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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가 본 이상적 인물은 누구죠?” … 교수들 “지적 열정 놀랍다”

경영인·의료인·법조인 50여 명이 지난 6월 서울대 호암교수회관에서 최고지도자 인문학과정 박성창 교수의 강의를 듣고 있다. 이들은 교수의 질문에 앞다퉈 답하겠다고 손을 들고, 수업이 끝나면 다음 시간 예습 자료를 챙겨 돌아가는 모범 학생들이었다. [김도훈 기자]


6월 19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호암교수회관. 저녁 7시 강의를 30분 남긴 학생 열댓 명이 강의실 아래층 식당에 쪼르륵 모여 앉아 밥을 먹는다.

[현장 속으로] 오피니언 리더들, 인문학에 길을 묻다



 “지난주 데카르트 수업은 어땠어요?”



 “아이고… 심오했지….”



 “난 지난번이 세 번째 결석이었어. 문제 없으려나.” 한쪽에서는 한숨이 나온다.



 “졸업 리포트 제출이 다음주인데 큰일이네.”



 “작년 수강생이 낸 모범사례 좀 구해볼 수 없을까.”



 지나가던 교수가 이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리포트 못 썼다고 수업 빠지고 그거 하면 안 됩니다.”



 대학 교정 어디서나 들을 수 있을 법한 대화다. 말하는 이들이 양복 차림의 50~60대 중년 남성이라는 것만 빼면 말이다. 이들은 매주 화요일 저녁 7시부터 10시30분까지 인문학을 배우는 서울대 AFP 10기 수강생들이다. 안병근(69) 안세 대표이사, 이윤우(66) 삼성전자 상임고문, 이진우(62) 국립암센터 원장, 박성관(55) 한국증권금융 상무 등 48명이 한 반이다. 이들의 14, 15주차 수업을 함께 들으며 취재했다.



 15주차 수업 1교시는 최윤영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의 ‘헤르만 헤세’ 강의였다. 예습 자료로 내준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고 와야 이해할 내용이었다. 강의를 마친 최 교수가 “질문 있나요”라고 묻자마자 우남성(59)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 사장이 손을 들었다. 그는 매 강의 10분 전에 도착해 맨 앞줄에 앉고 매 시간 질문을 던지는 ‘모범생과’에 속했다. “싯다르타와 고타마 부처가 이별할 때 고타마의 말에는 가시가 들어 있네요. 헤세가 본 가장 이상적인 인물은 누구인가요?”



 교수가 답했다. “잘 읽으셨네요. 헤세는 부처를 완벽한 성자로 그리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가 무엇을 깨달았는지 모른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첫 타석을 놓친 학생들이 뒤이어 손을 들었다. “싯다르타와 고타마 부처, 뱃사공 바즈데바까지 부처가 3명 나오는 것은 서양의 삼위일체 같은 개념 아닐까요?” 이창재(47) 광주지검 차장검사의 질문이다. 최 교수는 “질문이 점점 어려워진다”며 말을 이었다.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힌두교에서 부처를 자기네 종교에 또 하나의 신으로 끌어들인 것과도 연관이 있을 겁니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90분 수업 후 10분 쉬는 시간. 저녁을 못 먹고 온 이들은 준비된 빵과 커피로 간단히 저녁을 때웠다. 2교시는 박성창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한국문학과 한국인’을 주제로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 대해 강의했다. 수업 후 김용태(54) 서울대 의대 교수는 “법정 스님은 입적 전에 자신의 글을 버리라고 했는데, 한용운은 말년에 자신의 시를 어떻게 생각했느냐”고 질문했다. 이어 다른 수강생이 “국어시험에 항상 나오는 질문인 ‘님의 침묵’의 님은 누구냐”고 묻자 웃음이 터졌고, 한 수강생이 “한용운의 시 ‘군말’에서 ‘ 너에게도 님이 있더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라는 구절이 답인 듯하다”고 말하자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였다.



 강의 후에는 낙성대 인근 맥줏집으로 자리를 옮겨 ‘3교시’가 열렸다. 매번 그날 강의한 교수가 참석해 수업 때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기 때문에 ‘3교시’라고 부른다. 14주차 강의 후에는 이석재 서울대 철학과 교수가 참석해 데카르트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동시대인들은 데카르트 철학을 어떻게 받아들였나” “당시 수학과 물리학의 발전과도 관련이 있나” “신의 현존을 철학적으로 증명한다는 게 새로운 철학의 발견인가, 기존 신학과의 타협인가” 같은 질문이 줄을 이었다. 이 교수는 “수업 내용과 정확히 관계된 질문이라 가르친 이로서 흐뭇하다”며 “예일대 교수 시절에도 느껴보지 못한 진지한 지적 열정”이라고 말했다.



