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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동백서와 좌빵우물

한국 사회는 반세기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했다. 우리는 근대화를 위해 무엇보다도 서구화가 필요하다고 믿고 열심히 매진해 왔다. 그러다 보니 세상사를 우리 고유의 시각이 아닌 서구 관점에서 바라보는 경향을 갖게 되었다. 이런 추세는 세계화 시대를 맞아 우리의 경제 수준이나 민주주의가 발전할수록 오히려 강화되어 가는 느낌이다. 그 바탕에는 ‘서구적인 것이 세계적이고 합리적이며, 서구가 정한 기준은 보편적이고 타당하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서구 중심주의적인 프리즘을 통해 우리는 자연스럽게 미국과 유럽의 제도·문화는 본받을 만하며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그런 사례를 찾아보면 수두룩하다. 명절 차례상이나 제사상 음식을 차리면서 어동육서(魚東肉西), 홍동백서(紅東白西)를 모른들 큰 허물이 되지 않지만, 양식을 먹을 때 ‘좌빵우물’을 모르면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명함에서 외국어로 이름을 표기할 때 우리 식과는 달리 성(姓)을 뒤로 돌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성과 이름의 위치를 바꿀 뿐만 아니라 영어식 이름을 추가하거나, 아니면 영어 이름만 표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 뿐인가. 음악, 철학, 의학을 언급하면 당연히 서양 학문을 가리키는 것이며 우리 것에는 특별히 국악, 동양철학, 한의학 등의 수식어가 붙어야 한다. 언제부턴가 외국어 홍수 속에서 우리 고유의 아파트 이름이 하나 둘 바뀌어 가더니 ‘베스트빌’과 같은 영어와 불어가 섞인 무국적 단어까지 쏟아진다.

우리는 1997년 외환위기가 발생했을 때 우리 정부와 기업은 물론 노동자까지도 서구가 정한 규칙, 소위 국제기준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자책하며 죄스러워하기까지 했다. 스스로를 변방으로 간주하는 이런 대국 중심의 사고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 조상들은 중화주의 세계관에 따라 중국 왕조를 받들고 중국 문화의 지배와 우월성을 받아들였다. 그들이 우리를 ‘동쪽의 오랑캐’로 무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불러주는데 대해 자부심을 갖고 소중화(小中華)임을 자처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받들었던 중국의 제도와 문화는 19세기 말 허상이었음이 밝혀졌다. 유교사상이 무너지는 정신적 공황 속에서 우리는 일제강점기를 거처 서구식 사고를 접하게 됐다.

문제는 서구 국가들 스스로가 자신들이 만든 룰과 기준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최근 연거푸 발생한 금융위기를 계기로 우리는 서구의 이중잣대를 똑똑히 목격하고 있다. 미국발 금융위기는 탐욕을 부리던 월가가 기존의 금융제도를 악용해 최대한 돈을 벌려고 했던 데서 기인한다. 유럽발 금융위기는 그리스·스페인 같은 나라들이 돈을 번 이상으로 소비하는 데 익숙했던 관행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어서 발생했다. 그럼에도 국제통화기금(IMF)과 미국·독일·프랑스의 대응은 15년 전 한국에 강요한 극단적인 처방과 크게 대비된다.

유럽이 동양을 앞지르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 시대부터라고 한다. 서구는 인본주의에 기초해 과학적인 사고를 하기 시작하며 궁극적으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우수한 제도와 자유·인권이라는 핵심가치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간 뒤떨어졌던 동양도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서구의 제도와 핵심가치를 적극 수용하고 있다. 한·중·일을 비롯한 아시아가 달라지기 시작한 이유다.

21세기가 아시아·태평양 시대가 될 것이라는 점에는 전 세계적으로 이견이 없다. 그 변화와 발전의 한가운데에 한국이 있다. 세계무대에서 뛰는 젊은이들도 급증하고 있다. 우리도 이제 오랜 변방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우리 시각으로 주관을 갖고 세상을 바라볼 때가 됐다.



조환복 서울대 무역학과. 외시 9회. 외교통상부 국제경제국장, 주중 대사관 경제공사, 주홍콩 총영사, 동북아역사재단 사무총장, 주멕시코 대사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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