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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의 소프트파워] 내 안의 질주본능을 깨워라

정진홍
논설위원
#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걸을 때 만났던 팜플로나의 한 친구가 축제가 시작됐다고 알려왔다. 팜플로나는 스페인의 17개 자치주 중 하나인 나바라주의 주도(州都)다. 팜플로나에서는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산 페르민’ 축제가 열린다. 어제부터 오는 14일까지 열리는 이 축제의 백미는 역시 ‘엔시에로(Encierro)’라 불리는 소몰이 행사다. 축제 기간 중 매일 오전 8시에 투우경기에 쓰일 소들을 산토도밍고 사육장에서 풀어놓으면 3분여에 걸쳐 팜플로나의 구시가지 골목길 825m를 사람들이 함께 질주(疾走)해 투우장에 골인한다. 1924년 이래 15명이 죽고 200여 명이 부상당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위험천만한 행사다.



 # 이미 중세 때부터 있어온 축제지만 이것이 전 세계적인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첫 장편이자 출세작인 『태양은 다시 뜬다』(1926년작)에 그 축제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엔시에로’가 소개된 덕분이었다. “옆구리가 진흙투성이인 육중한 황소들은 뿔을 휘두르며 함께 질주했는데, 그중 하나가 앞서 내닫더니 인파의 후미를 달리던 한 사람을 치받아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뿔이 박힐 때 그는 고개가 뒤로 젖혀졌고, 양팔이 옆으로 벌어졌다. 황소는 그를 들어 올렸다가 떨어뜨렸다. 황소는 다시 그 앞에 달려가던 다른 사람들을 표적으로 삼았는데 그는 인파 속으로 묻혀 버렸다. 인파는 입구를 통과하여 투우장으로 들어갔고 황소들이 뒤따라 들어갔다.”(이한중 역본, 한겨레출판, 268쪽) 90여 년 전 헤밍웨이의 사실적 묘사는 마치 현장을 보는 듯하다. 그런데 소들이야 흥분해서 달린다지만, 도대체 무엇이 사람들을 이토록 목숨 내놓고 질주하게 했을까? 단지 재미로? 혹은 심심해서?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또 다른 그 무엇이 있지 않을까 싶다.



 # 우리는 저마다 어린 시절에 질주했던 경험이 있다. 그 시절의 질주는 뭔가로부터 탈출하고 해방되기 위한 몸부림이다. 김주영의 장편소설 『잘 가요 엄마』의 한 대목에서 이런 구절을 보았다. “나는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무지개를 잡으려는 아이처럼 나는 한길을 벗어나 논둑 밭둑길을 가릴 것 없이 뛰고 또 뛰었다. 몸이 뜨거워지고 숨이 목젖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나는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 나는 그 뒤부터 울고 싶을 땐 무작정 달렸다. 달리고 나면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126, 128쪽) 어린 소년이 엄마가 다시 시집가는 현실 앞에 몸부림치며 그 악몽 같은 현실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마음에 질주하듯 달렸던 것이리라.



 # 분명 인간에게는 질주본능이란 것이 있다. 본래는 야생에서 다른 짐승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혹은 적에게서 탈출하기 위해 질주했으리라. 하지만 더 이상 몸으로 뛰지 않게 되자 오토바이·자동차·배·비행기 등 다른 탈것을 이용해 자기 안의 질주본능을 대리 충족시키게 되었다. 물론 내 몸뚱어리로 혼신의 힘을 다해 질주하는 것이라야 진짜 질주다. 동네 둑길을 질주하든, 끝없이 펼쳐진 초원을 질주하든, 성난 소의 날카로운 뿔 앞에서 “걸음아 나 살려라”하며 질주하든 모두가 진한 삶의 몸부림 아닌가. 결국 모든 질주는 살기 위한 몸부림 그 자체다. 그리고 여기서 멈출 수 없다는 자기 안의 아우성이 스스로를 다시 질주하게 만드는 것이리라.



 # 우리가 더 이상 질주하지 않는 것은 몸이 둔해진 까닭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럴 마음이 없어진 때문이다. 아니 삶이 가수면(假睡眠) 상태에 빠진 탓이라고 해야 옳을지 모른다. 오래된 옛 도시의 좁은 골목길을 성난 황소와 함께 목숨 걸고 질주하는 이들을 보며 우리 역시 때로 그런 광기 어린 질주를 통해서라도 가수면 상태로 잠든 삶을 흔들어 깨워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자, 그렇다면 이제 다시 일어나 나를 깨우라. 내 안의 잠자는 질주본능을 깨워 이 너절한 세상을 관통하듯 질주하라!



정진홍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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