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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복서 1호는 독립운동가

우리나라 최초 프로복서의 이름은 이용식(李龍植·1908~?·사진)이다. 사각의 링에 오르기 전 그가 꿈꿨던 건 부나 명예가 아니라 조국의 광복이었다. 그는 독립운동가였다.



1928년 1월 데뷔전 치른 이용식
청년동맹 활동도 하며 ‘이중생활’
일본인 검사 “치안 위반” 2년 구형

 이용식은 1928년 1월 1일 중국 상하이에서 필리핀 복서 댄 새크라멘토를 상대로 프로 데뷔전을 치러 판정승을 거뒀다. 최초의 한국인 프로복서로 알려진 김정연(1928년 11월 25일 일본에서 데뷔)보다 빨랐다.



 하지만 그의 이름이 조국에 처음 알려진 건 ‘복서’로서가 아니었다. 1930년 5월 원산경찰서는 사상범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들어갔다. 5월 22일자 중외일보는 원산발 기사에서 “‘중대사건 연루자’ 이용식이 상하이에서 검거돼 원산으로 압송됐다”고 보도했다.



 그해 9월 19일 함흥지방법원 공판에서 일본인 검사는 이용식에게 징역 2년을 구형했다. 죄목은 치안유지법 위반.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군 장교로 복무하면서 광둥에서 좌익계열 독립운동단체인 한인청년동맹에 가입했다는 혐의였다. 검사는 이용식이 상하이에서 복서로 뛰면서도 청년동맹 활동을 했다고 주장했다.



 원산에서 태어난 이용식은 13세에 미국 스탠더드오일사 유조선에 숨어들어 밀항을 시도했다. 원래 목적지는 미국 뉴욕이었지만 중간 기착지인 상하이에서 덜미가 잡혔다. 상하이에서 3년간 고학한 이용식은 광둥으로 떠나 군관학교를 거쳐 다사터우항공학교에 입교했다. 쑨원이 국민당군 개혁을 위해 설립한 이 학교의 당시 교장은 장제스였다. 이용식은 1926년 7월 시작된 국민당의 북벌에 참가해 련장(중대장급)까지 승진했다.



 하지만 이용식은 1927년 돌연 군문을 떠나 상하이로 되돌아와 프로 복서로 변신한다.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국공합작 파기(7월) 이후 항일 운동 단체 사이에 생겨난 극심한 좌우 대립이 그가 군문을 떠난 이유로 추정된다. 이용식은 1930년 체포돼 일본 영사관에 신병이 넘겨진 뒤 원산으로 압송됐다. 이때 나이 22세였다.



 아메리칸 드림을 동경했던 13세 소년은 10대 후반에 조국 독립과 혁명의 꿈을 가슴에 담았다. 그 뒤 군인이 됐고 다시 복서가 됐다.



 하지만 그의 인생에 반전은 더 남아 있었다. 공판 4개월여 뒤인 1931년 1월 27일 이용식은 ‘우에무라 다쓰로’라는 이름으로 일본 프로 복싱에 데뷔한다.



 일본에서 이용식은 스타가 됐다. ‘청룡도’라는 별명이 붙은 강력한 오른손 훅을 주무기로 당시로는 드문 KO 복서로 이름을 날렸다. 역시 KO 복서였던 나카무라 가네오와 2승씩을 나눠 가진 네 차례 라이벌전은 지금도 일본 복싱사의 명장면으로 꼽힌다. 프로 복서로 총 전적은 20승24패12무다.



 1935년 은퇴한 이용식은 이듬해 벌교 갑부 채중현의 후원으로 도쿄에 복싱 도장을 설립할 계획을 세웠다. 그 뒤 종적은 알 수 없다. “2차 대전 종전 직전 베이징으로 건너간 뒤 소식이 끊겼다”는 원로 복싱인 김영기(85년 작고)씨의 증언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용식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청춘을 바쳤다. 이역만리에서 간난신고를 겪었지만 광복의 길은 너무나 멀리 있었다. 뜻을 같이한 사람들마저 이념 때문에 갈라섰다. 그는 이 울분과 열정을 링 위에서라도 분출해야 했다. 한림대 일본학연구소의 정준영(39) 박사는 이용식에 대해 “상상력을 압도할 정도로 굴곡이 큰 삶을 살았다”고 평했다.



최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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