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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나 밀러가 쓰는 화장품, 사천 대나무 수액으로 만든다

충남 태안의 백합 뿌리. 설화수의 ‘자음생크림’에 들어간다(사진 왼쪽). 제주산 동백씨에서 짠 기름을 사용한 한방 샴푸 ‘려’(가운데). 충북 괴산군 닥나무. 설화수 ‘ 미백 에센스’의 원료다(오른쪽). [사진 아모레퍼시픽]


짭조름한 바다 내음이 바람에 섞여 오는 충남 태안군 태안읍 남문리. 해변에서 불과 500m 남짓 떨어진 이곳에는 13만2000㎡(약 4만 평) 백합 밭이 펼쳐져 있다. 1m 높이로 곧게 뻗은 진녹색 백합 줄기들이 빼곡히 올라와 있지만 흰 꽃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밭 한가운데, 초록 줄기 위로 올라온 상아색 백합 꽃봉오리를 ‘똑똑’ 꺾어내며 한평희(40) 태안백합수출영농조합법인 이사가 말한다. “꽃으로 가는 양분을 줄여야 뿌리가 실해져요.”

프리미엄 국산 화장품 원료의 비밀



 18년간 태안에서 백합을 재배해 온 그는 요즘 ‘꽃보다 아름다운’ 백합 구근(둥근 뿌리)을 키우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꽃에서 뿌리로’의 변화는 아모레퍼시픽을 만난 뒤 시작됐다. 백합 구근은 은폐 기능을 강화하고 피부에 윤기가 돌게 하는 효능이 있는 것으로 『본초강목(本草綱目)』 같은 옛 중국 약학서에 기록돼 있다. 작약, 연꽃의 씨인 연자육, 둥굴레 차의 원료인 옥죽, 약용식물 지황과 함께 한방화장품 브랜드인 ‘설화수’의 기본 원료로 쓰인다. 『동의보감』 탕액 편에는 백합을 달인 물로 환자의 피부를 씻어 회복을 돕는다는 기록이 있다. 지난해 1000억원어치가 팔린 ‘윤조에센스’나 60mL에 22만원 하는 최고급 ‘자음생크림’이 백합 구근을 원료 삼아 만든 것이다.



 설화수 사업 규모가 커지면서 아모레퍼시픽은 백합 구근을 다량 확보할 필요가 생겼다. 원료의 질을 높이기 위해 농약을 쓰지 않고 유기농 재배를 해줄 곳을 찾았다. 그래서 만난 곳이 열다섯 농가가 뭉친 태안백합수출영농조합법인이다. 심상배(58) 아모레퍼시픽 생산물류부문 부사장은 “다른 지역에서는 다들 친환경 재배가 어렵다고 했는데 태안에서는 해주겠다고 했다”고 고마움을 표했다.



  강항식(47) 조합법인 대표는 “백합꽃을 일본과 중국에 주로 수출했는데, 가격 변동이 심해 씨앗 값을 못 건질 때도 있었다”며 “ 매년 안정적으로 구근을 팔 곳이 생기는 것은 농가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심 부사장은 “국내산 유기농 원료는 수입산보다 3~4배 비싸지만 품질 투자와 상생의 측면에서 전 원료를 국내산 친환경 작물로 교체하는 작업을 4년 전부터 해 왔다”고 말했다.



천연 식물 원료 찾아 전국 방방곡곡



‘지아이조’ ‘팩토리걸’의 주연배우이자 할리우드의 패셔니스타인 시에나 밀러(31)도 경남 사천의 대나무 수액으로 만든 아모레퍼시픽 기초화장품 ‘ABC세럼’을 즐겨 쓴다.
 백합 구근뿐이 아니다. 화장품 회사들은 한방 원료를 찾아 전 국토를 누빈다. 충남 태안, 제주 송당리, 경남 사천 서정리, 경기도 파주 통일촌 등 나라 구석구석에서 자라는 토종 식물들이 설화수·헤라 같은 최고급 브랜드의 주원료로 활용된다. 제주 동백마을의 할머니들이 소일거리 삼아 동네에서 주운 야생 동백 열매로 탈모 예방 샴푸 ‘려’를 만들고, 충북 괴산의 닥나무 뿌리 추출물로 설화수 미백 에센스를, 제주 송당리 비자 열매에서 짠 기름으로 이니스프리 트러블 전용 에센스를 만드는 식이다. 사천 대밭고을에서 키운 대나무의 수액으로 만든 수분 공급용 ‘ABC세럼’은 할리우드 배우 시에나 밀러의 애용품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화장품 회사들은 한약재를 비롯한 대부분의 화장품 천연 재료를 도매상을 통해 구입한다. 마진을 생각하는 도매상들은 세계 최대 원료 시장인 중국이나 일본에서 싼값에 원료를 들여왔다. 그런데 중국산 약재에서 농약이나 중금속이 검출됐다는 소식이 이슈가 되면서 소비자들은 화장품 제조뿐 아니라 원료 산지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대장금’ 같은 드라마로 인해 한류 뷰티 열풍이 분 것 역시 한몫했다. 언제부턴가 우리나라 백화점 화장품·의류 매장을 찾는 중국 관광객들은 “한국산이다”라는 답을 듣고서야 매장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화장품 회사들이 점차 국내산 원료로 눈을 돌렸지만, 도매상을 거쳐 원료를 구매할 때에는 원산지와 이력 관리에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아예 산지 농가와 직접 거래를 하러 나섰다.



