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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간 양상쿤 “한·중 수교 임박” … 김일성 “2~3년 미뤄라”





[한·중 수교 20주년 특집] 수교 실무협상 주역 권병현 전 주중 대사

1992년 8월 24일 13억 인구의 거대 중국이 한국과 수교를 맺었다는 사실, 그 중요성을 헤아리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미국과 맞먹는 G2 시대 중국의 실체를 떠올려 그를 다시 대한민국의 국익과 연결해 보면 답은 쉽게 나온다. 그때의 수교라는 외교적 형식의 ‘구두점’ 하나로 한반도와 대륙을 잇는 물길이 크게 열리고, 하늘길은 잦은 비행기의 소음으로 가득 찼다. 물류(物流)와 인적 교류가 둑이 터져 한꺼번에 수천 리를 달아나는 그런 물길처럼 거세게 번졌다. 이제는 중국이 한국의 최대 교역국으로 부상한 지 오래다. 그런 실익의 차원에서 한 걸음 비켜 서서 20년 전 한·중 수교의 의미를 짚더라도 제법 크게 걸리는 게 있다. 한국은 중국과의 수교를 통해 국제정치의 중요한 변수로 부상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아울러 혈맹의 관계였던 북한과 중국 사이를 크게 흔들어버림으로써 그때까지 비교적 단조로웠던 남북관계를 전혀 낯선 상황에 접어들게 했다. 그즈음의 북한은 ‘자주(自主)’라는 단어를 곱씹었고, 김일성 주석의 사망 이후 핵 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한국과 중국의 수교는 한반도를 둘러싼 거대한 역학관계의 변동을 일으킨 시발점에 해당한다. 영화 속 ‘007’의 작전처럼 벌어졌던 수교 당시의 여러 상황을 당시 실무회담의 주역이었던 권병현(74·사진) 전 주중 대사에게서 들어보기로 했다. 민감한 사안이 꽤 많다는 권 대사는 “이제 수교 20주년을 맞아 서서히 풀어놓을 때가 왔다”라며 지난 8일 흔쾌히 인터뷰에 응했다. 인터뷰 초입에 그는 “200만 명에 달하는 중국 내 동포, 조선족 문제를 우리 역사와 관련이 있는 동북3성의 문제와 더불어 수교협상에서 꺼낼 수 없었다. 현재 중국의 국적과 영토로 묶여 있는 문제여서 그렇다. 이 점이 아쉬웠다”고 말했다.



-첩보영화와 같았던 수교 협상의 중요한 형식 중 하나는 관련국 통보였다. 어떤 순서로 진행했나.

“미국에도 알리지 않고 벌였던 협상이었다. 마지막 관련 국가 통보 시점은 1992년 8월 24일 서명 날짜 D-7인 8월 18일이었다. 먼저 부른 상대가 누구였을 것 같은가? 우리는 먼저 대만을 불렀다. 워낙 비밀스러웠던 과정이라 기자들의 눈을 따돌리기 위해 외교부로 부르지 않고, 당시 외교부 이상옥 장관이 소공동 롯데호텔에 방을 하나 마련해 불렀다. 대만의 당시 주한 대사는 진수지(金樹基)였다. 그는 이상옥 장관이 ‘수교가 임박했다’고 통보하자 경악해 거의 까무러칠 듯한 모습이었다. 1~2시간 격차를 두고 다음 관련 국가 관계자들을 호텔로 들어오게 했다. 다음은 미국이었다. 주한 미국 공사를 오게 했는데, 이상옥 장관이 통보하자 씩 웃었다. ‘말해주지 않았지만 다 알고 있어’라는 표정이었다. 그 다음에 일본 공사가 왔다. 그는 화들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대만은 한·중 수교 이후 한국이 끝까지 자신들을 속였다며 분개했는데.

