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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속으로] ‘84세 총장 오빠’ 난 이 별명이 가장 맘에 든다

근엄할 것이란 선입견은 만난 지 1분 만에 깨졌다. 시종 쾌활함을 잃지 않던 김희수 김안과병원 이사장은 인터뷰 도중에도 재미있는 표정으로 취재진을 웃겼다. 안경을 유머의 소품으로 사용하던 그는 “아직도 맨눈으로 1.0이고, 이 안경은 그냥 바람막이로 쓴다”고 말해 또 한번 폭소를 자아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84세 ‘총장 오빠’의 얼굴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인터뷰 전 주변 참모들은 “고령이시고 하니 가급적 짧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막상 마주앉으니 열정과 쾌활함이 그 어느 젊은 청년 못지않았다. 해방 전후 시절 얘기부터 20대 대학생들과 어울려 지내는 근황까지, 세대를 넘나드는 에피소드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중간중간 폭소가 오가는 가운데 인터뷰는 2시간을 훌쩍 넘겼다. 15일 김안과 개원 50주년을 맞은 김희수 김안과병원 이사장 겸 건양대 총장 얘기다. 한국 안과계의 산증인이자 국내 최고령 대학 총장으로 아직도 현역에서 맹활약 중인 김 이사장을 충남 논산의 건양대 총장실에서 만났다.

김안과 50년, 김희수 이사장 겸 건양대 총장



김안과 시절 포대로 돈 쓸어 담아



김희수 건양대 총장이 원스톱 서비스 센터를 둘러보고 있다. 그의 마지막 꿈은 훌륭한 지역 인재를 키워내는 것이다.
●84세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아직 젊어요, 젊어. 아직도 멀었다, 허허.”



●여전히 현역이신데 은퇴는 언제쯤.



 “은퇴? 인생에 은퇴가 어딨나. 인생이 두 번 있나. 내 사전에 은퇴란 없다.”



 김 이사장은 1962년 서울 영등포에 김안과를 개원했다. 이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 김안과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안과전문병원으로 성장했다. 98년 국내 처음으로 망막센터를 개설했고 2008년엔 세계 최초로 망막전문병원을 열었다. 현재 안과 전문의만 37명에 300여 명의 직원이 환자를 맞고 있다. 김안과를 세우고 키우기까지, 그 뒷얘기가 궁금했다.



●김안과는 어떻게 개원하게 됐나.



 “당시 우리나라에는 병원도 많지 않았고, 그나마 있는 병원도 오후 6시면 문을 딱 닫았다. 일요일도 문을 열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아, 이래선 안 되는데’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그래서 당시 부산대에서 교수 자리를 제안해왔지만 정중히 거절하고 내가 직접 병원을 열기로 결심했다. 언제 가더라도 의사를 만날 수 있는 병원을 만들겠노라고. 추석에도 설날에도, 새벽에도 밤늦게도 예외 없이.”



 실제로 그랬다. 김안과는 개원 이후 50년간 단 한 번도 문을 닫은 날이 없었다. ‘365일 24시간 연중 무휴 진료’가 병원의 기본 운영원칙이었다. ‘환자 제일주의’는 김 이사장의 모토였다. ‘원스톱 진료 서비스’ 체제를 갖춰 병원을 방문한 당일에 모든 검사와 수술에 대한 준비를 마칠 수 있도록 했다. 철저한 직원 친절교육도 빼놓지 않았다. 직원이 환자에게 불친절한 언행을 하면 그날로 당장 사표를 받아낼 정도였다.



●왜 영등포에 자리를 잡았나.



