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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흉내내기로 따라잡은 ‘근대 러시아의 아버지’

고드프리 넬러(1646~1723)가 1698년에 그린 표트르 대제의 초상화.
상투를 자르지 않는, 독재 없는 우리나라의 근대화가 가능했을지 모른다. 역사는 그렇게 흐르지 않았다. 근대화 1호 국가인 러시아 역사에도 수염 자르기와 독재가 있었다.

근대화(modernization)는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것을 말한다. 서구(西區, the West)에 속하지 않는 나라들이 겪은 근대화는 사실상 서구화(Westernization)다. 대한민국 근대화 성공의 핵심은 서구화의 성공이다. 망각하기 쉬운 사실이다. 근대화는 서구의 의식주, 문화·종교·철학, 정치·경제 제도를 수용하는 것을 의미했다.

역사상 최초로 성공적인 서구화를 이끈 지도자는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Pyotr Veliky)다. 영어식으로는 피터 대제(Peter the Great)다. 그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 중국의 유신변법을 주도한 인물들, 대한민국 산업화의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대선배다.

당시 유럽인들은 두 세기 반 동안 몽골의 지배를 받은 러시아를 유럽보다는 아시아에 가깝다고 봤다. 낙후된 러시아는 무례하고 야만적인 사람들이 사는 유럽 변두리의 공국(principality)이었다. 폐쇄적인 러시아는 다른 나라들과 교역도 하지 않았다. 해군도 부동항도 없었다.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유럽 열강의 식민지가 될 가능성까지 있었다. 유럽 전역을 휩쓸고 간 14~16세기 르네상스는 러시아를 비켜갔다.

표트르 대제는 그런 러시아를 43년 재위 동안 서구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제국으로 만들었다. 유럽의 문화적 변두리인 러시아를 도스토옙스키·톨스토이·차이콥스키를 배출한 나라로 만들었다. 한때 미국과 패권 다툼을 벌인 소련의 토대를 마련한 것도 사실상 그다. 그래서 표트르 대제는 ‘근대 러시아의 아버지’라 불린다.

문제는 개혁·개방이다. 어렸을 때부터 네덜란드·스웨덴·영국·오스트리아·프랑스 등 당시 ‘선진국’을 흠모하던 표트르 대제는 서구 따라 하기로 서구 따라잡기에 나섰다.

법적·제도적 개혁·개방도 중요하지만 물리적·지리적 개방이 필요하다. 당시 러시아의 항구는 백해(White Sea)에 있는 아르한겔스크밖에 없었다. 그래서 표트르 대제는 해양에 집착했다. 부동항이 있어야 유럽·중동 지역과 교류하고 교역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혁·개방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표트르 대제는 1697년에서 1698년, 18개월 동안 서부 유럽을 방문했다. 신하 250명으로 꾸린 대사절단이었다. 떠나기 전 단단히 각오했다. “나는 배움이 필요한 학생이다”라고 적힌 인장(印章)을 만들었다. 평민 복장으로 서부 유럽을 돌며 병원·박물관·극빈자 수용소를 방문하고 치과 의술, 수술법도 배웠다. 하지만 주된 목적은 조선술을 배우는 것이었다. 영국 정부의 허락하에 뎁트퍼드에서 생활하며 직접 막노동을 했다. 노동자들과 어울렸다. 네덜란드의 조선소에서 목수로 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배 만들기를 밑바닥부터 배운 그는 1690년대 말 선박 기술자를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로부터 초빙했다. 정복 전쟁에 필요한 전함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난 배움 필요한 학생”이라며 서구 견학
어렸을 때부터 해전 놀이를 좋아했던 표트르 대제가 드디어 해상 팽창에 나섰다. 인구 1400만 러시아에 30만 대군을 양성했다. 부동항을 얻으려면 터키가 버티고 있는 흑해, 당시 군사 강국이었던 스웨덴이 통제하는 발트해로 진출해야 했다.

표트르 대제는 1696년 아조프를 함락시키고 1698년 러시아 최초의 해군기지를 타간로크에 건설했다. 발트해를 장악하는 데는 20여 년이 걸렸다. 북방전쟁(the Great Northern War·1700~1721)으로 맞붙은 스웨덴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1700년 스웨덴을 공격했다. 스웨덴군 8000명, 러시아군 4만 명이 싸운 나르바 전투에서 대패했다. 1704년 결국 나르바를 함락시켰다. 훗날 러시아가 나폴레옹·히틀러를 무찌른 전략을 선보였다. 스웨덴 국왕 카를 12세(1682~1718)를 우크라이나까지 쫓아오게 유도해 1709년 폴타바 전투에서 스웨덴군을 궤멸시켰다. 1721년 전쟁이 끝나고 에스토니아 리보니아·키렐리아를 얻었다. 발트해 연안에 1703년부터 새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군사작전과 더불어 정치·경제 분야의 서구 따라잡기도 병행됐다. 이를 위해 서구의 기술자, 장인을 초빙하고 국비 유학생을 필요하면 강제로 보냈다. 운하와 도로를 건설하고 서구식 관료제를 도입했다. 1703년에는 러시아 최초의 신문인 베도모스티를 창간했다. 기록이라는 뜻이다. 10~15세 귀족·관료의 자제들이 의무적으로 다녀야 하는 학교도 만들었다. 수학·기하학을 가르쳤다. 1724년에는 러시아 과학아카데미를 창설했다.

