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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김재연 의원 "北김정은 여인은 직접…"

김재연 통합진보당 의원은 현재 ‘문제적 인간’이다.

종북 논란에 비례대표경선 부정으로 당적과 의원직 유지가

그가 털어놓은 지나온 삶과 인생관, 진보정치운동 풀스토리…

불투명하다. 그는 어떤 반전을 모색할까?



월간중앙


김재연 의원과 5시간에 걸친 인터뷰가 이뤄진 날(7월 15일) 공교롭게도 통합진보당의 대표 경선 결과가 나왔다. 김 의원은 선거 결과가 궁금해 새벽잠을 설치고, 아침식사도 못했다고 했다.

강기갑 대표의 선출로 그의 정치적 앞날에는 어두운 구름이 드리워졌다. 우선 18일로 예정된 의원 워크숍에서 이석기·김재연 의원 제명이 결정될지 모른다. 우여곡절이 예상되지만 새누리당과 통합민주당의 의원 자격심사도 7월 중에 처리될 가능성이 있다. 당적과 함께 의원직까지 잃을지도 모를 ‘정치적 절체절명’의 순간이 시시각각 다가온다.

김 의원은 그러나 이날 동동주를 곁들인 점심식사에서 담담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적어도 개인적으로는 ‘잃을 게 없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다만 부정선거의 의혹이 객관적으로 밝혀진 바 없으며,자신과 이석기 의원이 종북주의자로 몰려 일종의 ‘정치적 이지메’를 당한다는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당과 진보정치의 미래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됐다며 마음 아파했다.

새누리-민주통합 양당의 자격심사도 결국 자신에게 덧씌운 종북주의 논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종북주의 리더십이 대중적 진보정치를 어떻게 이끌어가겠느냐”고 반문했다. 종북주의의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이날 인터뷰는 서울 도심의 작고 아름다운 한옥에서 이뤄졌다.작은 정원에는 비가 내렸다. 마당에서 자라는 화초의 초록빛이 빗물에 더욱 선명했다. 김 의원은 한옥의 작은 정원을 바라보며 “지나간 날을 돌아보기에 좋은 날이네요”라고 말했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성장 과정과 학생운동 역정, 소위 종북주의 논란, 북한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등을 소상하게 밝혔다. 인터뷰를 마치자 마침 빗줄기가 가늘어졌고, 그는 하늘색 우산을 쓰고 한옥 아래긴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오늘 새벽 강기갑 전 의원이 대표로 선출됐다는 소식을 들으셨죠? 어떤기분이 들었나요?
“예상하지 못해서 지금도 실감이 안 나네요.”

강병기 후보의 승리를 점치셨나요?
“물론이죠. 저도 그렇게 노력했고요.”

오늘 대표 선출 결과가 김 의원의 정치적 운명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겠죠.”

새 지도부가 이석기·김재연 의원의 제명을 추진하겠죠? 아직 의원총회의 결론이 남아있지만….
“아무래도 좋지 않은 쪽으로 작용하겠지요. 그러나 예단하지는 않습니다. 의원총회 결과를 누가 알겠어요? 아무도 모릅니다. 흐름에 맡길 수밖에 없죠.”

오늘 처음 뵙고 보니 정말 동안이네요. 학생운동에 몰두하던 대학시절에는 어땠을까요?
“이루 말할 수 없이 동안이었죠.”(웃음)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 배정이 됐습니다. 희망했나요?
“저는 교육과학위원회로 가고 싶었어요.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잘됐다고 생각합니다.”

기재위에는 거물이 대거 포진했죠. 새누리당 박근혜·정몽준 의원, 민주통합당에서는 문재인 의원 등이 있죠. 박근혜 의원을 만나면 하고 싶은말이 있어요?
“많아요. 특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과 교감하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새누리당 주변에 있는 사람들 말고도 박 의원이 경청해야 할 사람들이 정말 많거든요.”

