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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고금통의 古今通義] 태평성대

이덕일
역사평론가
『삼국유사(三國遺事)』 ‘처용랑(處容郞)과 망해사(望海寺)’조에는 번성했던 신라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신라 49대 헌강왕(憲康王 : 재위 875~886) 때 “경사(京師 : 경주)에서 해내(海內 : 울산 바다)에 이르기까지 가옥과 담이 연달아 있었으며 초가집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풍악과 노랫소리가 길거리에 끊이지 않았으며, 바람과 비는 철마다 순조로웠다”면서 태평성대를 묘사하고 있다.

 『삼국사기』 헌강왕 6년(880)조에는 “민간에서는 기와로 지붕을 덮지 띠로써 덮지 않으며 숯으로 밥을 짓지 나무로 짓지 않는다”는 기록까지 있다. 『삼국유사』는 이때 헌강왕이 현재의 울산광역시 외항강 하구에 있던 개운포(開雲浦)에 행차해 처용(處容)을 만났다고 전한다. 동해 용(龍)의 아들이라지만 처용은 용의 아들이 아니라 신라를 찾아온 서역인(西域人)일 것이다. 경주 괘릉(掛陵)의 서역인 형상 무인석이 말해주듯이 신라에는 많은 외국인들이 정착해 살고 있었다. 『삼국유사』는 ‘헌강왕이 미녀를 처용의 아내로 주어 그의 생각을 잡아두게 했으며, 또한 급간(級干)이란 관직도 주었다’고 전해서 신라가 귀화인에게 개방적인 사회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상인들은 ‘향약(香藥)의 길’이라고 불렸던 남해항로(南海航路)를 따라 중국 남부의 광주(廣州), 양주(楊洲)까지 왔다가 다시 신라까지 왕래했다. 경주 천마총에서 출토된 보물 620호 유리잔(琉璃杯)을 비롯한 여러 이국적 물품들은 이런 국제교역이 활발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신라인들도 해외로 진출했는데, 일본의 구법승 원인(圓仁)이 신라 민애왕 1년(838년)부터 문성왕 9년(847년)까지 약 9년간 중국의 해안과 내륙을 여행하고 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의 등장인물 절반 이상이 신라인들이다.

 당나라 해안지역인 등주(登州), 양주, 초주(楚州) 등지에 신라인 집단거류지인 신라방(新羅坊)이 있었던 것이 신라인들의 해외진출 사례를 말해 준다. 헌강왕 6년 신하들은 만사가 순조롭다면서 이것이 모두 “성덕의 소치”라고 말하는데, 불과 9년 후인 진성여왕 재위 3년(889) 대규모 농민봉기가 일어나 신라는 나락의 길로 접어들고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만다.

 헌강왕 때의 태평성대는 경주와 울산 등 수도 지역에 국한된 번영이었지 지방은 그렇지 않았다는 뜻이다. 울산의 1인당 국민소득이 4만 달러가 넘는다. 최근 울산의 한 방송사 초청강연회에 다녀오면서 신라 헌강왕 때의 기록과 현재 울산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소수에게 재화가 집중된 태평성대는 그리 길 수 없다는 평범한 교훈을 역사는 전해 준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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