문화적 개혁·개방도 빠트릴 수 없었다. 서구식 관습도 도입했다. 무엇이 서구화에 본질적인지 비본질적인지 알 수 없었다. 따지지 않고 일단 따라 했다. 나이프·포크·스푼과 같은 날붙이, 이쑤시개가 러시아의 식탁에 올랐다. 에티켓을 가르치는 책을 발행했다. 방바닥에 침을 뱉지 말라, 식사 중에 몸을 긁으면 안 된다는 잔소리로 가득한 책이었다.

여성 해방에도 나섰다. 표트르 대제는 서구 여행 중 여성들이 남자들과 평등하게 어울리는 것을 목격했다. 좋아 보였다. 러시아 여성들도 남성들과 대화하고 춤추고 카드 게임을 하게 했다. 중매로 결혼하던 러시아 사람들에게 연애결혼을 권장했다. 상류 계급 여성에겐 기독교 성경의 정신에 따라 쓰고 있던 베일을 벗어 던지게 했다.

반대 세력이 저항할 여지를 봉쇄했다. 토지 귀족인 보야르(boyar)를 무력화하기 위해 1711년 보야르 회의를 폐지하고 원로원을 국가 최고 기관으로 설치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수염이 얼마나 길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따지던 교회도 타깃이었다. 1721년 러시아 정교회의 총대주교 자리를 폐지하고 종교회의(Synod)로 대체했다. 교회의 종을 녹여 함대를 건설했으며 1700년에는 율리우스력을 도입했다. ‘성부 하느님의 천지창조’를 기준으로 7207년이었던 그해는 ‘성자 하느님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하는 서기(西紀)를 도입해 1700년이 됐다. 남성들이 50세가 되기 전에는 수도회에 입회할 수 없게 만들었다.

오늘날 세계화나 다문화주의에 대한 반발이 있는 것처럼 표트르 대제의 반대 세력은 ‘러시아 정체성’을 위협하는 서구화에 반대했다. 표트르 대제가 ‘적그리스도(Anti-Christ)’라는 풍문도 있었다. 정체성 문제는 한가했다. 엄청난 인명의 손실이 있었다. 그가 단독 황위에 있었던 35년 중 총성이 멈춘 해는 딱 한 해 1724년이었다. 농민은 군 복무, 건설사업에 동원됐다. 1707년 불라빈의 반란을 비롯해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에 10만 명 희생
네덜란드인들의 설계로 이탈리아 건축 양식으로 지었으며 이름은 독일식으로 붙인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을 위해 1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귀족과 상인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에 투자할 것을 강요당했다. 비밀경찰을 동원해 반대파를 색출하고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매질하고 불태웠다. 자신에게 반발한 아들 알렉세이(1690~1718)의 쿠데타 시도를 발각해 직접 고문하고 처형한 것도 표트르 대제 자신이라는 설이 있다.

역사학자들은 표트르 대제 이전의 변화, 산업의 발전, 부르주아지가 형성 등이 표트르 대제 위업의 배경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러시아 근대화의 곳곳에 그의 손길과 숨결을 느낄 수 있다. 표트르 대제는 뭐든지 직접 하기를 좋아했다. 법령 정비를 위해 일주일 중 4일은 새로운 법을 준비했다. 개혁의 목표를 세우고 목표를 가시화하기 위해 외국 사례를 참조했다. 직접 법령을 쓰기도 했다. 알파벳 개혁에도 직접 나섰다.

키는 2m3㎝였다. 난쟁이들과 함께 다니는 걸 좋아해 더 커 보였다. 그의 옷으로 추정해보면 1m83㎝ 정도에 ‘불과’했다는 설도 있다. 그는 술고래였다. 1710년 10월에는 400명의 만취한 신하들과 상트페테르크부르크 곳곳을 ‘가정방문’했다.

‘트림 대회’를 여는 별난 취미가 있었고 생경한 음담패설을 좋아했으며 성적으로 매우 활발했던 그는 불같이 화를 내면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단 한 명, 두 번째 아내 예카테리나는 그를 순한 양으로 만들었다. 31세였을 때 19세의 하녀인 마르타(1684~1727)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당시로서는 결격사유인 이혼녀·고아·농민 출신에다가 그리 예쁘지도 않은 마르타에게 홀딱 반해 가톨릭에서 정교회로 개종시키며 이름을 예카테리나로 바꾸게 했다. 1707년 비밀 결혼식을 올렸다. 함께 12명의 자식을 낳았다. 남편이 죽자 아내는 예카테리나 1세로 등극했다.

표트르 대제는 1725년 53의 나이에 요독증(尿毒症)으로 사망했다. 전설에 따르면 물에 빠진 수병들을 구하기 위해 네바 강에 뛰어들었다가 병세가 악화됐다.
서구화로 초강대국 러시아의 토대를 닦았으나 동시대 유럽인들이 보기엔 표트르 대제도 그저 야만인들을 다스리는 무지몽매한 군주에 불과했다. 프랑스 태양왕 루이 14세의 증손자인 루이 15세(1710~1774)를 만났을 때 이런 일이 있었다. 다섯 살 때 왕이 된 루이가 7세였을 때다. 표트르 대제는 루이를 눈높이로 번쩍 들어올리더니 키스했다. 무례한 행동이었다. 야만인 소리를 들을 만했다. 러시아 근대화를 성취했으나 ‘2m 키의 일곱 살짜리 어린아이’였던 그를 탓하기는 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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