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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지식] 파무크의 도발, 이 박물관은 또 하나의 소설이다

오르한 파무크가 터키 이스탄불 순수박물관 전시물 앞에서 웃고 있다. 파무크는 소설 『순수박물관』과 관련된 물건을 수집해 이곳에 전시했다. 그러나 소설 주인공인 케말과 퓌순의 사진은 없다. 그는 “케말과 퓌순의 모습만큼은 독자들의 상상력으로 남겨두고 싶었다”고 했다. [사진 순수박물관]

사랑은 질병이다. 이 질병은 고약해서 도무지 치료가 난망하다. 사랑을 앓을 때 우리는 기꺼이 이 질병을 견디리라 다짐하지만, 사랑을 잃을 때 우리는 이 치명적인 질병 때문에 평생을 앓을 수도 있다.

 이 남자를 보라. 케말 바스마즈(1945~ 2007). 터키 상류층에 속하는 이 남자는 서른 살에 한 여자를 만나 44일간 사랑을 나눴다. 여자의 이름은 퓌순(1957~84). 케말보다 열두 살 어린 가난한 친척이다. 퓌순과의 짧은 사랑은 그러나, 케말에게 평생을 앓아야 할 질병으로 남았다.

 둘의 사랑이 어긋난 뒤에도 케말은 퓌순을 잊지 못한다. 유부녀가 된 퓌순의 집을 8년간 드나들며 사랑을 되찾을 날을 기다린다. 결국 퓌순은 다시 케말의 손을 잡았지만, 뜻밖의 사고로 죽고 만다. 사랑을 잃은 케말은 지독한 집착 증세에 시달린다. 퓌순과의 사랑을 평생 기억하기 위해 퓌순의 소지품을 수집한다. 귀걸이·손수건·머리핀·담배꽁초…. 케말은 퓌순과의 추억이 담긴 물건을 모아 이스탄불 중심가에 박물관을 세운다.

소설 『순수박물관』에서 여자 주인공 퓌순이 입은 원피스. 퓌순은 케말에게 운전을 배우면서 이 원피스를 입고 나타난다. “흰 바탕에 오렌지색 장미와 초록색 이파리가 그려져 있는 원피스”라고 묘사돼 있다. [이스탄불=정강현 기자]
이 이야기는 터키의 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르한 파무크(60)의 장편소설 『순수박물관 1·2』(민음사)을 간추린 것이다. 이야기만 읽으면 그럴 법하다. 한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와 연관된 물건을 수집해 박물관을 세운다. 소설에서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소설은 상상의 세계이니까. 그런데 이 이야기가 현실 세계로 튀어나온다면 어떨까. 그러니까 소설 속 순수박물관이 실제로 우리 눈 앞에 나타난다면.

 파무크가 이스탄불 추쿠르주마에 지난 4월 말 순수박물관을 개장했다. 문학이 현실로 확장된 경우랄까. 소설 『순수박물관』이 활자로 만들어진 세계라면, 이스탄불 시내에 문을 연 박물관은 공간과 사물로 창조된 소설인 셈이다. 즉 독자가 직접 들어가 거닐고 물건을 볼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의 소설이다. 파무크는 상상과 현실, 허구와 실재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문학의 가능성을 입증했다.

 지난달 25일 한국 언론으로선 최초로 이 박물관을 공식 취재했다. 박물관은 사랑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파무크의 설립 의도에 따라, 사진 촬영과 취재가 엄격히 금지돼 있다. 개장 당시 유럽 언론을 상대로 공개 행사를 열었던 게 유일했다.

7월 하순 이스탄불은 뜨거웠다. 낮 최고 기온이 38도를 넘나들었다. 순수박물관이 있는 이스탄불 추쿠르주마 거리는 더위를 식히려는 사람들이 뿌려놓은 물로 축축했다. 입구에는 1445년 세워진 대중목욕탕이 있었는데, 이 목욕탕은 600년 가까이 이 거리에 증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축축하고 눅눅한 거리를 걷다 보면 붉은 벨벳 빛깔의 순수박물관이 나온다. 소설에선 퓌순의 집이 있는 곳이다. 주인공 케말은 퓌순이 죽자 퓌순의 집을 개조해 순수박물관을 짓는다. 파무크는 소설에 묘사된 그 위치에 실제 박물관을 세웠다. 파무크의 설명이다.

 “소설과 박물관은 동시에 구상된 것입니다. 소설 구상을 시작한 1999년 추쿠르주마에 있는 이 건물을 구입했고, 서서히 박물관으로 변모시켜 갔죠. 소설에서 1975년에서 84년 사이에 살았다고 상상했던 허구의 가족이 사용한 물건을 고물장수, 벼룩시장 등에서 샀습니다.”