“정치적 미래에 조바심은 없다”

당에서 제명되고 최악의 경우 국회의원직을 상실할지도 모릅니다. 어떤 각오를 했나요?
“한국사회 정치구조에서 청년정치의 필요성이 매우 주목받는 시기에 이런 일이 벌어져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제가 개인적으로 잃어버릴 것을 연연해 하지는 않습니다. 통합진보당은 과거부터 청년들이 정당의 주인이었습니다. 그런 요구를 받아 국회에 들어갔을 뿐, 제가 대단해서가 아니죠. 제가 통합진보당을 떠난다 하더라도 저의 정치적 미래에 조바심은 없어요. 벗어나고 초월해야죠. 그러나 당을 사랑하고 당의 운명을 걱정해야 하는 당원으로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이 이석기·김재연 의원의 자격심사를 7월 회기중에 처리한다는 방침을 정했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황당하죠. 우선 두 거대정당이 우리 당 안에서 벌어진 비례대표경선을 얼마나 자세히 아는지 묻고 싶고요. 두 차례 부정선거 관련 당 조사에서 의혹이 제대로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그런 의도적 부정이 실제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죠. 더더욱 사전에 기획된 조직적 부정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확신합니다. 두 거대정당이 힘의 논리로 권리가 없는 자격심사를 벌이겠다는 것입니다. 지난 총선에서 선거부정에 연루돼 선관위가 조사중인 국회의원이 100명에 이른다는 말도 있습니다. 의혹이 있을 때마다 국회의원을 심사 대상으로 놓고 자격박탈 운운한다면 우리 국회와 국회의원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통합진보당도 비례대표를 선출할 때 새누리당이나 민주통합당 같은 절차를 밟지 그랬어요? 국민은 통합진보당의 공직 선출 과정을 하나의 요식행위였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공직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통합진보당이 밟았던 민주적 절차에는 정당성이 있었습니다. 이번 파문으로 억울하게 훼손되고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을 뿐입니다. 앞으로 어떠한 공방이 있더라도 당원들의 의사를 반영하는 공직 선출 원칙은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석기·김재연 의원이 올해 말 대선을 앞두고 야권연대의 걸림돌이 된다는 진보세력의 인식이 있습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렵더라도 제가 후퇴할 수 없는 이유는 저는 4만9000명에 이르는 청년선거인단이 선출했다는 점입니다. 속 편하게 털고 나오라는 사람도 있지만 왜 네 마음대로 박차고 나오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많아요. 청년비례대표선거와 관련한 의혹은 소스코드 열람을 통한 투표값 조작논란이었습니다. 그러나 특위의 최종보고서는 청년비례대표선거의 투표값 조작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사퇴 주장은 선거부정의 문제라기보다 소위 ‘종북 프레임’에 따른 정치적 압박의 성격이 짙다고 생각합니다.”



“초등학교 때 대구MBC 합창단원”

민노당이 해체되고 진보세력이 다시 통합하는 과정에서 북한문제를 충분히 토론하고 합의하지 않았나요?
“지난해 여름 새로운 통합 진보정당을 추진하는 협의기구를 만들었죠. 과거 분당의 빌미가 되었던 북한문제를 충분히 토론했고,그것에 근거해 강령을 채택했습니다. 북한문제가 정리되지 않았다면 통합 과정은 이뤄질 수 없었을 겁니다.”

심상정 의원은 최근에도 구당권파의 대북관을 ‘편향적 친북주의’로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발언을 포함해 총선 이후 심 의원의 행보는 통합정신을 따르지 않았다고 저는 봅니다. 통합 직후 합의한 당의 의사결정구조는 당을 이루는 각 세력이 합의를 이루지 않으면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다는 거였죠. 그런데 1차 조사 결과가 발표된 5월 2일 이후에는 모든 사안을 표결에 부치더라고요. 당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당원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해결하지 않고 외부의 시각으로 재단하고 파헤칠 때 당에 어떤 도움이 되겠는가를 묻고 싶어요. 심 의원처럼 현명한 분이 그런 처신을 한다니 참으로 애석합니다.”

사실 김 의원과 인터뷰가 너무 불편합니다. 기자는 즉문즉답 인터뷰가 편한데 그게 잘 안됩니다. 저는 ‘질문의 자기검열’을 하게 되고 김 의원은‘사상검증’의 피해의식을 느낄지 모릅니다. 소위 종북문제 때문이죠. 골치 아픈 질문은 일단 뒤로 미루고 김 의원의 삶의 궤적을 듣고 싶어요.유년·소년시절은 어디서 보냈습니까?
“저는 대구에서 태어났어요. 중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올라왔지요. 부모님이 저와 네 살 아래 남동생을 공부시킨다며…. 그 후 대학을 마칠 때까지 줄곧 서울에서 공부했습니다.”

