곧바로 연락이 온 것이다.



‘인문학 브나로드’ 열풍
아이패드 인기 도서 2위는 ‘군주론’
구청 철학강좌엔 주부들 줄서

 지제크는 지난 6월 27, 28일 경희대와 건국대에서 마인드브릿지와 인문강좌 교육업체 ‘아트앤스터디’의 후원으로 특강했다. 각 800명, 2000명 정원의 강연에 사전 등록자만 총 1만 명이 넘어 인터넷 추첨을 했고, 당일 강연장에는 앞자리에 앉으려 줄을 선 이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칼퇴근을 하고 온 양복 차림의 20~30대 직장인이 대부분이었다.



 이 교수는 “옷 만드는 회사가 철학자 강연을 후원해서 의외였고, 대중의 반응이 뜨거워 더 놀랐다”고 말했다. 조홍준 마인드브릿지 마케팅팀장은 “주 고객층인 30대 직장인들이 인문학에 관심이 많아 이번 후원을 진행했다”며 “앞으로 인문학을 우리의 브랜드로 가져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인문학이 대중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일상적으로 입는 의류 브랜드가 ‘현대철학’을 논하고, 웬만한 구청·박물관·극장 중에는 인문학 강좌를 운영하지 않는 곳이 없다. 여유 있는 소수층의 전유물에서 민중 속으로 파고든, 21세기 ‘인문학 브나로드(민중 속으로)’ 현상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여는 주부대학(3기)은 올 초 컴퓨터 추첨으로 수강생을 뽑았다. 80명 모집공고를 냈더니 지원자가 300명 넘게 몰렸기 때문이다. 주부대학은 30주 동안 매주 3시간씩 박물관에서 직접 문화재를 보며 학예사들에게 한국 역사·문화를 배우는 과정이다. 지난해 상·하반기에 40명 정원으로 10주간 진행했다가 주부들의 호응이 뜨거워 기간과 정원을 2배로 늘렸는데 지원자가 더 많아졌다.



 한국연구재단은 지난 2007년부터 서울 신문로2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오병남 서울대 미학과 명예교수, 최문형 한양대 사학과 명예교수, 서지문 고려대 영문과 교수 같은 원로급 학계 인사들이 한 사람당 5주씩 강연한다. 주제별로 200명씩 모집해 매주 2시간씩 공부하는데, 이미 매니어층이 형성됐다. 이외에도 관악구청과 서울대 규장각이 공동 주최하는 ‘금요 시민강좌’, 분당의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열리는 ‘장서각 아카데미’, 마포구청과 철학아카데미가 함께 여는 ‘열린 강좌’, 명동예술극장이 매달 진행하는 ‘명동 연극교실’ 같은 프로그램들이 인기다.



 스마트폰과 태블릿PC 같은 모바일 기기의 보급도 인문학 열풍에 힘을 싣는다. 전자책 출판 점유율 1위 업체인 리디북스가 올해 1분기 매출을 분석해 보니 스테디셀러 상위 20위 내 7권이 인문학 도서였다. 태블릿PC 사용자의 인문도서 선호도는 더 두드러져,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마키아벨리 군주론』(2위), 『이어령의 문명을 읽다』(7위), 『손자병법』(8위)이 올랐다. 리디북스 배기식 대표는 “소설이나 자기계발서가 전자책의 대세였던 데에서 최근 아이패드나 갤럭시탭 같은 태블릿 사용자를 중심으로 인문도서 수요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사회는 불과 몇 년 전까지도 ‘인문학의 고사(枯死)’를 말했다. 그러다가 열리게 된 ‘인문학 브나로드’는 르네상스(부활) 시대를 알리는 것일까. 하지만 서울의 주요 대학마저 인문학 석사 과정에 지원하는 학생이 없어 대학원 운영이 어려운 게 지금의 현실이다. 강연이나 저술 활동으로 대중과 꾸준히 만나온 교수들은 이를 “지식기관으로 전락해 대중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못한 대학 내 인문학의 위기”라고 이야기한다. 이택광 교수는 “정부가 인문학 지원 정책을 펼 때마다 논문 수 같은 정량 평가로만 일관하는 것이 문제”라며 “학자들이 논문 쓰는 기계가 돼 대중의 목마름을 풀어줄 만한 저자가 출판계에 드물다”고 말했다. 김상근 연세대 신학과 교수는 “학교 안에서는 교수가 학점을 무기로 권력을 휘두르지만 외부 강의에서는 콘텐트로 진검승부해야 한다”며 “학자들이 외부와의 소통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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