 맥주 500cc 한 잔에 마른 멸치와 고추장 안주. 20~30년 전 대학생 시절의 술상을 차린 자리는 이들에게 일종의 해방구였다. 박해식(53)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는 “20년 넘게 판사, 변호사만 해왔는데 대학 졸업 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질문하니 해방감을 느낀다” 고 했다. 이오규(54) 두산인프라코어 사장은 “중학생 이후 처음으로 느낀 문학의 감수성으로, 졸업 리포트에는 내 인생 이야기도 함께 담아볼 참”이라고 말했다. 배움의 과정은 기업인들의 생각도 조금씩 바꿔놓고 있었다. 현대디엘 신명준(45) 대표는 “인문학을 전공해 뭘 할 수 있나 생각했는데, 이제는 청년들에게 이쪽 전공을 권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는 변창구 서울대 교육부총장도 함께했다. 영문학과 교수인 변 부총장의 ‘셰익스피어’ 강의는 AFP에서 8기째 계속되는 ‘롱런’ 강의다. 매 수업 후에 수강생들이 작성하는 강의 평가 설문 결과에 따라 다음 기수 개설 과목에 변화를 준다. 변 학장은 “문화 강좌로 쉽게 생각했다가 첫 강의 때 학생들 수준이 높아 당황했다”며 “지금은 대학원급으로 수준을 높여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밤 11시에 시작한 이들의 만남은 다음날 새벽 4시까지 이어졌다.



  5주년을 맞은 AFP는 2007년 설립 이래 수강생 451명을 배출했다. 철학과 역사를 배우러 매주 모여든 이들은 누구였을까. 10기수에 걸친 AFP 수강생을 서울대 인문대학과 함께 분석해 봤다. 수강생 451명 중 대기업 임원급 이상이 132명, 중소기업 대표이사급이 129명으로 기업인이 전체의 43%였다. 시중은행과 증권사 임원급은 67명으로 15%였고, 공기업 임원과 정부 고위공무원이 60명(13%), 부장급 이상 판사·검사와 법무법인 대표 변호사급 법조인이 28명, 대학 총장·교수 12명, 의대 교수를 포함한 의료인이 9명이었다. 이외에도 언론계와 문화·예술인이 각 6명·4명이었고, 소망교회 김지철 목사와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 같은 종교인도 있었다. 성비는 남성 416명(93%), 여성 35명(7%)으로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정원 45명 안팎인 AFP에는 매 기수 100~150여 명이 지원해 경쟁률이 2~3대 1이다. 지원 자격도 엄격하다. 비상장기업 CEO는 최근 2년간의 회사 결산서와 감사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매번 합격자 발표 다음날에는 담당 교수실로 각 기업 비서실과 회장실로부터 전화가 빗발친다. ‘어떻게 나를 떨어뜨리느냐’는 항의전화부터 ‘와인 몇 병 들고 찾아뵙고 싶다’는 읍소형까지 다양하다. 10기의 선발을 맡았던 변창구 부총장은 “자기소개서를 꼼꼼히 읽고 ‘이 사람이 성실하게 공부할까’를 중점적으로 봤다”고 말했다.



 한 기업이나 단체 안에서 ‘학맥’이 형성되는 것도 특징이다. 졸업생이 조직 내 선후배들에게 AFP 수강을 추천하는 경우가 많아서다. 삼성전자는 이수형 법무실 전무가 2008년, 조원국 부사장이 2009년 수강한 뒤 장창덕·김인주·정현량 전·현직 사장·부사장과 이윤우 전 부회장 등 기수마다 1~2명씩 수강생을 배출하고 있다. GS홈쇼핑도 2007년 허태수 대표가 2기로 수강한 뒤 5기 노영준 상무, 7기 김상덕 상무를 비롯해 임원급이 줄줄이 수강하고 있다. 수료생들은 이후 동창회를 꾸리고 학습을 이어나간다. 2007년 2기 수강생인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이 만들고 이재식 태평양 대표변호사, 송인회 극동건설 회장 같은 동기생이 모이는 독서모임 ‘계영회’가 한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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