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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ey&] 일본 경제 20년간 발목 잡은 ‘엔고’ 시대 막 내리나

‘매파들의 소굴’. 국제 금융시장 전문가들이 일본은행의 정책위원회를 가리키는 말이다. 한국은행의 금융통화위원회처럼 통화정책을 책임지는 곳이다. 총재·부총재·위원 등 모두 9명으로 구성되는 정책위원회는 일본은행의 독립성을 강조하면서 경기부양 수단인 금융완화에 신중한 자세를 보이는 매파들이 주도해왔다. 이들 때문에 엔화 강세가 조장되고 있다는 소리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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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평가를 받아온 정책위원회에 지난달 24일 금융완화를 강조하는 비둘기파 2명이 새로 들어왔다. 노무라(野村)증권 수석 이코노미스트 출신인 기우치 다카히데(木內登英·48)와 모건스탠리MUFG증권에서 채권을 담당했던 사토 다케히로(佐藤健裕·50)가 그 주인공이다. 둘 다 시장 친화적인 통화정책 완화론자로 통한다.

 이들의 등장은 작은 움직임이 큰 변화를 일으키는 나비효과를 예상케 한다. 일본 경제의 침체를 심화시켜온 엔고(高) 흐름이 변곡점을 맞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다. 비둘기파의 등장은 벌써부터 일본은행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기우치 위원은 “기존 양적완화 정책의 효과를 검증해 볼 때가 됐다”고 주장했다. 양적완화는 시중에 풀려 있는 국채와 회사채를 사들여 기업과 가계에 자금을 공급하는 인위적인 금융완화 정책이다. 그는 또 “(물가 상승을 인위적으로 자극하는) 인플레이션 타기팅도 구체적인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지난 2월 일본은행은 디플레이션(물가 하락) 탈출을 위해 2014년까지 소비자 물가 상승률을 연 1%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러나 기우치는 채권을 사들여 돈을 푸는 기존 방식으로는 목표 달성이 어렵다며 정책 전환을 강력히 요구했다.

 사토 위원 역시 “기존 금융완화 정책의 효과를 검증해 볼 타이밍이 됐다”고 지적했다. 기존 정책이 효과를 보지 못했다는 의미다. 그는 대안으로 ‘금융완화책의 다양화’를 제시하면서 외국 채권 매입 방안을 들고 나왔다. 일본은행은 그동안 외국 채권에 대해 뿌리 깊은 불신을 갖고 있었다.

 비둘기파 정책위원들의 새로운 주장이 과연 일본은행 통화정책에 변화를 몰고 올 수 있을까. 가능성이 엿보인다는 게 시장의 평가다. 일본은행은 그동안 엔고와 디플레이션이 장기화하는데도 획기적인 금융완화 정책을 내놓지 못했다. 기존 정책은 타성에 젖은 미봉책들로 전락했다. 엔화를 시장에 내다팔아 엔화 가치 상승을 막는 외환시장 개입이 대표적이다. 이는 국제 투기자본의 투기성만 자극했을 뿐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국내 금융시장에서 채권을 사들여 돈을 푸는 양적완화도 투자와 소비를 자극하지 못했다.

 더구나 일본은행은 일본 국채 가격의 폭락(금리 급등) 사태를 항상 걱정해 왔다. 경기부양 과정에서 적자 보전용 국채 발행이 남발되면서 일본의 국채 발행 잔액은 1000조 엔 규모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행이 국채를 계속 사들이는 것은 돈을 찍어 재정적자를 메우려 한다는 우려를 확산시켰다. 이른바 ‘국가부채의 화폐화’에 대한 거부감이다. 이런 사정에 따라 일본은행 내부에서는 통화정책에 대한 신중론이 지배적인 기조로 자리 잡았었다.

 지난 3월 12~13일 열린 금융정책결정회의는 일본은행의 신중론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회의에 참석한 정책위원 9명 가운데 유일한 비둘기파였던 미야오 류조(宮尾龍藏)는 ‘용기 있는’ 발언을 했다. “엔고 해소에 대한 일본은행의 의지를 시장에 확고히 전파시키고, 기업 설비투자를 유도하려면 일본은행의 추가 양적완화가 필요하다”는 요지의 견해였다. 결과는 1 대 8. 시라카와 마사아키(白川方明) 총재를 포함한 나머지 정책위원 8명이 모두 반대하면서 미야오 위원의 제안은 부결됐다. 이때만 해도 다수파인 매파의 판단이 타당해 보였다. 당시 달러당 엔화 환율은 83~84엔을 오갔다. 엔고 부담이 완화되는 것처럼 관측됐다.

 하지만 착시 현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국제 금융시장의 불안 요인이 다시 엔화 수요를 자극했다. 해결책이 보이는 것 같던 유로 위기가 재부상하면서 엔화로 국제자금이 몰려든 것이다. 엔화는 3월 금융정책결정회의 이후 석 달여 동안 7% 가까이 치솟았다. 3일 엔화 가치는 78엔 선까지 올랐다. 사정이 이쯤 되자 일본 정계와 재계에서는 “일본은행은 뭐하고 있느냐”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세계 각국 중앙은행은 지난달 초 양적완화의 액셀을 더욱 강하게 밟았다.