“대만 진수지 대사는 사실 그 전에 벌어진 8·15 경축 리셉션에서도 귀띔을 받았다. 진 대사가 먼저 다가와 ‘미국에 딸 결혼식 때문에 갔다 온다’고 말을 꺼내자 이상옥 장관이 ‘가지 말고 그냥 기다려 보라’고 귀띔을 했다. 딸 결혼식도 미루라는 코멘트가 과연 무엇을 의미했을까. 진 대사가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대만 정부에 한국이 끝까지 속였다고 주장하는 보고를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관계를 끊어야 하는 대만에 최대한 배려를 했다.”



-중국과의 협상은 어떻게 진행했나.

“시점이 참 공교롭다. 중국의 요인 둘이 움직이는데, 그 시점이 92년 4월 13일이다. 한 사람은 양상쿤(楊尙昆) 당시 중국 국가주석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첸치천(錢其琛) 중국 외교부장이었다. 양상쿤 주석은 평양으로 갔고, 첸치천 부장은 마침 한국 외교 사령탑으로서는 처음 중국을 방문한 이상옥 장관을 찾아 움직였다. 양상쿤 주석은 김일성에게 ‘한국과의 수교 시점이 무르익고 있다’고 언급했고, 첸치천 부장은 이상옥 장관에게 ‘수교 협상을 위한 예비회담 대표를 베이징(北京)에 파견해 달라’고 발언했다. 중국의 실권자 덩샤오핑(鄧小平)이 마침내 한국과의 수교를 결심한 뒤 이 같은 움직임이 구체화했다는 점을 알았다.”



-김일성 주석의 반응은 어땠나.

“양상쿤 주석의 평양행은 덩샤오핑의 부탁 때문이었다. 그 전년도에 김일성이 베이징에 왔을 때 덩샤오핑은 ‘한국과의 수교는 이로운 점만 있다’는 입장을 전달했다고 한다. 평양에 간 양상쿤은 당시 그런 정황을 들어 ‘수교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는데, 김일성은 그 자리에서 ‘조금 연기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2~3년 정도 수교 시점을 뒤로 미뤄달라는 입장이었다는 게 유력한 분석이다. 김일성은 그런 자신의 연기 제의가 전통적 우방인 중국 공산당 최고 지도부에 의해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봤던 모양이다. 말하자면 김일성의 오판이었다고 볼 수 있다.”



-김일성은 왜 연기해 달라고 했다고 보는가.

“여러 정황과 자료를 통해 분석해 보면 김일성은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가 이전까지 반대하던 교차승인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얘기다. 즉 미국과 일본이 북한을 승인해 수교를 하고, 중국이 한국과 수교하는 그런 교차승인 말이다. 물론 김일성이 직접 언급한 사실은 아니다. 수교 협상에서 내가 중국 측과 교섭을 벌였고, 그 뒤 중국 주재 대사로 부임한 뒤 얻었던 여러 정보를 통해 그려지는 얘기다. 이를 뒷받침해 줄 여러 근거가 있다. 김일성은 한·중 수교를 어차피 막지 못할 바에는 양국 수교를 조금 미룬 뒤 북·미 관계 문제도 한꺼번에 해결하려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수교의 성사는 덩샤오핑의 의중이 결정적이었다는 느낌이다.

“그렇다. 한국과의 수교 협상을 진행하도록 하는 결정도 내린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대신 김일성과의 우의를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양상쿤 주석을 평양으로 보내 사전에 메시지를 전달토록 했다. 김일성은 그 자리에서 ‘연기’를 요청했으나 양상쿤 주석은 확실한 언급을 회피한 채 돌아온다. 덩샤오핑은 그러면서도 북한과의 우정을 깨지 않기 위해 신중하게 사안을 다루도록 지침을 전했다고 한다. 어쨌든 덩샤오핑은 당시 개혁·개방을 추진하다가 고비를 맞은 상황이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중국은 89년 6·4 천안문 사태의 유혈진압으로 서구 자본의 대탈출이 이어졌고, 국내에서는 개방에 반대하는 우파의 목소리가 커지던 시절이었다. 한국과의 수교로 경제발전의 노하우를 얻을 수 있겠다는 판단을 했던 것으로 안다.”