 “당시는 군정 때여서 의사가 맘대로 개업할 수 없었다. 사전에 일일이 허가를 받아야 했고, 때문에 종로 같은 노른자위는 꿈도 못 꿨다. 그때 영등포에서 병원을 하던 선배가 그곳으로 오라고 추천을 하더라. 주변에 공장이 많은데 눈을 다치는 환자가 무척 많다면서. 내가 갈 곳이 거기다 싶었다. 그런데 박 팀장, 영등포가 옛날엔 진등포라고 불렸다는 사실을 아나? 비만 오면 너무 질퍽거려 장화 없이는 살 수가 없었다. 오죽하면 마누라 없인 살아도 장화 없인 못사는 곳이 영등포라고 했다.”



●김안과 앞도 질퍽질퍽했나.



 “당연하죠, 허허.”



김희수 이사장이 인터뷰 도중 ‘딴딴한’ 종아리를 들어보이고 있다.
●처음 개원했을 때도 환자가 많았나.



 “웬걸. 첫날 15명의 환자를 봤다. 당시 광화문에 공안과가 있었는데, 다들 공안과 간다고 하지 나한테 올 생각을 안 하더라. 미국에서 공부하고 왔고 기계도 미국에서 최신 제품으로 들여왔는데 말이다. 그거 잡는 데 2년 걸렸다. 환자가 의사를 믿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게 아니라는 걸 그때 절감했다.”



 환자 제일주의와 연중 무휴 진료 등 김 이사장의 성실성이 입소문으로 퍼지면서 영등포 공장 근로자들은 물론 서울 각지에서 손님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70~80년대 김안과는 전성기를 맞았다.



 “많이 볼 때는 하루에 3000명을 진료한 적도 있다. 당시 의사가 10여 명 됐으니까 한 명당 하루에 300명씩 본 셈이다. 화장실 갈 틈도 없었다. 정말 돈을 포대로 쓸어 담았다(웃음). 게다가 그때는 의료보험도 안 되고 카드도 없을 때여서 몽땅 현금 장사였다. 저녁에 포대에 돈이 수북이 쌓여 있으면 은행에서 와서 일일이 다 세어줬다. 그리고 얼마라고 하면 내가 사인하고 그랬다. 그때 그렇게 돈을 벌었으니까 지금 이렇게 고향에 내려와서 장학사업을 할 수 있지 않겠나.”



●하루에 몇 포대나 나왔나.



 “한 포대밖에 안 나왔다, 허허.”





꽁초 줍는 총장에 빵총장 별명까지



30년 넘게 쌓여온 ‘적자생존’의 기록들.
●세브란스 의대를 나왔는데, 왜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나.



 “형님이 의사였는데 말 그대로 ‘진짜 의사’였다. 밤에 시골에서 주민들이 문을 두드리면 언제라도 왕진 가방 들고 집을 나섰다. 자전거 타고 논길을 가다 자빠지기도 숱하게 하더라. 진료비도 제대로 못 받으면서. 명절 때 계란 한 줄 받는 게 진료비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의사가 되고 싶다’고 결심하게 됐다.”



●안과를 선택하게 된 계기는.



 “우리 때는 공부 못한 학생이 안과 했다. 요즘은 정반대지만(웃음). 지금 의대생들에게도 내가 그런다. 세상은 돌고 도는 거라고. 여러분들이 안과 전문의할 때는 내과나 외과 의사가 더 각광받을 수 있다고. 사실 나는 안과가 내 성격에 맞았다. 굉장히 꼼꼼한 성격인데, 수술할 때 1㎜만 틀려도 안 되는 안과의 델리키트한 부분이 무척이나 끌렸다.”



●1956년엔 미국 유학을 떠났다.



 “한국전쟁 이후 병원이 다 부서져서 실습할 곳이 전혀 없었다. 이렇게 한국에 있느니 미국에 가서 배우는 게 훨씬 낫겠다 싶었다. 배 타고 보름 만에 미국에 도착했는데 머리 검고 눈 조그만 사람은 나밖에 없더라. 무서웠다.”



●가족을 남겨두고 홀로 갔던데.



 “당시 일인당 국민소득이 50달러였다. 전액 장학금 없인 미국에서 비자도 안 내주던 때였다. 가족을 데려가는 건 상상도 못했다.”



