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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고금통의 古今通義] 임진년의 기억

이덕일
역사평론가
선조 25년(1592), 임진년 4월 13일(음력). 임진란이 발생했다. 우리는 그간 일본이 ‘느닷없이 습격했다’고 가르쳐 왔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선조 23년(1590) 조선에서 통신사 황윤길(黃允吉)과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을 일본으로 보낸 것 자체가 일본이 실제 침략할 것인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통신사는 이듬해 봄 귀국하는데, 유성룡(柳成龍)은 『징비록(懲毖錄)』에서 “황윤길은 부산으로 돌아오자 시급히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고 전한다. 황윤길은 선조에게 복명(復命)할 때도 마찬가지로 보고했다. 그러나 조선의 군신(君臣)들은 “그러한 정세가 있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라는 김성일의 보고를 더 믿고 싶었다. 조사단장의 보고는 무시하고 부단장의 보고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장유(張維)가 쓴 『오억령(吳億齡) 묘지명』에 따르면 전쟁 발발 1년 전인 선조 24년(1591) 부산에 온 일본 사신 현소(玄蘇)를 접대했던 선위사(宣慰使) 오억령은 “일본이 내년에 쳐들어올 것”이라고 보고했다가 해임되었다. 『연려실기술』은 ‘이때 국사를 담당하는 자들은 왜병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한쪽 말만 주장했기 때문에 오억령을 교체시켰다’고 전하고 있다. 있는 현실은 외면하고 보고 싶은 허상을 현실로 믿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 경보가 계속되자 불안해진 조정은 신립(申砬)과 이일(李鎰)에게 지방 군기 검열을 맡겼다. 임란 발발 13일 전인 4월 초하루 신립은 왜군이 쳐들어올 경우의 대책을 묻는 유성룡의 질문에 “그것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6·25 남침 발발 두 달 조금 전쯤 육군참모장 채병덕(蔡秉德) 소장이 38선을 시찰하고 기자단과 만나 “우리 38선 경비 국군은 사기왕성하며 철통 같은 경비망을 치고 있으니 조금도 우려할 바는 아니다(‘자유신문’ 1950년 5월 14일)”라고 호언한 것은 이런 전철(前轍)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임란 때나 6·25 때나 개전 초기에 무너진 데는 이런 공통된 배경들이 있었다. 그나마 조선은 전란 이후에는 임진란을 잊지 않았다. 임진년이 돌아올 때마다 나라에서 이순신(李舜臣)·송상현(宋象賢) 등 순절 장수들과 임란 극복의 공을 세운 유성룡·윤두수(尹斗壽) 등의 가묘(家廟)에 승지 등을 보내 사제(賜祭)하게 했다. 1952년 임진년에는 대한민국 정부도 문교부 장관 백낙준(白樂濬)을 보내 임란 공신들의 제사를 모셨다.

올해에도 임진란 정신문화선양회를 중심으로 임란 당일인 6월 2일부터 각종 행사가 기획되고 있다. 과거를 잊는 자에게 재앙은 반복된다. 잊지 않아야 할 것도 세상에는 많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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