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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말 한 필 값 때문에… 1871년 대회 무산

1934년 디 오픈 챔피언십에 출전한 앨프리드 M 패드검(오른쪽 샷하는 선수)이 1라운드 16번 홀에서 어프로치 샷을 하고 있다. 패드검은 이 대회에서 3위를 했고 1936년 대회에서는 우승했다. [AP=본사 특약]
기자회견장에서 이런저런 농담을 주고받던 타이거 우즈(37·미국)는 디 오픈의 의미에 대해 묻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회”라고 단호하게 답했다.
7월 중순, 골프 선수들 가슴속에 북해의 폭풍 같은 격렬한 설렘이 찾아온다. 디 오픈의 계절이 왔다. 아일랜드해에서 부는 바람이 디 오픈이 열리는 잉글랜드 로열 리덤 앤드 세인트 앤스 골프장을 흔들고 있다. 152년 역사를 자랑하는 디 오픈은 전통도 가장 깊지만, 누구에게나 개방돼 있고, 자연에 순응하며 골프의 본질을 지켜가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대회다.

디 오픈에서 8차례 우승한 골프선수 올드 톰 모리스와 그의 아들 영 톰 모리스(오른쪽). [중앙포토]
디 오픈은 처음부터 이렇게 숭고한 이상을 가지고 시작됐을까. 역사는 미화되고 채색된다. 골프대회도 마찬가지다. 비근한 예가 마스터스다. 대회는 미국의 대공황으로 재정난을 겪던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클럽이 회원을 모으려는 의도, 즉 분양용으로 만든 홍보성 대회다. US오픈을 필사적으로 유치하려고 했는데 실패해 ‘꿩 대신 닭’ 식으로 만들었다.

그보다 74년 전 시작된 디 오픈도 출발은 위대하지 않았다. 골프는 귀족의 허세와 프로의 물욕 속에서 태동했다. 그러나 골프는 이를 넉넉히 포용하고 발전했으며 그런 역사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것이 디 오픈이다.

대회 명칭이 디 오픈이라고 된 이유가 재미있다. 19세기 중반 스코틀랜드 서해안의 프레스트윅이라는 도시의 귀족들은 술을 마시다가 우리 동네에도 골프장을 만들자고 합의했다. 당시 골프로 유명한 도시인 세인트 앤드루스의 프로 톰 모리스가 실직 중이었던 터라 그를 데려와 그린 키퍼로 썼다. 당시 프로는 선수라기보다는 허드렛일을 하는 캐디이며 그린 키퍼였다.

디 오픈 우승컵 클래릿 저그.
마을의 귀족들은 내친김에 스카우트한 톰 모리스를 다른 골프장의 프로들과 대결을 시킨다. 총 8명이 나왔는데 프로들은 최고수를 가리기 위해 대회에 참가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엔 상금도 없었다. 그들은 대회 다음날 열릴 예정이던 아마추어들의 대회에서 캐디로 돈벌이를 하려고 모였다고 골프 역사책은 전한다. 아마추어인 귀족들은 첫해 경기를 해보고 나서 프로의 실력이 대단치 않다고 느꼈다. 한번 겨뤄볼 만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아마추어(귀족)와 프로(천민)의 계급장을 떼고 실력을 겨루도록 대회 요강을 바꿨다. 그것이 오픈 챔피언십이 프로든 아마추어든 누구나 참가할 수 있다는 ‘열린(open)’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계기다.

프로와 아마추어가 모두 참가한 1861년 오픈 챔피언십에서 조직위는 프로들에게만 스코어를 확인하는 마커를 붙였다. 프로들이 스코어를 속일 가능성이 크다고 봤고, 실제로 그런 일이 흔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아마추어인 젠틀맨 골퍼에게는 마커가 따라다니지 않았다. 그들은 스코어를 속이지 않는다고 믿었다. 아마추어들이 손해볼 가능성이 있으니 프로들에게만 감시자를 붙인 것이다.