 그는 한국에 두고 온 아내와 딸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고 했다. 환자들의 몸을 씻겨주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뉴욕 세인트 프랜시스 병원과 일리노이대 안과대학원을 거친 그는 1959년 귀국길에 올랐고, 군의관을 마친 뒤 62년 김안과를 열었다. 그랬던 그가 91년 갑자기 대학을 세우겠다며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의 나이 63세 때였다.



●환갑을 훌쩍 넘겨 ‘제2의 인생’에 도전장을 냈다.



 “미국 유학 때 느낀 게 있다. 한 나라의 운명은 교육에 있다는 걸. 언젠가 나이 들면 육영사업을 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땐 하나의 꿈에 불과했다. 그런데 고향 분들이 ‘동네에 폐교 직전의 중·고등학교가 있는데 인수해서 키워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해왔다. 그래, 한번 해보자 싶었다. 김안과 해서 돈 벌 만큼 벌었으니 사회에 제대로 환원해보자 싶었다.”



 그는 내친김에 고향에 대학도 세우기로 결심했다. 건양대와 건양의대는 그렇게 시작됐다. 이후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건양대에서 보냈다. 학생들과 함께 부딪치며 대학 발전에 투신했다. 재학생들의 취업 알선을 위해 국내 대학 최초로 취업컨설팅 전용 건물도 준공하고 원스톱 서비스 센터를 마련해 취업 돌보미를 자처하고 나섰다. 취업한 졸업생들을 위해 ‘찾아가는 졸업식’이란 아이디어도 내놨다. 정부가 선정한 ‘잘 가르치는 대학 베스트 11’에 건양대가 뽑힌 것은 이런 노력이 20년 넘게 겹겹이 쌓인 결과다.



●학생들이 붙여준 별명이 많다고 들었다.



 “허허. 꽁초 줍는 총장이라고도 하고, 빵 나눠주는 총장이라며 빵총장이라고도 부른다. 내 교육관이 그렇다. 내가 교내를 다니면서 꽁초를 주우면 교수들도 따라 주울 거고, 그러면 학생들이 꽁초 못 버린다. 시험 기간엔 새벽에 도서관에 가서 빵과 우유를 나눠준다. 총장이 직접 배급하니 학생들이 처음엔 어색해하기도 했지만 이젠 ‘총장 오빠, 고맙습니다’라며 반갑게 인사하곤 한다. 총장 오빠, 난 이 별명이 가장 맘에 든다(웃음).”



다이어트·금연 장학금 내걸며 인재 양성



●다이어트 장학금에 금연 장학금까지, 장학금 종류가 많기로도 유명한데.



 “10㎏ 빼면 무조건 100만원의 장학금을 준다. 1년간 금연에 성공해도 50만원을 준다. 목표를 정해놓고 성취하는 보람을 느끼게 해주기 위해서다. 워낙 인기가 높다 보니 어느새 다른 대학들도 다 베껴 갔다.”



●다이어트는 체중계가 있다지만 금연은 어떻게 증명하나.



 “소변검사 하면 다 나온다(웃음). 아무 때고 불시에 와서 검사 받으라고 한다. 거짓말하면 나한테 혼나지, 허허.”



●도서관 이용 포인트제는 또 뭔가.



 “도서관 이용 횟수가 기준을 넘으면 장학금을 주는 제도인데, 어떻게든 공부를 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지역의 인재를 좀 만들어보고 싶어서다.”



 지역의 인재. 이 얘기가 나오자 1시간 넘게 웃음이 끊이지 않던 그의 얼굴이 일순간 진지해졌다. 안타까움이 얼굴 가득 퍼져나갔다.



 “솔직히 지방에서 대학 하는 건 너무 힘든 일이다. 시골에서 공부 좀 한다 치면 모두들 서울로 가지 누가 고향에 남으려 하겠나. 웬만한 지방대는 요즘 정원도 제대로 못 채운다. 하지만 지역의 인재는 누군가 맡아 키워줘야 하지 않겠나. 그래야 지역이 살지 않겠나.”



