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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사랑이냐, 불행한 안정이냐(Timor)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 실내복 차림으로 경쾌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시몽을 떠올리고는 그를 원래의 그 자신에게로 돌려보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를 영원히 보내버림으로써 잠시 슬픔에 잠기게 했다가, 예상컨대 앞으로 다가올 훨씬 멋진 수많은 아가씨들에게 넘겨주고 싶었다. 그에게 인생이라는 걸 가르치는 데에는 시간이 자신보다 더 유능하겠지만, 그러려면 훨씬 오래 걸리리라. 그녀의 손 안에 놓인 그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에서 맥박이 파닥이는 것을 느끼자 그녀는 갑자기 눈에 눈물이 고였는데, 그 눈물을 너무도 친절한 이 청년을 위해 흘려야 할지, 아니면 조금쯤 슬픈 그녀 자신의 삶을 위해 흘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자신의 입술로 가져가 키스했다.”

폴의 눈, 서른아홉의 나이를 짐작할 수 있는 약간 주름 잡힌 여인의 눈에서 눈물이 연신 흐른다. 그녀는 한때 자신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젊은 청년 시몽과의 사랑을 접으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고 물으며 자신의 삶을 장밋빛으로 물들여 주었던 사람과 헤어진다는 것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아마 이 부분이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가장 애틋한 장면일 것이다. 두 명의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던 폴은 지금 자신의 삶에 빛을 안겨 주었던 시몽을 떠나 6년 동안 사귀었던 바람둥이 로제에게 돌아가려고 마음먹은 것이다. 물론 그녀는 알고 있다. 자신이 시몽에게 빠져 있는 걸 견디기 힘들어하는 로제지만 시몽을 버리고 그에게 돌아가는 순간 그는 다시 자신을 외로움에 방치하리라는 사실을.

그렇지만 폴은 두려운 것이다. 시몽은 너무나 젊지만 자신은 점점 더 늙어 갈 것이고, 언젠가 시몽은 자신에게서 어떤 매력도 발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반면 로제는 지금처럼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며 자신을 외롭게 해도 자기 곁에 가구처럼 있을 것이다.

그렇다. 폴이 진정으로 두려워했던 것은 바로 미래다. 영원히 홀로 남겨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그녀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익숙한 삶을 떠나 시몽을 선택하면 잠시 행복하겠지만 머지않아 버림받을지도 모른다. 로제를 선택하면 지금은 불행할 수 있지만 버려질 위험은 별로 없다. 그녀는 사랑의 위험을 감당하기에 너무나 소심했던 것이다. 불안한 사랑보다는 불행한 안정에 손을 들어준 것이 어쩌면 자연스러워 보인다. 스피노자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소심함(timor)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큰 악을 더 작은 악으로 피하려는 욕망이다.”(『에티카』)

스피노자에게 선과 악은 우리와 무관하게 절대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기쁨과 활력을 주는 것이 선이고, 슬픔과 우울함을 안겨다 주는 것이 악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폴의 비극은 그녀가 간만에 찾아온 사랑이 주는 현재의 기쁨을 긍정하지 못하고 시몽과의 사랑이 가져다줄 수도 있는 불안한 미래에 사로잡혀 있다는 데 있다. 그러니 시몽과의 사랑이 로제와의 쓸쓸한 삶보다 더 큰 악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어쩌면 폴은 사랑의 충만함보다 홀로 버려져 있다는 외로움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여성일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 시몽과의 이별을 결정하면서 폴의 눈에서 흘렀던 눈물의 의미다.

만일 자신의 결정이 행복을 선택한 것이었다면 폴의 눈물은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도 자신의 결정이 소심함으로부터 연유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당연히 그녀는 사랑 앞에서 위축되는 자신의 모습이 몸서리쳐지게 싫었을 것이다. 홀로 버려질 수도 있다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공포 때문에 현재 만끽할 수도 있는 사랑을 포기하는 자신이 너무나 불쌍했던 것 아닐까? 그러니 폴도 이렇게 느꼈던 것이다. “그 눈물을 너무도 친절한 이 청년을 위해 흘려야 할지, 아니면 조금쯤 슬픈 그녀 자신의 삶을 위해 흘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고 말이다. 마치 시몽의 미래를 위해 헤어지기로 결심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녀는 사랑을 감당할 만한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사강이 폴의 슬픈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하려고 했던 말은 사랑이란 용기 있는 자만이 감당할 수 있다는 진실 아니었을까? 50대 나이에 마약 복용 혐의로 법정에 섰을 때 사강은 우리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자기 파괴의 위험을 감당하며 사랑의 모험에 과감히 뛰어들지 않으면 순간적으로는 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편리한 안일함은 우리의 삶을 무기력하고 무겁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결국 아주 천천히 우리의 삶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파괴돼 갈 것이다. 그래서 사강은 우리에게 외치고 있는 것이다. 타자로의 맹목적인 비약에 어떻게 위험이 없을 수 있겠느냐고.

매너리즘에 빠진 자신의 삶과 단절해 마치 천 길 낭떠러지가 입을 벌리고 있는 심연을 건너뛰려는 용기가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사랑의 꿀맛을 맛볼 희망을 가질 수 있겠느냐고.



대중철학자. 『철학이 필요한 시간』『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상처받지 않을 권리 』 등 대중에게 다가가는 철학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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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