-실무회담은 어떻게 진행했나.

“미국에도 알리지 않고 극비리에 추진하는 사안이었다. 워낙 민감해 대외 노출을 최대한도로 막는 방법을 택했다. 수교 전까지 모두 3차 예비회담을 진행했다. 베이징에서 두 번, 서울에서 한 번이었다. 1~2차 회의는 베이징에서 열었는데, 아무래도 베이징의 보안성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예비회담 대표인 나는 우선 홍콩으로 비행한 뒤 그곳에서 상하이(上海)를 거쳐 톈진(天津)에 도착해 육로로 베이징에 입성했다. 한 팀은 톈진으로 도착해 베이징에 들어갔다. 다른 한 팀은 도쿄(東京)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베이징으로 향했다. 나는 벙거지 모양의 모자를 눌러쓰고 움직이는 등 회담을 노출하지 않기 위해 극도로 신경을 썼다.”



-그런데 왜 3차 회담은 비밀이 샐 수 있는 서울을 택했나.

“모양새와 형식의 문제였다. 중국과는 아무래도 역사의 단면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관계다. 조선조 500년 동안 이뤄진 외교 형식이 중국을 종주국(宗主國)으로 떠받드는 형식의 조공(朝貢) 관계였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그 관계가 없어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역사의 부담으로 남아 있는 게 사실이지 않은가. 새로 맺는 중국과의 관계는 철저하게 이와는 다른 관계 설정이어야 한다고 봤다. 형식 면에서도 철저히 이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노출의 위험을 무릅쓰고 서울을 택했다. 그래도 보안은 잘 지켜졌다. 중국 대표 7~8명이 움직이는데도 다행스럽게 아무런 소식이 새나가지 않았다.”



-예비회담에서 수교 최종안이 다 마련됐었나.

“그렇다. 1~2차 회담에서는 중국이 ‘하나의 중국’ 원칙을 놓고 한국이 화끈하게 나와주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한국은 그 원칙을 받아주며 대만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는 것에 유보적인 입장을 보이면서 실랑이가 오갔다. 그러나 어차피 받아줘야 할 중국의 원칙적 입장이었다. 2차 회담을 끝내면서 대강 입장 정리가 이뤄졌고, 3차의 서울회담에 들어서면서 중국이 오히려 서두르는 입장이었다. 중국은 내부에서 한국과의 수교를 반대하는 기류가 있었고, 특히 북한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중국 고위층에서도 한국과의 수교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중국은 어차피 이렇게 일이 펼쳐진 바에야 먼저 터뜨려 놓은 뒤 나중에 수습하는 전략을 짰다. 그래서 일단 수교를 완성시키는 데 주력을 하고 있었다.”



-어떤 변수라도 있었나.

“중국은 북한 김일성 주석의 방해를 가장 염두에 두고 있었다. 북한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그를 가장 우려하는 분위기였다. 우리도 나름대로 걱정이 많았다. 미국과 이렇게 중대한 사안을 두고 사전에 조율을 거치지 않은 채 일을 펼치기는 우리 외교사상 처음이었을 것이다. 아울러 북방외교를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던 당시 노태우 대통령 정부에서는 수교 협상이 파탄으로 치달으면 매우 큰 타격을 입을 수도 있었다. 상황이 매우 급했다. 중국은 매우 서두르는 분위기였고, 우리 또한 극비리에 이를 완성시키려고 노심초사했다. 어느 정도였는지 아나? 3차 회담은 서울 워커힐 호텔에서 벌이고 있었는데, 실무회담 대표인 내가 이상옥 장관에게 ‘이쪽으로 오시라’고 할 정도였다. 한 시간이라도 그냥 끌어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결국 3차 회담에서 모든 게 정해졌다. 중국의 초안은 물론이고, 우리의 초안도 모두 만들어졌다. 아주 급박한 분위기에서 매우 빠른 급물살에 올라타고 내닫는 느낌이었다.”



유광종 기자 kjy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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