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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말빚을 짓는 일조차 사치스럽다

김기택
시인
먹고사는 일에 시달리다 보면 가끔 로또에 당첨되는 상상을 한다. 1등에 당첨된다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한 푼도 쓰지 않고 가득한 곳간을 생각하며 저절로 나오는 웃음을 즐기리라. 굶어도 배부르고 힘든 일을 해도 쉬는 것 같은 은밀한 즐거움을 누리리라. 그러다 갑자기 변덕이 시키면 차와 집을 바꾸거나 마음껏 여행을 다니거나 분에 넘치는 사치를 누려볼지도 모른다.



 물론 현실은 다르다. 일확천금이 화근이 되어 지금 누리고 있는 초라한 평안조차 빼앗길 수 있다. 그저 백일몽만 달콤할 뿐이다. 최근에 읽은 한 권의 시집이 이런 안일한 생각을 뒤집어주었다.



 “의학적으로 로또가 당첨되는 것과 같은 작은 확률을 바라는 것은/ 제가 할 일은 아닌 듯합니다./ 말기암 환자 가운데서도 생존자가 나온다지만/ 간혹 병동에서 그 생존자를 실제 만나기도 하지만/ 지금은 로또를 살 때가 아닙니다.”



 말기 대장암으로 투병하다 세상을 떠난 윤성근 시인의 시 ‘로또’의 한 구절이다. 말기암 환자에게 완치와 생존은 1등 당첨 가능성이 아주 희박한 로또 같은 것이다.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산다는 것, 몸 위에 머리 하나 얹어놓고 있는 것만도 감지덕지할 행복이다. “하루 받아 하루만 사는 처지”에 놓이고 보니 시인이 바라는 것은 아주 단순해진다. 이를테면 이런 기도다.



 “더 큰 고통은 조금만 주시고/ 그리고 또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의 지능을 갖게 하소서.”



 그는 지난해 4월에 51세로 세상을 떠났다. 최근에 소식을 듣고서야 유고시집 『나 한 사람의 전쟁』을 읽게 되었다. 투병하는 동안 그는 미친 듯이 시를 썼다고 한다. 가족에게는 바깥에 죽음을 알리지 말고 장례할 것과 사후 일주기에 유고시집 발간을 유언했다고 한다. 대장을 잘라내는 큰 수술을 했고, 그 후유증으로 배 속에 생긴 고름을 구멍을 뚫거나 주사기로 뺐으며, 식사를 할 때마다 맛 대신 극심한 아픔을 삼켰으며, 온몸에 주삿바늘이 꽂혀 눕는 것조차 몹시 힘들었다.



 시인은 이 무지막지한 고통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 앞에서 놀라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한 것 같다. 할 수 있는 건 통증에서 놓여나기만을 간절히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물을 수 없는 물음만 가득한 고통 앞에서 시인은 무력해지고 단순해지고 어려졌지만, 오만한 인간의 말은 놀랍도록 순수한 시의 언어가 되어 갔다. 그의 시를 읽으면서 작아질 대로 작아져 욕망이라고 부르기가 민망한 욕망을 만나니 나의 터무니없이 허황된 몽상이 뒤통수를 한 방망이 맞은 느낌이었다.



 자신의 몸이 “거진 다 말라가는 물통”이 되는 것을 보면서 그는 어쩔 수 없이 시에 매달렸지만, 시 쓰는 일조차 말빚을 짓는 일이라며 부끄러워했다.



 “말로써 죄를 짓고/ 씻으려고 또 말을 하고/ 어느 스님은 말빚을 가져가기 싫다고, 저 세상으로/ 모두 없애달라고 하셨다는데/ 병을 기화로 말빚을 짓는 나/ 해야 할 말이 무엇이 있어 또 죄를 짓는가.”



 한없이 낮은 이 겸손한 죄의식은 입구멍이 모자랄 정도로 할 말이 많은 사람들에게, 배설하듯 쏟아지는 이 시대의 언어들에게 천둥처럼 크게 들린다. 말은 범람하지만 가난한 말을 만나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로또 사서 헛돈 쓰는 꿈은 종종 꾸면서 나는 무슨 배짱인지 쉰 살 즈음에는 반드시 해야 한다는 대장암 검사 한 번 받아본 일이 없다. 소화기 계통이 튼튼하지도 않은데도, 의료보험공단에서 무료로 검진해 준다는데도, 사소한 일 하나 실천하지 못하고 몸 안에다 바랄 수 없는 무거운 욕망만 잔뜩 넣어가지고 다녔다. 그 욕망이 말 속으로 들어가 시가 되었는지 모른다. 그 말은 남을 속이기도 하고, 흉기가 되어 찌르기도 했을 것이다. 시인이 무슨 벼슬이라도 되는 양 으스대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김춘수나 오규원 시인은 언어에 인간중심적인 사고의 폭력이 있음을 경계하고 평생 이 불순한 언어와 싸우지 않았는가.



 말기암은 시인에게 고통과 죽음도 주고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언어도 주었다. 시인은 그 순수한 말에도 죄가 들어갈까 걱정했고 말빚을 덜 지으려고 애를 썼다. 늦었지만 그 말에서 놓여난 시인의 명복을 빈다.



김기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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