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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축구 첫 골 최성곤을 아시나요

홍명보 감독이 이끄는 런던 올림픽 축구대표팀은 26일(한국시간) 뉴캐슬에서 멕시코와 첫 경기를 갖는다. 64년 전 한국 축구대표팀도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멕시코를 첫 상대로 만났다. 이 경기는 48년 8월 3일 런던 남부의 챔피언스 힐에서 열렸다. 국제축구연맹(FIFA) 공식 기록지상으로는 6500명의 관중이 몰렸다고 한다.



1948년 런던서 멕시코 상대 선제골
광복 전후 ‘아시아의 준족’ 별명
전쟁 중 1951년 29세에 의문사

 한국은 약체로 평가 받았다. 당시 외신은 멕시코가 한국을 8-2 정도로 이긴다고 봤다. 하지만 비가 내린 챔피언스 힐에서는 이변이 연출됐다. 하프백(HB·현재 미드필더) 최성곤(1922~51·사진)이 전반 13분 선제골을 넣은 것이다. 이 득점은 한국 축구가 올림픽에서 넣은 첫 번째 골이다. 한국은 10분 뒤 동점골을 내줬지만, 전반 30분 배종호(1922~63)의 골로 또 앞서나갔다. 한국은 후반 18분과 21분 정국진(1917~76)이 연속 골을 넣으며 승기를 잡았고, 정남식(1917~2005)이 한 골을 더해 멕시코에 5-3으로 승리했다. 당시 축구는 16개 팀이 참가해 토너먼트로 진행됐다.



 사흘 뒤 열린 8강전에서 한국은 스웨덴에 0-12로 참패했다. 어렵게 모금해 선수단을 런던에 보냈던 국민은 분노했다. 스웨덴이 이 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최강이었지만 비난은 잦아들지 않았다. 한 신문은 “스포츠맨십이 없다. 학연과 지연에 의해서 선수 선발을 했다”고 비판했다. 축구계가 시끄러웠다. 올림픽 역사상 첫 골을 넣었던 최성곤도 조용히 현역에서 은퇴했다.



  울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최성곤은 축구를 시작하면서 서울의 보성고등보통학교(현 보성중·고)로 진학했다. 최성곤을 앞세운 보성중은 1939년에 치른 30여 회 경기에서 모두 승리했다. 40년에는 전일본 중등학교 축구대회 결승에 올라 고베삼중을 4-0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최성곤은 울산의 자랑이었다. ‘그라운드의 표범’ ‘아시아의 준족’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당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전한다. 최성곤은 41년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 법대에 입학했고 해방 후에는 조선전업에서 선수생활을 했다.



 런던 올림픽 이후 그는 부산에서 지도자 생활을 했다. 전쟁통인 51년 최성곤은 울산 방어진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가던 중 실종됐다. 일주일 뒤 바닷가에서 그는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치명적인 총상이 있었다. 강도를 만났다는 설과 공비에 의해 살해됐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의 아버지는 29세로 짧은 생을 마감한 아들을 위해 전쟁이 끝난 뒤 울산에서 축구대회를 열기도 했다.



 울산박물관은 멕시코전이 열리는 26일부터 한 달 동안 최성곤 추모 전시회를 연다. 전시회를 준비한 신형석 학예사는 “최 선생은 올림픽 축구사에 큰 기록을 세웠지만 남아 있는 흔적은 많지 않았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30점의 사진자료를 어렵게 구했다”고 설명했다.



김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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