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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아이] 매니페스토를 없애라

김현기
도쿄 총국장
엉뚱하게 들릴 게다. 정당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매니페스토를 없애라고 하니. 하지만 요즘 일본 사정이 그렇다. 잠시 시계추를 3년 전 2009년 8월로 돌려 보자. 총선거를 앞두고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은 54년 만의 정권교체를 위해 승부수를 던졌다.



 ‘매니페스토 2009’. 23쪽 55개 항목에 걸친 정권공약집이었다. 실로 구체적이었다. 대충 이런 식이다.



 “월 7만 엔의 연금을 받을 수 있는 최저보장연금제도를 새롭게 만듭니다.” “후기고령자(75세 이상) 의료제도가 따로 있는 걸 폐지해 국민건강보험으로 일원화하겠습니다.” “중의원 비례대표 의원 수를 80명 줄이겠습니다.”



 당시 민주당의 승인은 두 가지. 자민당 장기집권에 대한 피로, 그리고 또 하나는 ‘매니페스토 2009’의 매력이었다.



 다시 시계추를 2012년 6월로 돌려 보자.



 집권당이 된 민주당은 매니페스토 때문에 분열 위기에 놓여 있다. 3년 전 유권자에게 약속했던 각종 사회보장제도를 철회할지 말지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자와 이치로 전 대표 등 ‘원리주의자’들은 “정권교체의 원점인 매니페스토를 포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노다 요시히코 총리 등 ‘현실주의자’들은 “심각한 재정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소비세를 올릴 수밖에 없고, 그러기 위해선 야당인 자민당과 사회보장제도를 ‘절충’할 수밖에 없다”고 반박한다.



 오자와나 노다 총리의 주장 모두 설득력이 있다. 매니페스토 위반은 국민에 대한 배신이란 논리도, 국가의 중대사를 국민이 뽑아준 국회의원끼리 논의해 현실에 맞게 조정해야 한다는 논리도 맞다. 민의 직결형 민주주의와 간접 의회민주주의의 정면 충돌이다. 하지만 둘 다 정론(正論)이다 보니 타협이 힘들다. 정치가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는 구조가 돼버렸다.



 궁극적 원인은 ‘경직된 매니페스토’의 남발이다. 자로 재듯 똑 부러지게 이야기할 수 없는 것들까지 ‘강렬하고 구체적인 매니페스토 내세우기 경쟁’의 유혹에 빠졌던 게다. 그래서 최근 일본에서 대두하고 있는 게 ‘심플 매니페스토’론이다. “매니페스토에는 심플하게 방향성과 원칙만 담고 집권 후 그 토대 위에서 차곡차곡 정책을 마련하자”는 주장이다. 매니페스토가 갖는 ‘무게’를 의식해서다.



 대선까지 앞으로 6개월 남은 한국 사정을 보자. 후보마다 매니페스토를 속속 선보이기 시작했다. 섣부른 매니페스토가 족쇄가 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일본의 정치 현실을 들려주고 싶지만, 그런 기대를 해봐야 부질없다는 걸 안다.



 “정치인들이 선거를 앞두고 말하는 매니페스토란 건 어차피 ‘쇼’ 아니냐”는 ‘무서운 공감대’가 이미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에서는 또 얼마나 많은 속사포식 ‘묻지마 매니페스토’가 나올 것인가. 매니페스토 준수 공방, 나아가 “매니페스토를 없애라”는 주장까지 대두되는 일본의 혼란이 오히려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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