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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키벤 여는 맛, 열차 여행의 또다른 즐거움

일본인에게 도시락은 생활 문화의 하나다. 직장인도 외부 식당 대신 집에서 싸오거나 배달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도시락이 거대한 시장으로 성장한 일본에서는 음식 이상의 ‘무엇’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일본에선 집행유예를 받으면 ‘도시락을 받았다’고 표현한단다. 도시락이란 워낙 좋은 것이라는 뜻이다.

사세보에서 구마모토로 가는 길, 신도스 역에서 다음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이른 점심으로 도시
락을 택했다. 포장을 뜯고 젓가락을 손에 쥐는 사이, 고인 침이 입 안에서 한 바퀴 회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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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규슈(九州) 일대의 대형 서점마다 도시락에 대한 책은 노른자위 코너에 별도의 매대를 차지하고 있었다. 예쁜 도시락을 만드는 레시피 북이 눈에 보이는 것만 줄잡아 100종이 넘었다. 무크와 월간 잡지도 눈에 띄었다.

도시락 왕국 일본에서 열차 도시락 에키벤(驛弁)을 빠뜨릴 수 없다. 에키벤이란 역(驛)의 일본어 발음 ‘에키’에 벤토(도시락)를 합성한 말이다. 현장에서 확인한 에키벤은 단순한 음식을 떠나 일본식 휴대 음식 문화의 총체적 상징처럼 보였다. 특이한 것은 전 세계의 휴대 음식이 대부분 일본화해 에키벤으로 제공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중국의 만두와 찐빵, 인도의 커리, 한국의 불고기, 미국의 햄버거, 영국의 샌드위치가 조금씩 변형돼 대나무 무늬의 도시락에 ‘젓가락’과 함께 포장돼 팔리고 있다.

규슈 가고시마(鹿兒島) 중앙역에서 아주 특별한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다. 고급 레스토랑 음식을 의미하는 쇠고기 등심 스테이크가 도시락의 형태로 출시돼 있었다. 거대한 그릴에서 정식 요리복을 입은 ‘셰프’가 스테이크를 구웠고, 주문에 따라 분홍색 살코기의 ‘미디엄 레어’급 스테이크까지 도시락으로 포장됐다. 에키벤은 이미 음식의 한 형태를 넘어 ‘현상’으로 불러도 될 일본을 해석하는 의미심장한 코드였다.

나와 이병률 시인은 규슈 지역의 에키벤을 집중 취재했다. 일본에서는 지역별로 에키벤 콘테스트가 자주 열린다. 우리는 그중에서도 규슈 지역에 국한해 입상작을 중심으로 시식했다. 막 새로운 입상작이 발표된 시점이어서 일찍 동나는 바람에 어떤 에키벤은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2012년 규슈 에끼벤 그랑프리’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한 ‘사가규 스키야키 벤또’를 맛보는 박찬일씨
은어구이·고등어초밥·등심스테이크 … 대합실서 기다리는 2500가지

올해 규슈 에키벤 그랑프리는 지난 해 10월부터 12월까지 50개의 에키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거쳐 올해 1월 하순에 예선 투표를 실시했다. 다시 2월 11일에 JR 하카타 시티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투표, 2월 하순에는 저명인사와 기자들을 대상으로 시식 및 최종 투표를 실시해 최종 순위를 매겼다.

몇 가지 의미심장한 도시락이 있었다. 규슈에는 우리 도공의 혼이 서린 아리타(有田)마을이 있다. 조선의 도공 이삼평이 일본 최초의 백자를 구운 곳으로 유명하다. 이 지역의 에키벤은 대단히 파격적이었다. 사각의 전통적 패키지 대신 재활용할 수 있는 도자기 그릇(꽤 유려하고 쓸모 있다)에 잘 볶은 카레를 얹은 도시락이었다. 전형적인 일본의 카레라이스였지만 도자기 그릇에 담겨서 품격이 느껴졌다.

사가(佐賀)현의 불고기 도시락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 알려진 대로 메이지 유신 전까지 고기를 먹지 않았던 일본은 대대적인 육식 장려 정책을 편다. 유럽인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일본인의 체격과 체질을 육식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소불고기는 이즈음 한국의 요리법을 전해 받은 것이다. 달콤하게 양념한 일본 소불고기 덮밥이 우리 입에 익숙했다.