대구 사투리를 전혀 안 쓰네요?
“서울에 온 후 의식적으로 쓰지 않았어요. 놀림받을까 봐…. 시간이 많이 흘러 대구사투리는 다 잊었어요. 가족과 대화할 때도 사투리를 쓰지 앉게 됐죠.”

부모님은 자식들을 서울에 유학시킨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서울에서 생활하셨죠. 제 판단이지만 서울유학이 아이들의 공부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고 다시 대구로 내려가신 게 아닌가 해요.”

오직 유학을 목적으로 서울로 이주하셨다면 자식들에게 거는 기대가 굉장히 컸나 봅니다.
“초등학교 때는 저도 ‘엄친딸’ 소리를 들었죠. 공부도 잘했고, 노래도 잘 했어요. 대구MBC 합창단원으로 4년을 보냈으니까요. 그때 대구에서 MBC 합창단에 들어간다는 것은 부모들의 큰 자랑이었어요.”

지금도 노래 실력이 대단하겠군요.
“동요를 잘 부르지요.”(웃음)

부모님은 어떤 분이었나요?
“지극히 평범한 서민이죠.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19평짜리 서민아파트에서 살았어요. 아버지는 지금도 월급쟁이 생활을 하시고….정년이 1년밖에 남지 않았어요. 평범한 삶을 사셨지만 자식들이 성공했으면 좋겠다는 열망이 매우 컸죠.”

고등학교 시절은 어땠나요?
“외고에 진학해 부모님의 기대를 부풀렸죠. 학교 근처로 이사할 만큼 적극적으로 뒷바라지하셨지만 저는 진학 후 공부를 잘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학보사에 들어가 글을 쓰고 시를 읽는 일에 몰두했어요.”

조숙한 학생이었군요?
“고등학생 시절 대학 1년생이 해봄직한 일을 다 경험해봤어요.MT·축제·서클활동 등….”

글쓰기를 좋아했나요?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

학교생활에는 만족했나요?
“어른들이 하지 말라고 하는 일을 하기 좋아했어요. 당시 감옥에 있던 박노해 시인의 시에 몰입하기도 했고, 그분의 시를 학교 게시판에 올렸다 선생님께 꾸중을 듣기도 했습니다. 박노해 씨가 출감한 이후 그를 인터뷰해 학보에 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이후로는 한 번도 뵙지 못했지만….”

좋은 친구가 많았겠군요?
“마음을 털어놓은 사람들은 서클 선후배였죠. 세상 일이 너무 복잡해 보였고,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내 삶의 목표를 무엇으로 잡아야 할지 몰랐던 시절이었습니다. 자주 만나지 않더라도 학보사 출신들과 정신적 유대감이 크죠. 우리만의 방황기를 공유했다고 할까요? 우리는 ‘속물근성’을 버려야 한다는 점에 모두 공감했어요. 공부를 많이 한다거나 돈을 많이 벌 생각을 한다는 건 미덕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우리를 잘난 척하는 아이들로 생각했겠죠.”

좋아했던 작가가 있었나요?
“시를 많이 읽었습니다. 시를 비판적으로 봐야 한다는 생각도 하고, 좋아하는 시인의 시를 비슷하게 흉내내보기도 했습니다. 교과서에 나온 시는 멀리했죠. 조세희 선생의 ‘난쏘공(<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같은 작품에 열광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사회과학서적도 읽었나요?
“국사 선생님 한 분이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문제집 풀지말고 사회과학서적을 읽으라고 했어요. 책도 정해주시고요. 그때 ‘아, 이런 선생님도 계시구나’ 하고 느꼈죠. 선생님들의 인상이 좋지 않았던 때였어요. 그분들은 우리에게 공부하라는 말 외에는 별다른 영감을 주지 않았습니다. 국사 선생님은 달랐죠.”

이영희 선생의 책도 고교 시절에 읽었나요?
“고교 시절에는 그분의 책을 읽지 못했죠. 보수와 진보의 문제를 인식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소외된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들이 그런 삶에서 해방되고 싶어한다는 정도의 의식은 있었죠.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는 점과, 그런 세상을 바꿔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시절이었어요.”


“농부의 아내가 되고 싶었다”

대학 진학 후 분위기가 달라졌겠죠? 당시는 운동권 선배가 신입생 후배 를 영입하고 챙기던 분위기 아니었나요?
“그런 분위기를 기대했는데 아무도 그러지 않았어요. 99학번으로 입학했는데 당시 대학은 IMF 직후 취업난 때문에 학생운동도 침체기를 맞았습니다. 1학년 때 학회에 들어갔는데 세미나 한번 하고 없어졌어요. 10년 이상의 전통이 있던 학회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더군요. 시위 참여나 책 읽기를 권유하는 선배나 동료도 없었습니다. 5·18 광주 기행 포스터를 보고 선배를 졸라 광주에 다녀온 기억 정도가 생각나네요.”