감시자가 붙어도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컸다. 첫 대회에서 톰 모리스가 163타의 기록으로 우승했는데 가장 좋은 성적을 낸 아마추어와는 21타 차이가 났다. 이후 디 오픈에서는 베스트 아마추어를 시상한다. 요즘 베스트 아마추어는 다들 프로 지망생이지만 과거에는 사뭇 달랐다.

당시 귀족들의 허세는 아직도 남아 있다. 디 오픈을 개최하는 골프클럽 중 하나인 뮤어필드에는 아예 프로가 없다. 골프 룰을 처음 만든 콧대 높은 클럽이라서 그런다고 한다. 그래서 프로숍도 없다. 볼이나 기념품을 사려면 인근 골프장으로 가야 한다.

디 오픈 우승자에게 주는 클래릿 저그는 골프 선수 최고의 영예다. 이 또한 순수한 의도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처음 대회가 생겼을 때 우승자에겐 빨간색 가죽 벨트를 줬다. 완전히 주는 것이 아니고 우승자가 1년간 보관만 하는 거였다. 한 선수가 3회 연속 우승하면 영구히 가질 수 있게 했는데, 당시 귀족들은 가능성이 희박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이 스카우트한 톰 모리스의 아들이 사고를 쳤다. 영 톰 모리스는 골프 신동이었고 만 19세이던 1870년 3년 연속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그래서 가죽 벨트를 줄 수밖에 없었고 대회 존폐에 문제가 생겼다. 새로 벨트나 트로피를 제작해야 했는데 대회 주최 클럽인 프레스트윅의 회원들은 돈이 아까웠다. 제작비는 당시 말 한 필 값인 15파운드 정도였다. 갹출하면 큰 돈은 아니다. 그래도 내지 않아 1871년 대회는 열리지 못했다.

이후 세인트 앤드루스 등 3개 클럽이 경비를 분담했다. 대신 3개 클럽이 돌아가면서 대회를 치르게 됐다. 디 오픈이 여러 골프장에서 돌아가면서 열리게 된 계기다. US오픈이나 PGA 챔피언십 등 오래된 메이저 대회들도 이 전통을 따르게 됐다. 우승컵인 클래릿 저그(Claret Jug)의 공식 이름은 골프 챔피언 트로피다. 클래릿은 프랑스 보르도산 레드와인(프랑스에서는 클라레)을 말하는데 영국 사람들이 특히 이 와인을 좋아했다. 보르도는 12세기에서 15세기까지는 영국 땅이었다가 빼앗겼는데 디 오픈 챔피언십이 생길 즈음 영·불 관계가 좋아져 많은 클래릿이 유통되었다고 전해진다.

골프에서 처음으로 컷이 생긴 것도 디 오픈 챔피언십이다. 1889년 대회는 11월 8일 9홀짜리인 머셀버러 올드 코스를 네 바퀴 도는 형식으로 치러졌다. 18홀 기준으로 보면 2라운드였다. 당시까지 골프대회는 당연히 하루에 끝내는 것이었다. 위도가 높은 스코틀랜드는 여름엔 날이 매우 길지만 겨울엔 쥐꼬리만큼 짧다. 게다가 구름까지 끼어 더 어두웠다. 대회 주최 측은 대회를 끝내기 위해 뭔가 조치를 취해야 했다.
3라운드가 끝난 후 성적이 좋지 않아 우승 가능성이 거의 없는 프로들에게 경기를 포기하면 돈을 주겠다고 했다. 프로골퍼들이 냉큼 돈을 받고 경기를 그만뒀다. 첫 컷 탈락은 돈을 받을 수 있었다. 돈을 전혀 받지 못하는 컷 제도는 1898년 처음 생겼다. 디 오픈은 경기를 날이 긴 여름에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요일에 골프 최종 라운드가 열리게 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하루에 끝내던 경기는 1966년부터 나흘로 늘어났는데 교회의 힘이 막강했기 때문에 최종 라운드를 일요일에 할 수 없었다. 토요일 최종 라운드가 일요일로 바뀐 것은 1980년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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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