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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통치 심장부 강타, 유유히 사라진 김익상

상해 황포탄의 현재 모습과 1928년(아래 사진) 모습. 1922년 3월 의열단은 일본 군부의 실세 다나카 대장을 이곳에서 저격했지만 실패했다. [사진가 권태균]
님 웨일스가 쓴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장지락)은 상해에서 의열단원들과 함께 생활했는데 그는 “이 단체(의열단)는 아나키즘(무정부주의) 이데올로기에 지배되었다”라고 회고했다.

김산은 “의열단원들은 마치 특별한 신도처럼 생활했고, 수영·테니스, 그 밖의 다른 운동을 하면서 항상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매일같이 저격 연습도 하였다…언제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므로 생명이 지속되는 한 마음껏 생활했다…또 모든 한국 소녀들은 의열단원들을 동경하였으므로 수많은 연애사건이 있었다(아리랑)”고 전하고 있다.

김산의 선배 동지였던 김성숙(金星淑)은 의열단에 대해 “그때 젊은 사람들은 서로 죽으러 국내로 들어가겠다는 자세…그런데 국내로 한 번 나가려면 여비도 있어야 되고 돈이 많이 들어야 되지 않아요? 그러니 나가겠다는 사람을 모두 내보낼 수가 없어서 나중에는 제비를 뽑기도 했어요(혁명가들의 항일회상)”라고 회고했다. 김성숙은 또 의열단이 아나키즘으로 기울게 된 이유를 1921년 중국 천진에서 의열단에 가입한 아나키스트 유자명(柳子明)의 영향으로 회상했다. 그래서 “의열단은 유자명의 영향으로 아나키즘을 수용하고 그들의 민족주의적 테러 활동에 아나키즘적 논리를 갖추게 되었다(오장환, 한국 아나키즘 운동사연구)”고 평가받는다.

의열단의 잇단 공세에 당황한 일제는 1921년 7월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최수봉의 사형을 집행했다. 인명피해가 없는 사건임에도 사형으로 대응함으로써 의열단원의 또 다른 의거를 방지하고자 한 것이었다.

1 김익상.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지고 상해 황포탄에서 다나카 대장을 저격했다. 2 군복 차림의 다나카 기이치. 상해에서 운 좋게 살아남아 총리대신까지 오른다.
그러나 그 두 달 후인 1921년 9월 10일. 의열단원 김익상(金益相)이 북경 정양문(正陽門) 부근의 의열단 거처를 떠나 서울로 향했다. 단원들은 김익상에게 “장사는 한번 가면 돌아오지 않으리(壯士一去兮不復還)”라는 시구로 위로했다. 의열단원들이 거사하러 가는 단원들에게 즐겨 인용했던 이 시구는 사기(史記) ‘자객열전(刺客列傳)’에 나온다. 전국시대 자객 형가(荊軻)가 약소국 연(燕)의 태자 단(丹)을 위해 진왕(秦王:진시황)을 암살하러 떠날 때 친구인 고점리(高漸離)가 역수(易水)가에서 축(筑)을 타면서 위로하자 형가가 “바람이 쓸쓸하게 부니 역수가 차구나(風蕭蕭兮, 易水寒)”라면서 이 구절을 읊고 역수를 건넜다. 형가는 결국 진왕 암살 목전에서 실패하고 죽고 만다.

그러나 김익상은 “일주일이면 돌아올 것”이라면서 폭탄 두 개를 가지고 북경에서 봉천(奉天:현 심양)으로 가는 경봉선(京奉線)에 올랐다. 심양에서 압록강 대안 안동(安東:현 단동)을 거쳐 서울로 들어갈 계획이었다. 일본어에 능숙했던 김익상은 아이를 데리고 여행 중인 일본 여인에게 자신을 미다카미(三田神)라는 학생이라고 소개하고 일행이 되었다. 열차 내에서 검문하던 일경들은 일본인 부부로 여기고 지나쳤다.

남대문역(서울역)에서 일본 여인과 헤어진 김익상은 이태원에 사는 동생 김준상(金俊相)의 집에서 아내 송씨와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인 9월 12일 아침 김익상은 전기회사 공원으로 가장하고 남산 총독부를 찾아갔다. 이토 히로부미가 쓰던 통감관저가 1910년 이후 총독부로 변했는데 왜성대(倭城臺)라고도 불렀다. 작가 박태원(朴泰遠)이 해방 후 김원봉의 증언을 토대로 쓴 약산(若山)과 의열단(義烈團:1947년)에 따르면 김익상은 총독부를 지키는 무장 헌병을 보고는 그대로 지나쳐 일본 찻집에 들어가 맥주를 한 병 청해 마셨다고 전한다. 다시 총독부에 들어가려 하자 무장 헌병이 “누구냐”고 물었고 “전기를 고치러 왔다”는 답변에 통과시켜 주었다. 그렇게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사건이 시작되었다.