에키벤을 여러 개 먹다 보니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가 읽혔다. 바로 스토리의 강조와 지역 산물(로컬 푸드)을 적극적으로 쓰는 것이다. 요새 지역 산물에 스토리텔링을 덧입히려는 한국 지방자치단체들과 유사한 경우다. 이를테면 ‘영주님 도시락’이라는 히트 제품은 사실 별다른 구성은 아니다. 그러나 영주를 상징하는 가마 모양의 도시락을 만들어 시각적인 재미를 보여준 게 인기 요인이다.

도시락 안에 은어 한 마리가 누워 있다. 특급의 정성이 돋보이는 ‘은어삼대’ 에끼벤은 무엇부터 건드려야 할지 망설여진다. 기분으로 먹는 것이 도시락이니 그냥 기분 내키는 대로.

은어·가다랭이·흑돼지 … 대부분 지역특산물

로컬푸드는 그 자체로 스토리가 된다. 가다랭이가 많이 나오는 지역의 ‘가다랭이 낚시 도시락’이나 흑돼지로 만든 흑돼지 도시락은 맛도 맛이지만 지역의 재료에 시선이 꽂히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중에 은어로 만든 도시락이 있어서 신기했다. ‘은어삼대’라는 이름의 이 도시락은 구마모토(熊本)현에서 삼대째 대를 이어 운영하는 식당의 메뉴를 도시락화한 것이라고 한다. 은어 한 마리가 통째로 들어 있는 비주얼도 참신했고, 맛도 좋았다.

지역 산물을 맛있게 요리해서 주목을 받는 도시락 중에는 놀랍게도 생선회 도시락도 꽤 있었다. 초밥의 한 종류인 ‘치라시’ 에키벤은 물론이고 온갖 초밥 도시락이 흔했다. 쉽게 상해 선도 좋은 것을 먹기 어렵다는 고등어초밥도 자주 볼 수 있었다. 등푸른 고등어의 무늬가 차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무지갯빛으로 반사되는 장면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에키벤이었다.

에키벤의 미덕 중 꼭 언급하고 싶은 게 있다. 일본 음식에서 공통으로 발견하는 것이기도 한데 무엇보다 밥맛이 좋다는 점이다. 밥을 잘 짓고, 밥 자체의 맛이 좋은 품종을 쓴다. 반찬이 아무리 화려한들 밥이 맛없으면 무슨 소용일까.

(왼쪽) 고등어초밥, 스테이크가 올라간 도시락까지… 일본 도시락이 펼쳐 보이는 묘기의 끝은 어디까지일까. 카레를 도시락으로 먹다니. (가운데) 2위를 차지한 ‘아리타 야키카레 벤또’. 다른 도시락에 비해 조금 비싼 1500엔의 이 도시락은 계산을 하면 데워서 준다.그릇은 아까워서 버릴 수 없다. (오른쪽) 후쿠오카 하카타 역에서 판매하는 ‘이카 산마이’는 이름 그대로 오징어를 주재료로 한다. 3위를 차지했다.
몇 해 전 일본 산악지방을 기차로 달리는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단풍을 잘 감상하라고 차창을 낮게 내고, 바닥에는 다다미를 깐 기차를 탔다. 무엇보다 그 여행의 백미는 도시락이었다. 다다미에 앉아 차창 밖 풍경을 감상하며, 온갖 반찬이 오밀조밀하게 들어 있는 도시락을 먹다 보면 여행의 즐거움이 배가됐다. 도시락은 정성껏 차린 반찬들이 색깔과 기하학적 균형에 맞춰 배치돼 보기에도 감탄을 자아냈다.

내 손에 들린 도시락의 시각적 이미지 밖으로 단풍이 절정인 산허리가 배경처럼 흘러갔다. 이건, 정교하게 설계된 소우주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아니겠는가. 손바닥만 한 정원에 해와 달과 파도와 섬으로 우주를 꾸미는 일본인다운 형식미를 강조한 여행 상품이었다.