 김 이사장은 2009~2011년 3년간 건양대 등록금을 동결했다. 올해는 오히려 5.1% 등록금을 내렸다. 우수한 학생들을 유치하려는 몸부림이자, 학생들에게 공부에만 전념하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등록금을 이렇게 낮추면 대학 운영은 어떻게 하나.



 “우리 대학 등록금이 지방대 중에서 가장 싸다. 부족한 부분은 장학금을 끌어들이면 된다. 매년 200억원 넘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김안과에서도 매년 40억원 넘게 갖다 쓴다. 현재 재학생 8000명 중에 600명은 전액 장학금을, 6000명은 100만~200만원의 장학금을 받고 있다. 대신 공부 안 하면 한 푼도 안 준다.”



 건양대 학생들은 오후 5시부터 강의실에서 예외 없이 ‘과외 공부’를 한다. 교수들이 직접 나서 자격증 강좌 등 정규 커리큘럼엔 없지만 취업엔 도움이 되는 과목을 개설했다. 공부하는 분위기 조성을 위해 2000명을 수용하는 기숙사도 지었다. ‘지방대학 활성화가 왜 중요한가’에 대한 그의 역설은 계속됐다.



 “사립대가 살려면 국립대와 등록금이 똑같아지면 된다. 그럼 이긴다. 사립대가 훨씬 잘 가르치지만 등록금이 싸니까 국립대 가는 것 아니냐. 건양대도 앞으로 30%만 더 등록금을 낮추면 국립대를 따라갈 수 있다. 장학금을 보다 더 많이 끌어들일 거다. 이런 게 진짜 반값 등록금 아니겠나.”



서울 갈 때도 자가용 대신 KTX 애용



 다시 화제를 돌렸다. 그의 건강유지 비법이 궁금했다. “비법은 간단하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거다. 나는 저녁 9시면 어김없이 잠들고 새벽 3시반에 깬다. 그러곤 방안에서 스트레칭을 한다.”



 그러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혀 두 팔로 바닥을 짚는 시범을 보였다. “봐요, 유연하잖아(웃음). 운동복으로 갈아입고는 교내를 한 시간 정도 걷는다. 집에 돌아와 6시반에 아침 먹고 신문 좀 보다가 8시반에 총장실로 정식 출근한다. 이러면 아침에만 7000보가량 걷고, 온종일 걷다 보면 하루에 보통 1만2000보 된다. 많이 걷는 게 최고다, 허허. 술·담배는 일절 안 하고.”



 그러더니 불쑥 다리를 높이 들어올렸다. “박 팀장, 제 종아리 한번 만져보세요. 딴딴하죠?” 정말 아령처럼 딴딴했다. 그가 허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도 골프 18홀 돌아도 다리가 전혀 안 아프다. 골프는 하체가 튼튼해야 하는 법. 요즘도 잘 맞으면 85타도 친다.”



●골프 치러 자주 나가나.



 “이른 새벽에 근처 골프장 가서 9홀 돌고 나면 8시쯤 끝난다. 씻고 출근하면 9시 이전에 총장실에 골인할 수 있다. 업무에 아무 지장이 없다(웃음).”



 이렇게 끊임없이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힘의 원천은 뭘까. ‘대체 그게 뭐냐’는 질문에 그는 “이건 비밀인데…”라며 ‘비밀’을 살짝 공개했다.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에겐 없는 건데, 나에겐 비타민P가 있다.” 비타민A·B·C도 아니고 P라고? 그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Power의 P 말이다, 허허. 하고자 하는 일은 몰입해서 반드시 해내는 것, 꼼꼼히 체크하고 꾸준히 실행에 옮겨내는 것. 남들은 나더러 어떻게 성공했느냐고들 묻는데, 24시간 베스트를 다해 열심히 인생을 살았을 뿐이다. 그게 나에겐 비타민P다.”