 유로 위기 진화에 진땀을 빼고 있는 유럽중앙은행(ECB)은 지난달 5일 정책금리를 종전 1%에서 유로화 출범 후 최저치인 0.75%로 낮췄다. 영국도 유로 위기의 충격 완화를 위해 금융회사의 자산 매입 규모를 증액하는 양적완화에 나섰다. 신흥국에서도 금융완화에 나섰다. 중국은 예금·대출 금리를 낮추고 브라질은 여덟 번 연속 정책금리 인하를 단행했다. 물가 불안 우려 때문에 주저하던 한국도 기준금리를 3.25%에서 3%로 하향 조정했다. 경기 회복세가 약화되고 있는 미국도 3차 양적완화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각국이 일제히 정책금리 인하 또는 양적완화를 통해 시장에 자금 공급량을 늘리자 그 충격은 즉각 엔고로 나타났다. 80엔을 상정하고 경영계획을 세운 일본 기업들은 엔화 가치가 추세적으로 치솟자 비명을 지르고 있다. 일본은행이 다시 나서야 한다는 정계와 재계의 압력도 높아졌다. 신임 정책위원에 비둘기파 2명이 임명된 것도 양적완화에 신중한 매파 후보가 정치권의 반대로 국회 임명동의안을 통과하지 못한 결과였다.

 5년 임기의 정책위원회 멤버들은 전통적으로 모두 매파들이었다. 그렇게 된 역사적 배경은 일본은행법이 개정된 1998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은행 총재는 관례적으로 한 번은 내부에서 승진했고, 다음 차례는 대장성(현 재무성) 사무차관이 낙하산으로 내려왔다. 정책위원회 멤버들도 관료 출신 인사로 채워졌다. 통화정책은 당연히 정치권과 대장성의 입김에 놀아났다. 그 결과가 약발을 다한 제로금리의 늪이었다. 따로 할 일이 없는 정책위원회는 ‘슬리핑 보드’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이래서는 물가 안정과 통화정책의 독립성을 지킬 수 없다는 우려에 따라 일본은행법이 개정됐던 것이다. 민간 출신 전문가들이 정책위원회에 입성하면서 일본은행의 자율성도 크게 높아졌다. 그런데 엉뚱한 결과가 초래됐다. 정책위원회가 일본은행의 독립성을 과도하게 중시하는 매파들로 가득 차 버린 것이다.

 일본은행 정책위원들은 98년 독립성 확보 이후 줄곧 금융완화에 대해 신중론을 펼쳐왔지만 실제로는 말의 성찬에 그쳤던 게 현실이다. 정부의 경기부양책을 뒷받침하는 정책을 대부분 수용했기 때문이다. 90년대 중반부터 제로금리 정책을 편 결과 현재 정책금리는 0.1%까지 내려왔고, 2000년대 들어 본격화된 양적완화 결과 일본은행의 채권 매입 한도는 70조 엔(약 1000조원) 규모로 확대됐다.

 하지만 일본 경제는 여전히 침체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안으로는 디플레이션의 수렁으로 빠져들어 투자와 소비가 침체되고, 밖으로는 ‘울트라 엔고’에 시달리고 있다. 일본 기업들은 이런 고통을 피해 공장의 해외 이전을 가속화하고 있다.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 동원됐던 통화정책들은 한계를 드러냈다. 하지만 정책위원들의 판에 박힌 대응에 문제가 있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런 점에서 최근 비둘기파 정책위원들의 등장은 엔화의 방향에도 의미 있는 변화를 몰고 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시장의 관심은 역시 엔화 가치가 고질적인 강세에서 벗어나 약세로 돌아설지 여부다. 금융시장 전문가들은 해외채권 매입 등 비둘기파 정책위원들이 제안한 새로운 방식의 양적완화가 실현되면 엔고 흐름이 꺾일 수 있는 여지가 커질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은행이 해외채권을 사들여 국제 금융시장에 엔화 공급이 확대되면 더욱 강력하고 빠른 속도로 엔화 가치를 끌어내릴 수 있는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일본 기업들은 이를 통해 엔화 환율이 최소한 80엔대 후반 이상 수준으로 회복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잃어버린 20년 동안 구조조정을 통해 내실을 다져온 일본 기업들이 모처럼 어깨를 펴고 가격 경쟁력을 높일 가능성이 있다. ‘수출 한국’에는 좋지 않은 변화다. 특히 환율 혜택을 톡톡히 보고 있는 전차(電車, 전자전기·자동차업종)군단이 충격을 받을 수 있다. 엔화의 구매력을 내세워 해외시장을 휩쓸며 ‘엔-케리 트레이딩’(엔화를 빌려 해외 증권 등에 투자)을 하는 ‘와타나베 부인’의 본국 귀환을 재촉할 수도 있다. 국내에서 엔화 대출로 돈을 쓴 사람들은 상환 부담을 덜 수 있겠다. 일본은행 내 비둘기파 비중 확대의 의미를 주시해야 하는 이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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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