장거리 기차 여행은 먹는 즐거움을 동반하게 마련이다. 유럽의 오리엔탈 특급열차에서 동페리뇽 샴페인과 풀코스 정찬을 먹을 수 있고 일본인처럼 도시락 먹는 재미를 즐길 수도 있다. 우리에게도 열차여행의 기억이 있는데, 도시락보다는 가락국수일 것이다. 나는 부모님의 고향을 가던 중앙선 기차의 추억으로 가락국수 맛을 떠올린다. 원주역에서 빠듯한 정차시간 안에 한 그릇의 국수를 먹기 위해 승객들은 질주했다. 뜨거운 국물을 들이켜면서 국수를 밀어넣었다. 한국은 철도 대신 도로와 자가용 중심으로 교통체제가 개편되면서 그 가락국수조차 도태되고 말았다.

도시락은 그래서 가장 일본적인 풍경의 소도구다. 멋진 비즈니스 슈트를 입은 회사원이 도시락 비닐봉투를 들고 플랫폼에 서 있는 모습은 일본에서나 가능한 광경이다. 종종 주종이 뒤바뀌는 게 인간의 일상인데, 일본의 에키벤도 그렇다. 그들은 흔히 여행을 위해 에키벤을 먹는 게 아니라 에키벤을 먹기 위해 열차여행을 고대한다고 말한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일본인의 관습도 에키벤 앞에서는 양해되는 것 같다. 그들도 신칸센의 정결한 객차 안에서 음식 냄새 피우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왼쪽) ‘카시와 메시’는 4위를 차지했다. 닭뼈 육수로 지은 밥 위에 올린 닭고기와 지단, 김가루를 섞어 비비면 맛이 좋다. (가운데) 5위를 차지한 ‘오이타 타카라 치라시 스시 벤또’는 긴 형태의 도시락이 인상적이었는데 밥 위에 각종 스시를 올렸다. (오른쪽) 주먹밥 안에 유머를 넣었다. 간장조림 계란이 통째로.
하루키 『상실의 시대』 주인공도 도시락 데이트

본디 도시락이란 간소함의 상징이다. 한국의 정치인이 간혹 노타이 와이셔츠에 소매를 걷어붙이는 회의 광경을 노출시킬 때 빠뜨리지 않는 게 도시락이다. ‘도시락을 시키면서 장거리 회의를 거듭했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린다. 그 도시락이 호텔에서 만든 수만원짜리라는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도시락의 상징성은 그런 역설을 덮어버린다.

도시락에 숨겨진 함의는 그런 점에서 시종 혼란스럽다. 일본인은 에키벤도 모자라 시내의 식당에서 도시락을 사 먹는다. 그릇도 휴대성을 고려한, 반찬과 밥을 동시에 담을 수 있게 제작된 것을 쓴다. 마치 멀쩡한 방 놔두고 집 마당에서 텐트를 치고 버너를 피워 코펠에 밥 해먹는, 코스프레적 모방의 절정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출세작 『상실의 시대』에서도 주인공이 도시락 맛있는 집을 여자친구 미도리와 함께 찾아가는 대목이 나온다. 도시락의 미덕을 휴대성으로 이해하는 한국의 독자에게는 상당히 이국적인 묘사였다.

한때 한국의 일식당에서도 도시락을 팔았다. 탁자에 앉아 직원의 시중을 받으며 먹는 도시락의 미학을 얘기했다. 그러나 이제는 한국의 전통적인 일식당에서 도시락 메뉴를 찾아보기 힘들다. 각자의 음식을 각자가 먹는 도시락의 격리 지향의 태도는 우리에게 무언가 이질적인 음식문화가 아니었을까.

나는 어린 시절의 추억에 남아 있는 도시락을 잊지 못한다. 특히 운동회 도시락이 생각난다. 그늘도 없는 맨땅에 대충 돗자리를 깔고 식구들이 앉았다. 엄마가 힘겹게 준비한 도시락 찬합을 열면 자욱한 운동장 먼지 냄새와 햇빛의 분말들이 도시락에 날아들었다. 도시락은 내게 궁핍의 소년기를 분사하는 스크린이다. 소시지와 계란말이가 없는, 김치 한 쪽의 거친 도시락으로 남아 있다.