2학년 때부터는 상황이 좀 달라졌나요?
“1학년 마치고 겨울방학 때 생각이 많았어요. 운동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단과대 학생회 집행부에 들어가려 했더니 주위 사람들이 다 말려요. 신세 조진다는 거예요. 학점도 나오지 않고취업도 힘들고….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니까 오히려 오기가 발동했어요. 학생회 집행부가 나쁜 일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도 아닌데 가까이 가면 신세를 조진다는 이유로 거리를 두려고 하는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어요. 그렇게 타성적인 사고방식, 평균적 삶이 저는 싫었습니다. 단과대 학생회 집행부에 들어가 열심히 일했어요.”

2학년 때 학생회 집행부에서는 주로 무슨 일을 했나요?
“농활(농촌봉사활동)을 조직하는 일이었습니다. 계절별로 보통 7개 마을의 농활을 조직했습니다. 농촌에 가면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저를 보고 시골로 시집오지 않겠느냐는 말을 많이 했어요. 처음에는 빈말로 대답했는데 나중에는 정말 진지하게 생각했어요.농부의 아내가 되어 평생 농촌운동을 해볼까 생각했죠. 농촌생활을 힘든 일로 여기는 것은 속물적인 생각이잖아요? 시골로 시집온 명문대 출신의 여성도 몇 분 봤어요. 대학공부를 했다고는 도저히믿어지지 않는 투박한 시골 아줌마의 모습을 하고 아주 씩씩하게 살아가는 거예요. 아! 정말 멋있었어요. 농부가 아내가 되어 평생 살고 싶다는 충동을 농활을 통해 느꼈죠.”

3학년 때는 단과대 학생회장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학생운동권 안에는 소위 NL(민족해방)과 PD(민중민주)의 노선투쟁이 있었죠?
“우리 때는 그런 것도 희미해졌어요. 학생운동권 세력 자체가 축소되고 와해되는 시기였으니까요. NL-PD 논쟁 같은 노선투쟁도 사라졌습니다. 심지어 학생회장선거에 아무도 나오려 하지 않는 상황까지 발생했어요. 여학생에게 회장을 해보라는 제안도 들어오는거죠. 단과대 학생회장, 4학년 때 맡았던 총학생회장 모두 한국외국어대 역사상 여학생으로서는 최초였죠.”

김대중 정부 시절 대학생활을 보냈군요. DJ정권을 어떻게 평가하고 어떤 이야기를 했나요?
“김대중 대통령을 진보로 바라보는 분위기는 없었습니다. 우리가 한창 자랄 때 그분은 정계은퇴하고 미국에 가 있었죠. 1980년대 학생들이 바라보던 DJ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분은 남북 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의 주역인 동시에 부평 대우자동차에서 노동자를 탄압하는 신자유주의자라는 두 얼굴이 있었죠. 그분은 한국사회에 신자유주의 경제 노선을 전면적으로 확대한 주역이라 는 평가가 있었어요.”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그분은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고 반인권적 정권의 탄압을 받았던 희생자로서 민주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야겠지요. 그렇지만 노동자들에게 가해졌던 물리적 억압도 심각했던 시기였습니다.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은 사람도 굉장히 많았습니다. 당시에는 ‘신자유주의’라는 용어도 생소했습니다. 우리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을 누구에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하는 자괴감도 있었어요. 지금은 시간이 많이 흘러 신자유주의를 바라보는 ‘객관적 거리’를 확보했지만요.”

4학년 때 총학생회장에 당선됐으니, 3학년 때 단과대 학생회장 시절의 능력을 평가받았나 봅니다.
“외국어대는 1998년 재단이 비리문제로 쫓겨나가고 공익 이사진이 구성되었습니다. 제가 단과대 학생회장을 하던 시절 공익 이사진의 임기가 끝나고 옛 재단이 다시 복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저는 비리재단의 복귀를 막으려고 열과 성을 다해 노력했습니다. 매일 아침 정문 앞에서 마이크를 들고 구호를 외치며 학우들의 동참을 호소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을 하는 동안 얼굴이 새카맣게 탔던 기억이 나네요. 체구도 작은 제가 그렇게 열심히 하니 선배들도 저에게 총학생회장 일을 맡겨도 믿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지 모르죠. 사실 저는 그때만 해도 이론에 밝지도 못했고 경험도 풍부한 편이 아니었어요.”