당시 신문은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12일 상호 10시20분에 조선총독부에 폭발탄 두 개를 던졌는데 비서관 분실(分室) 인사계실(人事係室)에 던진 한 개는 스즈키(鈴木) 속(屬)의 뺨을 스치고 책상 위에 떨어져 폭발되지 않았으며, 다시 회계과장실에 던진 폭탄 한 개는 유리창에 맞아 즉시 폭발해 유리창은 산산이 부서지고 마루에는 주먹 하나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 뚫렸는데 범인은 즉시 종적을 감추어서 방금 엄중 탐색 중이요. 폭발하는 소리가 돌연히 일어나자 총독부 안은 물 끓듯해서 일장 수라장을 이루었다더라.(동아일보. 1921년 9월 13일)”

불발탄을 두고 사무원이 “폭발탄”이라고 외쳐 큰 소동이 벌어지는 와중에 두 번째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벼락같이 들렸다. 회계과장 기쿠야마(菊山) 등이 자리를 비워서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식민통치의 심장부 총독부에 폭탄이 터진 것이다. 신문들은 미즈노(水野) 정무총감이 경무국장실에서 아오키(靑木) 서무부장, 마루야마(丸山) 사무관, 야마구치(山口) 고등경찰과장 등을 불러 “무슨 일을 머리를 모아 비밀리에 협의했다더라”고 전하고 있다. 박태원의 약산과 의열단은 두 번째 폭탄이 터진 후 김익상은 아래층으로 내려가면서 올라오는 헌병·경찰 등에게 일본어로 “위험하다 위험해, 올라가면 안 된다”고 소리치면서 내려왔다고 전하고 있다.

총독부를 빠져나온 김익상은 황금정(을지로)에서 공구를 모두 버리고 일본인 가게에서 일본 목수들 옷을 사 한강에서 갈아입고 평양행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김익상이 평양→신의주→안동(단동)→봉천(심양)을 거쳐 북경에 돌아온 날이 9월 17일이었으니 자신의 말대로 일주일 만이었다. 의열단원 최수봉 사형 집행 두 달 만에 발생한 총독부 폭탄투척 사건에 일제가 경악한 것은 당연했다.

1922년 3월 초 상해로 간 김원봉은 북경의 의열단원들을 불렀다. 프랑스 조계 주가교(朱家橋)의 중국인 이발소 2층에서 김원봉·이종암·오성륜·김익상·서상락·강세우 등 의열단원들이 마주 앉았다.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가 싱가포르, 홍콩을 거쳐 상해에 온다는 정보 때문이었다. 제26대 일본 육군대신(1918년 9월~1921년 6월)을 역임한 군부 실세 다나카를 저격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성륜(吳成崙)·김익상·이종암(李鍾岩)이 앞다퉈 결행을 자청해 순서를 조정해야 했다. 다나카가 배에서 내릴 때 오성륜이 1선을 맡아 저격하고, 이것이 실패하면 김익상이 다나카가 차로 향할 때 저격하는 것이 2선이었다. 이마저 실패하면 다나카가 자동차에 오를 때 이종암이 저격하는 것이 3선이었다.

1922년 3월 29일 기선이 상해 황포탄 공공마두(公共<55CE>頭)에 도착하자 다나카가 마중 나온 인사들과 악수를 나눌 때 오성륜이 권총을 꺼내 저격했다. 적중했다고 생각한 오성륜은 “독립만세”를 외쳤지만 실제로 맞은 이는 곁에 있던 영국 여인 스나이더였다. 2선의 김익상이 승용차를 향해 도주하던 다나카에게 권총을 발사했는데 다나카의 모자창만 뚫었다. 김익상이 폭탄을 꺼내 옆의 전신주에 뇌관을 친 다음 다나카를 향해 던졌지만 불발이었다. 3선의 이종암이 군중을 헤치고 나가서 다나카가 탄 차량에 폭탄을 던졌지만 또 불발이었고 미 해병이 발로 차 바다로 빠뜨렸다. 1선, 2선, 3선의 공격이 모두 실패했으니 이 또한 운명이었다.

이종암은 재빨리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던지고 군중 틈으로 몸을 숨겼지만 오성륜·김익상에게는 일본 헌병·경찰은 물론 중국 경찰과 인도 순포(巡捕)까지 달려들었다. 둘은 허공에 권총을 쏘면서 구강로(九江路)를 지나 사천로(四川路)까지 도주하다 결국 막다른 골목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김원봉과 강세우, 서상락은 각각 자전거를 가지고 부두 근처에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오성륜과 김익상은 상해 일본영사관 경찰서로 연행되어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조사 도중 김익상이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사건의 주인공임이 밝혀지자 일제는 경악했다.

그러나 그해 5월 2일 오성륜이 영사관 감옥을 깨뜨리고 탈출하자 또 한 번 세상이 놀랐다. 고등경찰관계연표 동아일보 등에 따르면 오성륜은 일본인 죄수 다나카 쓰우이치(田中忠一)와 함께 탈출했는데, 다나카는 항주(抗州)로 갔다가 다시 상해로 돌아와 체포되었지만 오성륜은 오리무중이었다. 오성륜은 만주로 갔다가 독일을 거쳐 소련으로 가서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면서 공산주의로 노선을 수정한다.

오성륜의 탈출에 놀란 일제는 5월 6일 김익상을 부랴부랴 나가사키(長崎)로 압송해 재판에 회부했다. 1922년 9월 25일 마쓰오카(松岡) 재판장이 무기징역을 선고하자 검사가 항소했고, 항소심에서 미요시(三好) 검사는 ‘피고 뒤에는 조선독립의용군을 위시해서 독립단이 뒤를 이어 일어날 염려가 있으니, 극형에 처해 달라’고 주문했다. 그해 11월 6일 모리(森) 재판장은 사형을 언도했다. 김익상은 상고를 포기해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이른바 은사(恩赦)로 무기로 감형되었다. 1927년에 다시 20년으로 감형되어 1942년에 만기 출소했는데, 약산과 의열단은 그의 집으로 형사가 찾아와 데리고 나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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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