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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아의 여론 女論] 조국 독립을 위해 폭탄을 든 임신부, 안경신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1920년 8월 3일 밤 11시쯤, 평양 성내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평남도청 신축 건물에서 들려오는 폭발음이었다. 마침 야시장이 열려 시내에 수많은 인파가 나와 있던 중이라 그 소리에 의한 군중들의 충격과 혼란은 더 컸다. 이때 평양경찰서 앞에서도 한 여성이 치마 속에 숨겨 온 폭탄에 불을 붙였다. 그녀의 이름은 안경신(安敬信), 평남 대동군 출신으로 당시 서른셋이었다. 폭탄은 불발되었으나 경관대가 출동하고 시내가 소요에 휩싸이자 그녀는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채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대동강을 건너 어느 참외 오두막으로 숨어들었다가 함남 지방의 모처로 피신했다.



 사건 당시 그녀는 임신한 상태였다. 7개월 뒤 그녀는 아이를 갓 출산한 몸으로 경찰에 검거되었다. 그녀는 미국 국회의원단 일행이 조선을 방문하게 된 때에 맞춰 조선의 독립의지를 천명하기 위해 상해임시정부에서 파견된 독립투사 중 한 명이었다. 그녀와 함께 이 일을 도모한 인물에는 독립운동가 장덕진(張德震)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평양여고보를 중퇴한 안경신은 3·1 만세운동에 가담했다가 20여 일간 구류생활을 했고, 그 후 대한애국부인회에서 활동했으며 다시 상해임시정부 산하 광복군 총영의 전투대원이 되어 이 의거에 참여하게 된 것이었다. 오늘날 ‘미의원단 사건’으로 불리는 이 의거와 관련해 장덕진, 오동진(吳東振), 김예진(金禮鎭) 등 남성인물은 많이 알려져 있으나 임신한 여성의 몸으로 여기에 가담한 안경신의 공적은 광복 67주년이 되도록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안경신은 이 사건으로 검거된 뒤 1심에서 사형을 구형 받았다가 항소해 징역 10년을 선고받게 된다. 그 과정에서 태어난 지 12일 만에 엄마와 함께 체포된 아이는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해 시력을 잃었다. 딸의 체포와 사형 구형을 지켜봐야 했던 그녀의 모친은 그녀가 구금된 지 석 달 만에 세상을 등졌다.



 실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개인으로서의 비극적 운명을 묵묵히 감내해냈던 여성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의 불행보다 독립운동단체의 운명을 먼저 걱정했다. 1927년 12월 가석방된 안경신은 “어머니도 돌아가셨고 자식은 병신이오니 어느 것이 서럽지 않겠습니까마는 동지 장덕진씨의 비명(非命)을 듣고는 눈물이 앞을 가리어 세상이 모두 원수같이 생각됩니다”라고 말했다(‘평남도청 폭파범 안경신 여사 재작 출옥’, 동아일보, 1927.12.16).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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