운동권 내부의 노선투쟁보다 운동권-비운동권의 주도권 다툼이 나타났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2002년 전국에서 최초로 한양대에서 비운동권 후보가 총학생회를 장악한 일이 벌어졌지요. 강성 운동권을 확 누르고 비운동권 총학생회가 전면에 나선 것은 충격적이었죠. 한국외국어대에서도 제가 총학생회장을 지낼 때 비운동권 세력이 힘을 결집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부 오해의 결과이기도 했지만 당시 비운동권 학생들은 총학생회가 학생복지나 등록금문제보다 사회적 이슈에 매몰돼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학생회 홈페이지나 대자보를 통해 치열하게 논쟁을 벌였던 기억이 납니다.”


“말 잘하는 남편에게 매혹됐다”

2002년 총학생회장 시절 대통령선거가 있었지요? 당시 노무현 후보를 학생운동권은 어떻게 평가했나요?
“처음에는 ‘저 사람 누구야’ 했지요. 잘 모르기도 하고 그가 완주할 가능성도 크게 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때 저는 학생으로서 진보정당운동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권영길 후보를 지지했습니다. 연말쯤 되자 노무현 후보가 이만큼 커지면서 노무현이냐 권영길이냐를 두고 운동권 안에서 논쟁이 붙기도 했지요.”

노무현의 한계를 일찍부터 본 셈인데, 그 한계는 무엇이었습니까?
“인간 노무현을 평가하기에 앞서 보수정당 구조 안에서는 개인의 출중한 능력과 상관없이 일정한 한계를 가진다고 봤습니다. 이라크 파병이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도 실망스러웠고, 신자유주의 정책도 계속 확대되었습니다. 그것은 노무현 개인의 한계라기보다 정권과 당시 집권세력의 한계로 봤습니다.”

연애와 결혼 이야기도 궁금합니다. 남편과는 언제 어떻게 만났습니까?
“운동권에서 활동하며 2001년께 알게 됐지만 연애를 시작하기 는 2009년 무렵이었죠. 결혼은 2010년에 했습니다.”

남편의 어떤 매력에 반했습니까?
“남편과 같이 이야기를 하면 시야가 확 열리는 느낌을 받습니다. 가끔 굉장히 두꺼운 책을 들고 와서 같이 읽자고 해요. 저는 그런 책 같이 읽을 여자를 만나라고 하죠. 사고방식이 굉장히 진취적이고요. 사람들이 운동권이라고 하면 고리타분하고 판에 박혔다는 느낌을 갖지만 남편은 그런 점에서 굉장히 유연합니다. 돈도 없고 겉모습은 늘 수수하지만 미래를 밝게 보는 그의 낙관주의를 존경합니다. 여자들이 보통 남자들의 외모에 반한다고 생각하지만,여자들은 오히려 남자들의 말솜씨에 매료됩니다. 저도 남편의 번득이는 언변에 넘어간 것 같아요. 개그맨들이 미인을 아내로 얻는 이유가 거기 있는 거죠.”

지금은 무슨 일을 하나요?
“결혼 1주년이었던 지난해 3월21일 남편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어요. 보통은 재판 기간이 2개월 정도 걸리는 사안인데… 5개월이나 걸렸죠. 집행유예로 나오기는 했지만요. 지금은 계속 공부하고 있어요. 책을 쓰거나 강연하고 학술단체를 만들어 활동하는 일을 좋아하니 그런 방면에서 돌파구를 열겠지요.”

고려대 법대를 졸업한 남편 최호현(38) 씨는 ‘자본주의연구회’라는 단체를 조직해 2008년 9월부터 의식화 학습을 위해 김일성 회고록인 <세기와 더불어>와 <주체사상에 대하여> 등 이적표현물을 소지한 혐의를 받았다.

시댁이 굉장한 부자라는 기사가 나온 적이 있지요?
“너무 억울해요. 사실과 다른 이야기니까요. 소위 ‘신상털기’를 하려고 1주일 동안 기자들이 집 앞에서 진을 쳤죠. 시아버님이 얼마 전 칠순잔치를 하셨는데 지금도 한약방을 운영하셔요. 한평생 의정부에서 한약방만 하셨어요. 딱 그 정도의 재산이 있는 분이에요. 의정부 집은 개발제한구역에 있어 이층집을 지을 수도 없고 건평은 39평을 넘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당에 농사를 지으시죠.”