 아모레 원료구매팀은 2008년부터 국산 천연물 화장품 재료 찾기에 나섰다. 친환경 원료 재배 농가를 찾아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전국을 누빈다고 해서 ‘1박2일 팀’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친환경·안전성·지역발전’의 3박자를 갖춘 원료를 수소문하느라 서울의 사무실에 앉아 있는 때는 연중 3분의 1도 채 되지 않았다.



 이들이 찾아낸 친환경 원료 1호는 2010년 2월 수급 협약을 맺은 제주 서귀포 신흥2리 동백마을의 동백꽃과 씨앗이다. 200여 가구가 사는 이 마을 한가운데에는 300년 된 동백나무 숲이 있다. 귤농사를 짓는 제주도에서 귤나무가 바람 맞는 것을 막으려고 몇 그루씩 심은 동백나무가 자연스럽게 퍼져 마을을 상징하는 숲이 됐다. 농약이나 비료는커녕 사람 손이 전혀 가지 않은 100% 청정 원료여서 김 팀장은 ‘이거다’ 싶어 마을 주민들에게 “친환경 동백 씨앗 구매 계약을 맺자”고 했다. 하지만 다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200가구 정도 되는 마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70, 80대 할머니들은 ‘친환경’ ‘유기농’ 같은 설명을 듣고 눈만 끔벅끔벅했다. 김 팀장은 마을 전체에 30명도 되지 않는 40, 50대 ‘젊은이’들을 만나 그중 2가구와 계약을 맺었다. 그러고는 차례차례 주민들을 설득했다. 그사이 한방연구팀은 이곳의 동백 씨와 꽃잎을 가져다가 성분과 안전성 검사를 마쳤다. 2008년 중순 현지조사를 시작해 마을 전체와 계약을 맺기까지 걸린 시간은 1년8개월. 지금은 ‘숲에 떨어진 동백 씨앗을 주워다가 마을회관에 가져가면 돈을 준다’며 마을 할머니들이 더 좋아한다. 전에 어쩌다가 도매상이 찾아와 동백 씨를 사갈 때는 ㎏당 3000~4000원을 받았는데 지금은 6000원을 받고 수매량도 고정적이다. 머릿결 보호에 좋은 동백 씨 기름은 ‘려’ 샴푸에, 항산화 기능이 있는 동백 꽃잎은 말려서 이니스프리 에센스와 마몽드 파우더팩트에 쓴다.



글로벌 뷰티기업도 청정원료 주목



 인삼을 전량 친환경 작물로 교체하는 데도 곡절이 많았다. 일단 국내산 친환경 수량이 적었다. 전국에서 생산되는 인삼은 연간 2만5000t에 이르지만 그중 친환경 생산은 100t이 채 되지 않았다. 원료구매팀 김성우 매니저는 친환경 농산물 인증을 발급하는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의 홈페이지를 샅샅이 뒤져 친환경 인삼을 키워본 적이 있는 농가를 찾았다. 알아낸 전화번호로 이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다 보니 지역번호가 대부분 ‘063’이었고, 위치가 전북 진안이었다. 이후 진안 인삼농협을 창구로 농가에 친환경 인삼 재배 계약을 장기간 맺자고 설득했다. 하지만 농가들은 값이 4분의 1 수준인 중국산 인삼과 경쟁하느라 지쳐 친환경 재배를 포기하려던 참이었다. 농가들은 “당장 생업 유지에 바쁜데 제초제를 안 쓰고 풀 뽑는 재배를 어떻게 계속하느냐”며 손사래를 쳤다. 인삼은 지력을 많이 소모하는 작물이라 연작도 안 되는데, 친환경 기준을 맞추기 위해 재배 환경을 정비하는 투자까지 할 여력이 없다는 거였다. 아모레는 수확량이 들쭉날쭉해도 적정가격을 보장해 주고 모양이 예쁘지 않은 인삼도 가리지 않고 구입하겠다며 이들을 안심시켰다. 진안 인삼농협은 2010년 4월 아모레와 직거래 계약을 맺었다. 회사는 올해 진안농협에서 50억원어치가 넘는 친환경 인삼을 수매했다. 이 협약을 준비하던 중 아모레 기술연구원은 인삼의 유효 성분인 ‘컴파운드K’와 ‘진세노사이드F1’이 각각 보습과 노화 억제에 효능이 있다는 것을 세계 최초로 규명하기도 했다.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내로라하는 화장품 업체들이 청정·천연 원료 확보에 나서고 있다. 샤넬·SK-II 같은 글로벌 화장품 업체가 주목하는 바람에 아프리카 남동쪽 인도양의 섬나라 마다가스카르가 갑자기 ‘뷰티 성지’로 떠오르기도 했다. 두 회사가 각각 이 지역에서 자라는 희귀 식물에서 추출한 활성성분을 사용해 25만~43만원대의 고가 기초화장품 ‘수블리마지’와 16만~30만원대의 미백 에센스 ‘셀루미네이션’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아모레는 제주 구좌읍 송당리의 비자 열매 기름을 수입산 항균 원료인 티트리 오일을 대체하는 원료로 개발하는 식으로, 수입산 원료 대신 국내산 식물에서 유효 성분을 추출하는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심상배 부사장은 “친환경 원료와 유효 성분을 확보하는 것이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것과 직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태안=심서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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