 순수박물관은 한 번에 한해 책에 수록된 입장권으로 무료 입장할 수 있다. 이 또한 소설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려는 파무크의 문학적 전략이다. 『순수박물관』은 케말이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소설로 써달라며 오르한 파무크에게 부탁하는 형식으로 서술돼 있다. 이를테면 무료입장권도 케말이 파무크에게 제안해 수록된다.(2권 386쪽)

 책을 펼쳐 무료입장권에 도장을 받고 박물관으로 들어섰다. 박물관 문은 몹시 좁았다. 폭이 40㎝쯤 될까. 몸을 옆으로 돌려야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다. 검표원에게 “문이 왜이리 좁냐”고 물었더니 “사랑의 문이 본래 쉽게 열리는 게 아니다”며 웃었다.

 로비 한쪽 벽면에는 담배꽁초 4213개가 전시돼 있었다. 소설에서 케말은 퓌순이 피운 담배꽁초를 몰래 수집하는데, 개별 꽁초마다 당시 자신의 감정을 기록해놨다. 첫번째 꽁초는 76년 10월 23일, 마지막 꽁초는 퓌순이 죽기 전인 84년 8월 26일이다.

 케말은 “사랑의 고통을 견디는 유일한 방법은 (퓌순이) 남긴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3층짜리 목조 박물관은 퓌순의 영혼이 묻어있을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 모두 83개에 이르는 소설 채프터 내용에 따라 관련 물건이 83개의 액자에 담겨 전시돼 있었다.

 1층에 올라서면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는 것을 몰랐다’는 소설의 첫 문장이 한쪽 벽에 기록돼 있다. 이때부터 관람객은 소설과 현실의 경계한 흐릿해진 문학적 공간 속으로 들어서게 된다. 퓌순의 이름이 새겨진 귀걸이, 퓌순의 립스틱, 퓌순의 손이 닿았던 양념통과 스푼…. 박물관 속 물건이 소설의 이야기를 속삭이고 있었다.

 전시물에는 특히 시계가 많았다. 갖은 모양의 시계 33개가 진열돼 있었다. 대개 오후 2시~6시 사이를 가리킨 채였다. 소설에서 케말과 퓌순은 주로 오후 시간대에 몰래 사랑을 나누곤 했다. 그러니까 사랑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시간이 멈춰버린 것이다.

 
퓌순이 피우고 남긴 담배꽁초. 케말은 퓌순의 담배꽁초 4213개를 수집해 박물관에 전시한다. 실제 순수박물관에는 1976년부터 84년까지 연도별로 수집된 담배꽁초가 진열돼 있다. 허구의 이야기가마치 실제로 존재했던 것처럼 재현돼 독자들의 문학적 체험이 확장된다. [이스탄불=정강현 기자]
순수박물관에서 시간은 순차적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83개의 파편화된 전시 액자는 각각의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시간 순서대로 관람하지 않아도 케말과 퓌순의 사랑 이야기는 하나인 듯 이어졌다. 소설 속에서 케말은 말한다. “(순수박물관에서) 관람객들은 시간이란 개념을 잊을 것입니다.”

 사랑의 질병이 깊으면 행복에 이르는 걸까. 이 소설에는 행복이란 단어가 264번 나온다. 마지막 문장 역시 “나는 아주 행복한 삶을 살았다”는 케말의 고백이다. 파무크는 한 남자의 고통스런 사랑을 통해 “사랑은 행복한 질병”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파무크는 “사랑과 박물관은 어떤 것을 간직한다는 점에서 관계가 깊다”고 했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누군가의 마음을 평생토록 간직하려는 마음의 박물관일까.

 순수박물관에서 소설과 현실의 경계는 흐릿했다. 이 문학적 성취는 소중하다. 터키 문학 전문 번역가 이난아 교수(한국외대)는 “세계문학사상 최초로 허구가 실재로 변모하는 문학의 확장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라고 했다.

 박물관 2층 한 구석에선 한 터키 연인이 키스를 나누는 중이었다. 소설 속 케말은 “순수박물관은 키스할 장소를 찾지 못하는 연인들에게 활짝 열려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현실의 박물관이 이를 실천하고 있었다. 소설에서든 현실에서든 사랑은 기꺼이 감염된 황홀한 질병이었다. 소설이 현실로 뒤바뀐 순수박물관에서 사랑의 이야기들은 끝이 없었다.


오르한 파무크(Orhan Pamuk)=1952년 터키 이스탄불 출생. 건축학을 공부했으나 23세에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동서문명의 충돌, 이슬람과 민족주의의 관계 등을 다뤄왔다. 2006년 ‘문화의 충돌과 얽힘을 나타내는 새로운 상징을 발견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으로 『검은 책』(1990), 『새로운 인생』(1994), 『내 이름은 빨강』(1998), 『눈』(2002) 등이 있다. 2008년 노벨상 수상 이후 발표한 『순수박물관』 각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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