재산신고는 얼마나 했나요?
“전세 아파트 2억3000짜리가 전부입니다. 거기에 연리 8%짜리 대출 4000만원이 있습니다. 선거 나갈 때 공탁금이 필요해 빌렸죠.”


“내 마음의 노래는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 ”

무슨 노래를 좋아하죠? 요즘 노래방에 가면 무슨 노래를 부르나요?
“레퍼토리가 다양해서 일일이 특정할 수는 없어요. 누구와 같이 가느냐에 달려 있죠. 요즘 ‘버스커버스커’의 노래를 즐겨 들어요.‘인디음악’도 열심히 듣는 편이죠. 요즘 ‘나가수’에서 최고의 가수들이 부르는 리메이크 곡도 좋아합니다. 나미의 ‘빙글빙글’을 윤도현 밴드가 편곡해 불러 1등을 하더군요. 전율이 느껴졌어요. 최근 개봉한 영화 <건축학개론>에 흐르는 ‘전람회’의 노래도 굉장히 좋아하죠. ‘기억의 습작’…. 이 노래. 고교 시절 시를 읽거나 쓰며 들었던 노래죠. 추억이 가득 담긴 노래입니다.”

대학에서 러시아어를 전공했죠? 러시아문학에 심취한 기억이 있나요?
“없어요. 러시아문학 커리큘럼도 있었지만 책이 너무 두꺼워 엄두를 못 냈어요? 러시아어 실력도 별로고요. 러시아 얘기만 나오면 작아지네요.”

멘토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나요?
“없어요.”

혹시 남편이 멘토 아닌가요?
“어떻게 남편이 멘토가 될 수 있어요?”

멘토로 삼고 싶은 사람도 없나요?
“처음 국회의원 나오려고 했을 때 ‘제2의 이정희’라는 말을 듣기도 했어요. 제가 나이가 젊고 하니 그런 말이 나왔나 봐요. 그런데 이정희 전 대표는 저와 너무도 다른 분이에요. 배우고 싶은 열망이 컸지만 괜히 어설프게 흉내 내서는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그분을 따라 해야겠다는 생각에 종지부를 찍었지요. 그분이 선천적으로 가진 성정과 능력은 따라갈 수 없어요. 어설프게 따라 하면 우스운 모습이 되겠죠.”

음모론적인 시각인지는 몰라도 ‘앞으로 이정희의 후계자는 김재연이 될것’이라는 말도 있어요. 그런 말 들으면 어때요?
“기분 좋죠.(웃음) 저도 이정희 대표님의 팬 중 한 명이니까요.상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이죠. 진보진영에 이런 인물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고 기대했던 측면을 이정희 대표께서 온전히 흡수해 긍정적으로 보여주셨어요. 이정희 대표는 처음 국회의원을할 때 원래 민노당원이 아니었죠.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되면서 당원이 되신 거예요. 굉장히 빠른 시간 안에 10만 당원의 꿈과 고민과 열정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죠. 제 그릇 안에도 당원들의 열망을 담을 수 있어야 하는데, 아직은 시작 단계죠.”

진보정치세력의 리더로서 꿈과 야망이 있는 건가요?
“그런 이야기는 청년비례대표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한 적이 있어요. 차세대 리더는 더욱 진취적 면모를 보여줘야 한다고요. 이정희 대표는 40대에 당 대표를 하셨지만 앞으로는 30대 당 대표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런 말을 제가 이정희·유시민 대표 앞에서한 적이 있어요. 앞으로 4년 후 새로운 국회의원을 뽑을 때는 20대, 30대 진보정치인들이 리더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본인도 그 반열에 포함되는 겁니까?
“그러자면 중요한 조건이 충족돼야 해요. 제게 기대를 거는 국민과 당원의 생각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그릇의 크기를 키워야 합니다.”