꽤 오래 망설이고,꽤 여러 번 집었다가 놓는 사람들.도시락의 종류가 많아서이기도 하겠지만 ‘그날의 분위기’에 따라 도시락도 선택될 것이다.
밥 가운데 매실 한 쪽, 히노마루 도시락의 추억

일본인에게 그것은 히노마루(日の丸) 도시락이다. 밥 가운데 달랑 한 쪽의 붉은색 매실 장아찌를 넣어 일장기를 닮았다는 정치적 확장이 내포된 그 도시락이다. 태평양전쟁 말기, 군부는 히노마루 도시락을 찬양함으로써 내핍의 덕목을 강조했다. 이 도시락은 절제와 가난의 이미지로 기억되며 비장미의 상징으로 살아남았다.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만화 『자학의 시』는 불행한 한 여인의 일대기를 다룬다. 호의호식하는 남편을 위해 헌신하는 그녀의 몫이 히노마루 벤토로 그려지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 나온 셈이다.

지금 일본에는 2500여 종의 에키벤이 팔린다. 히노마루 벤토부터 가이세키(會席) 요리를 압축해 놓은 것 같은 초호화 도시락까지 온갖 도시락이 기차역에서 손님을 기다린다. 일본은 전형적인 철도 국가다. 그들이 모범으로 삼은 유럽에서 들여온 철도는 동아시아 침략전쟁 시기에 군대와 함께 진주했을 정도다. 국철과 사철이 뒤엉키고, 긴 국토를 철도가 종횡으로 달린다. 그 여행의 행간에 에키벤을 동반하는 건 필수적이다. 탈아입구(脫亞入口)의 메이지유신으로 철도혁명을 이루었는데, 대나무를 얇게 켜서 만든 벤토에 오밀조밀한 우주를 구현해 놓고 즐기는 일본적 아이콘을 접목한 건 역시 일본인답다.

탈아입구의 종착역은 유럽이다. 그러나 유럽의 도시락 문화는 시종 간소함으로 이루어진다. 내가 이탈리아 요리학교에서 ‘소풍’을 떠났을 때 학교 측에서 준비한 도시락이란 고작 얇은 햄을 끼워넣은 마른 빵 한 덩어리였다. 도시락이라는 말이 주는 다채로운 반찬과 별미의 기대는 무참하게 무너졌다.

최근 개봉한 프랑스 영화 ‘자전거 타는 소년’에서도 유럽인의 도시락 취미가 살짝 드러난다. 위탁모와 주인공 소년은 자전거를 타고 강으로 피크닉을 간다. 영화를 통틀어 유일하게 희망과 웃음이 있는 장면이다. 그들은 강가에 자전거를 세우고 준비한 도시락을 먹는다. 소년이 도시락을 꺼내면서 말한다.

“치즈 넣은 거? 나는 참치 먹을래요.”

빵에 한 가지 속을 넣은 투박한 ‘도시락’을 먹으며 그들은 웃는다. 한국이나 일본의 감독 같으면 3단 찬합을 동원했을 장면을, 다르덴 형제 감독은 마른 빵 한 가지로 처리하고 만다. 그것도 흔한 치즈와 통조림 참치를 넣어서. 아마도 동서양의 차이 중 하나는 바로 이런 것일 듯하다. 도시락을 바라보는 정서의 차이 말이다.

나의 여행 이야기는 삼성카드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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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박찬일(음식 칼럼니스트)
사진=이병률(시인, 여행작가)

글=박찬일 1965년 서울 출생. 서울 홍익대 앞에 있는 이탈리아 식당 ‘라꼼마’의 오너 셰프다.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잡지사 기자를 하다 불쑥 이탈리아로 음식 유학을 갔다 왔다. ‘글 쓰는 요리사’ 또는 ‘요리하는 글쟁이’로 통한다. 『보통 날의 파스타』 『지중해 태양의 요리사』 『어쨌든 잇태리』 등의 책을 썼다. 남을 먹이는 일이 직업이기도 하지만 먹는 일에 대한 집요한 탐구정신으로 산다. 동시에 먹는 일에 대한 환멸을 갖고 있다.

사진=이병률 시인. 혼자 글 쓰고 사진 찍어 엮은 여행 에세이 『끌림』의 저자다. 2005년 출간된 『끌림』은 40만 부 이상 팔린 여행 에세이 최고의 스테디셀러다. 1967년 충북 제천 출생. 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찬란』 등을 냈다. 현대시학작품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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