●그건 선천적인 DNA인가.



 “아니다. 최선을 다해 일하다 보니까 자연스레 생기더라. 김안과도, 중·고등학교도, 대학도 챙겨야 하다 보니 계속 뭔가를 메모하지 않으면 안 되겠더라. (와이셔츠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보여주며) 이런 수첩을 50대부터 수백 개는 족히 썼다. 아, 맞다. 나는 적자생존 원칙의 신봉자다.”



 아니, 365일 24시간 진료라는 환자 제일주의를 내세우고 환갑 넘은 나이에 고향 육영사업에 뛰어든 사람이 돌연 적자생존(適者生存)을 얘기하다니. 순간 그가 손을 절레절레 저었다. “적자(適者)가 아니라 ‘적는 자’가 생존한다는 게 나의 철학이다. 나이 들어 기억하는 건 한계가 뚜렷하다. 잘 적는 사람이 그 시대에 성공한다. 뭐든 적을 만한 거라면 적어놓고 보는 거다. 30년 넘게 적었는데, 조만간 책으로 낼까 생각 중이다.”



●서울은 어떻게 오가나.



 “KTX를 애용한다. 막히기 일쑤인데 왜 자가용을 타고 다니나. 서울역에 내려선 지하철을 탄다. 나이 먹어 공짜지, 노인석 가면 양보해주지, 얼마나 좋나. 가끔 지하철에서 학생들에게 들키는데 ‘왜 총장님이 지하철 타세요’라고 물으면 ‘총장은 지하철 타지 말라고 어디 써 있냐’고 한다, 하하.”



 문득 나비 넥타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 연세에 나비 넥타이 하는 게 괜찮나.



 “아, 이거요? 스티브 김(꿈희망미래재단 이사장)이 2년쯤 전에 선물로 줬는데, 매보니까 아주 맘에 들더라. 그 뒤로는 내게 선물하는 사람들은 모두들 이걸 가져온다. 매일 색깔별로 바꿔 맨다.”



●요즘도 직접 진료하나.



 “꼭 나에게 봐달라는 환자가 한 명 있다. 비녀 꽂은 할머니인데, 단골이라 안 봐줄 수도 없고(웃음). 의사는 환자가 있는 한 진료해야 하는 것 아니겠나.”



●안과 전문의인데 눈은 괜찮나.



 “맨 눈으로 1.0 나온다. 지금 쓰는 안경은 그냥 바람막이다, 허허.”



●요즘 눈에 대한 관심이 높은데, 눈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방법이 있다면.



 “책 보느라, 컴퓨터 하느라 너무 눈을 혹사하고 있다. 눈도 쉬어주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짬짬이 눈 감고 쉬는 게 최고다. 또 피곤하다고 눈을 막 비비는데, 손에 있는 균이 눈을 오염시키기 십상이다.”



●멀리 보고 초록색을 많이 보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여전히 유효한 처방인가.



 “물론이다. 그래서 우리 직원들 유니폼도 초록색이다. 그린 컬러와 블루 컬러가 파장이 가장 적어 눈의 피로가 덜하다.”



●‘내 사전엔 은퇴란 없다’고 했는데, 앞으로의 꿈은.



 “평생 환자만 돌보느라 사생활 없이 살았다. 자녀들과 공원 한번 같이 못 갔다. (잠시 말을 멈췄다가) 맞다. 나는 구두쇠였다. 구두쇠가 아니었으면 어떻게 돈을 벌었겠나. 그래도 육영사업하며 2200억원 넘게 사회에 환원했으니 맘은 편하다. 총장 임기가 2년 남았는데 그때까지 최선을 다해 대학을 일궈놓은 뒤 후임자에게 넘겨줄 생각이다. 그러곤 아내와 여행도 좀 다닐까 한다. 그래도 꿈은 계속 간직하고 살 거다. 건양대에서 좋은 인재들이 많이 나오는 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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