북의 주체사상은 우리 진보진영의 이념과 활동의 지형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주체사상은 철학·사상의 영역이면서 북한의 통치이념이기도 하죠. 어떻게 그렇게 일사불란한 사회체제를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한 사회를 그런 시스템으로 버틸 수 있을까? 한번 공부해보고 싶은 테마이기도 해요. 제가 한창 운동을 할 때는 주체사상이 운동의 영역에 끼어들 여지가 없었어요. 북한의 저작물들을 마음대로 읽을 수도 없었고요. 주체사상이 우리의 진보운동에 영향을 미쳤다면 그 분야도 한번 연구해보고 싶어요. 왜 그래야만 했을까?”

김 의원에게는 불행하게도 ‘종북주의자’라는 브랜드가 붙어 있어요. 종북주의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이명박 정부 들어 금강산관광이 중단되고, 북한과 모든 논의가 중단되면서 많은 사람이 그 분위기에 젖어 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종북이라고 말하는데, 저는 언어도단이라고 봅니다. 요즘 청년들은 선배가 시키는 일도 싫으면 하지 않습니다. 북한을 추종하고 북한의 사주를 받아 진보운동을 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나요? 집회의 형식과 내용도 달라졌어요. 절대로 그들을 하나의 사상이나 틀 안에 가둘 수 없습니다. 고정된 틀을 가지고 대중과 만나는 방식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종북사상으로 진보운동을 어떻게 추동할 수 있겠습니까?”

종북은 실체가 없다는 뜻인가요?
“한반도의 평화를 원하는 모든 사람의 논의가 친북 또는 종북의 블랙홀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어요. 도대체 이런 상황에서 누가 남북 간 경색된 국면의 물꼬를 틀 수 있겠습니까? 참 답답하죠. 진보정당의 역할이자 헌법정신을 이행하고자 하는 모든 국회의원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국회의원선서문에도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써 있거든요. 남북 평화공존의 담론을 종북으로 몰고 가서는 안됩니다.”

정치인으로서, 지식인으로서 김정은 3대 세습체제를 비판하는 견해를 내놓을 수도 있지 않나요?
“김정은 체제를 무조건 부정하지 않는 것이 그 체제를 긍정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무조건 부정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그것이 전쟁의 위험을 내포하기 때문입니다. 그 체제를 부정한다고 그 체제가 붕괴하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체제를 제대로 파악하고 통찰하는 실사구시적 접근이 필요합니다. 김정은 사진 뒤의 여자가 누구냐고 궁금해하지 말고 그를 직접 만나 물어보자는 겁니다.”

북에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없습니다. 저는 식량문제의 근본원인도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식량문제를 해결할 백가쟁명식 견해와 아이디어를 북한주민 스스로 내놓을 수 없는 체제라는 겁니다.
“북한의 인권은 북한의 사정을 조금 더 정밀하게 들여다보고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의 인권을 국내정치적차원에서 접근한다면 북한의 인권상황 개선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김정은의 여인, 김정은에게 물어보자”

북핵 문제로 남북관계는 경색 국면을 맞이하곤 했습니다. 북핵 문제, 김의원의 해법은 무엇입니까?
“보편적 인권문제가 차별적으로 적용돼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한반도 비핵화는 우리 당의 확고한 당론입니다. 한반도 비핵화의 첫걸음은 상호 신뢰 구축이라고 봅니다. 신뢰를 구축하려면 대화가 필요합니다. 남북의 신뢰가 형성되면 핵문제를 포함한 모든 논의가 가능해지겠지요.청년비례대표의 입장에서, 청년들이 살아야 하는 삶은 앞으로 유장하게 남아 있고, 그들의 삶을 전쟁의 위협 아래 두어서는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장기적 과제이지만 남북 평화체제 구축을 통해 선제적 군축을 단행해야 합니다. 군복무제도도 대체복무제를 허용하고 궁극적으로는 모병제로 갈 수 있는 틀을 마련해야 한다고 봅니다.”

‘반값 등록금’ 문제를 꾸준히 제기하셨죠? 앞으로 기재위에서의 활동 계획은 뭔가요?
“사실 반값 등록금 문제는 박근혜 의원이 2006년 지방선거 때 처음 제기했죠. 사람들이 이걸 모르고 있어요. 이명박 대통령보다 원조죠. 그래서 이번에 타임스퀘어에서 대선 출정식을 할 때 학생들이 가서 약속을 지키라는 주장을 하게 된 겁니다. 정치권이 이 문제에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이미 법안으로 나와 있습니다. 정책이 없거나 법안이 없는 것이 아니고 재정투자의 결단이 필요한 단계입니다. 청년실업 문제와 함께 제가 국회 기획재정위에서 가장 열심히 문제제기를 해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기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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