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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74) 쑹자오런



▲후일 국민당을 창당하게 되는 쑹자오런(앞줄 오른쪽 둘째)은 동맹회의 전신 중 하나인 화흥회(華興會) 출신이었다. 앞줄 가운데가 후잉, 앞줄 왼쪽 첫째가 황싱. 1905년 일본 도쿄에서 찍은 사진이다. 1911년 9월, 후베이의 혁명파들은 29세의 쑹자오런에게 지휘를 요청했다.    [사진 김명호]

쑹자오런, 우한行 미루다 혁명파 장악 실패



몽고족이 대륙을 지배하던 원(元)나라 말기, 민간에 나돌던 말이 있었다. “8월 15일 몽고 놈들을 박살낸다.”



1911년 9월 23일, 후베이(湖北)성 혁명단체 공진회(共進會)와 문학사(文學社) 대표들이 우한(武漢)의 외딴집에 모였다. 원래 이들은 상극이었다. 평소, 만났다 하면 별것도 아닌 일로 머리통 깨지고 팔다리 부러진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날만은 달랐다. 연장자가 “우리는 모두 혁명당 사람들이다. 목적은 같으면서 명칭이 다른 게 문제다. 이 순간부터 공진회나 문학사라는 말은 입에도 올리지 말자”고 제의하자 다들 수긍했다. 듣고 보니 맞는 말, 거절할 명분은 누구에게도 없었다.



이튿날, 100여 명이 모인 회의에서 거사를 의결했다. 달력을 펼쳐보니 10월 6일이 음력 8월 15일이었다. 홍콩과 상하이에 있는 황싱(黃興·황흥), 쑹자오런(宋敎仁·송교인), 탄런펑(譚人鳳·담인봉)에게 지휘를 청하기 위해 사람을 파견키로 하고 장이우(蔣翊武·장익무)를 임시 총사령관에, 쑨우(孫武·손무)와 류궁(劉公·유공)을 군정부장(軍政部長)과 총리로 추대했다. 여기서 말하는 총리는 총무 정도로 보면 된다. 황싱과 쑹자오런의 지휘를 받기로 한 이유를 놓고 온갖 해석이 난무하지만 해답은 간단하다. 국내에서만 활동하다 보니 외국 경험 많은 사람들을 한 수 위로 보는 습관이 있었다.



상황은 혁명파들에게 유리했다. 후베이 신군(新軍) 1만7000명 중 6000여 명이 두 단체 회원이었다. 게다가 쓰촨(四川)성에 긴급사태가 발생하는 바람에 9000명이 쓰촨으로 이동한 후였다. 술 한잔 들어가면 성공이라도 한 것처럼 할 말 못할 말 가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한둘 생겨났다. 예나 지금이나 입소문은 무서운 법, 정보원들의 보고가 일치하자 후광총독(湖廣總督)은 황급히 계엄령을 선포하고 포고문을 발표했다. “영내에 대기해라. 탄약을 회수하고 무슨 명의 건 집회를 불허한다. 중추절 회식도 하루 앞당겨 실시한다.” 혁명파 지휘부는 거사를 음력 8월 18일(10월 11일)로 연기했다.



상하이에 있던 쑹자오런과 탄런펑은 거사 지휘 요청을 받자 흥분했다. 황싱이 홍콩에서 올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우한행을 서둘렀지만 탄런펑이 이상한 병에 걸리는 바람에 상하이를 떠나지 못했다. 발목을 잡는 사건도 발생했다. 암살죄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후베이에서 복역 중이던 후잉(胡瑛·호영)이 온갖 재주를 부려서 파견한 사람의 편지를 받았다. “후베이 경내에 발도 들여놓지 마라. 거사는 물 건너 갔다”는 내용이었다. 어떤 어려움도 같이 나눌 수 있는 친구의 서신을 접한 쑹자오런은 우한행을 포기했다.



쑹자오런은 혁명파를 장악할 기회를 계속 놓쳤다. 10월 3일, 소속 정파인 동맹회(同盟會) 총부에서 빨리 가라고 재촉하자 6일 후에 떠나겠다는 대답만 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핑계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사이 우한에서 대형 사건이 터졌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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