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백인 애가 내 엉덩이에 오줌갈겨 그 뒤…"






























권율(37)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워싱턴특파원으로 일하던 2010년 5월이었다. 미국 CBS의 리얼리티 쇼 ‘서바이버(Survivor)’에 출연해 100만 달러를 거머쥔 동양인 최초의 우승자를 인터뷰하기 위해서였다. 그를 만나기 전에 했던 생각은 단순했다.

권율씨는 2006년에 미국 CBS의 리얼리티 쇼 ‘서바이버(Survivor)’에 출연해 100만 달러를 거머 쥔 동양인 최초의 우승자다. 그는 운동으로 다져진 단단한 근육질 몸매를 지녔다. [중앙포토]
‘서바이버’에서 본 그의 매끈한 근육질 몸매와 스탠퍼드대·예일대 로스쿨로 이어지는 환상적인 학력을 떠올리면서 그가 얼마나 잘났는지-특히 유전적으로-에 관해 쓰면 되지 싶었다.

그런데 그를 만나고 나서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자신의 삶에서 제일 중요한 가치는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이고, 두 번째는 무언가 자신에게 있어 흥미로운 일을 하는 것이며, 한 다섯 번째쯤 가야 돈을 버는 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리고 그 말이 진정으로 우러나온 얘기였음이 느껴졌을 때 기자의 선입견은 봄볕에 눈 녹듯이 녹아 버렸다. ‘아 이 친구는 대충 잘난 사람이 아니구나’.

기자로서가 아니라 ‘내 인생의 가장 화려한 날은 아직 내 앞에 남았으리라’고 철석같이 믿는 40대 청춘으로서, 점차 버거운 삶의 무게를 느끼게 되는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 권율이라는 사람에게 매력을 느꼈다.

이후 그를 20여 차례 만났다. 워싱턴 주변의 한국 식당에서, 빵집에서, 찻집에서, 때로는 갓 태어난 딸 세원이가 방긋 웃고 있는 그의 집에서…. 만날 때마다 기자는 그의 ‘반듯한 이중성’에 놀랐다. 그는 예의 바르면서도 솔직했고, 겸손하면서도 진취적이었다.

특히 기자를 탄복시킨 것은 권율의 그 반듯하고 잘난 모습이 타고난 게 아니라 대부분 치열한 노력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점이었다. 그를 만나고 돌아온 날이면 기자는 마치 이야기꾼이라도 된 것처럼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아이를 밥상머리에 앉혀 놓고 권율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딸아, 세상은 이렇게 살 수도 있는 거다’.

 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 책을 써보라고 했다. “아이, 제가 뭐라고요.” 그는 고민했다. 지나온 삶을 이야기하기엔 너무 젊다고 했다. 그는 그러나 결국 기자의 설득을 받아들였다. 그의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많이 어렵다는데, 내 이야기가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된다면, 또 자극제가 된다면, 책을 내는 것도 괜찮겠네요.” 드디어 그가 『나는 매일 진화한다』(중앙북스)라는, 그의 삶에 꼭 맞는 제목의 책을 들고 지난 13일 한국 땅을 밟았다. 16일 낮 오랜만에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그를 만났다. 아주 반갑게.


●출간을 축하한다.

 “고맙다. 많은 분이 격려해 주니 기분이 나쁘지 않다”(웃음).

●사람들이 책 내용에서 뭘 제일 관심 있어 했나.

 “그게 정말 의외였다. 출판 기자들을 포함해 만난 모든 사람의 가장 큰 관심은 서바이버 우승기나 예일대 로스쿨 합격기, 맥킨지·구글 취업기 이런 게 아니었다. 온갖 강박증에 시달렸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었다.”

●지금 당신의 겉모습에서 유약했던 옛날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으니 더 그랬을 것 같다.

 “나는 선천적으로 겁이 많은 데다 콤플렉스 덩어리였다. 늘 실패를 두려워했다. 선생님을 실망시킬까 봐, 친구들로부터 따돌림당할까 봐, 심지어 이런 내 모습을 다른 사람이 알아챌까 봐 전전긍긍했다. 초등학교 시절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있는데 백인 친구 녀석이 내 뒤에 서서 내 엉덩이에다 오줌을 갈겼다. 그 뒤로 나는 공중화장실을 제대로 가지 못했다. 남 앞에 서면 엉덩이에서부터 땀이 비 오듯 흘러 수건을 덧대야 했다. 손을 하루 20번이나 씻어야 했고, 사람들의 눈을 피하려고 땅만 보고 다녔다. 중학교 시절까지 내겐 세상 모든 것이 두려움이었다. ‘B.B 베어’라는 이름의 곰 인형이 유일한 내 친구였다.”

●경이로운 당신 인생의 반전은 어디서부터 시작됐나.

 “깊은 우울감에 빠져 있던 중학교 1학년 때, 내가 잘 따랐던 다섯 살 위의 형 친구 팀이 자살했다. 그때 바로 내가 팀이 걸었던 비극적인 길을 그대로 걷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지금처럼 자신감 없는 우울한 삶을 살든지, 아니면 스스로 불안감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고 조금씩 문제점을 개선해 나가는 삶을 살든지.”

●생각은 쉬워도 습관을 고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맞다. 지금껏 내가 편하게 안주하던 곳에서 벗어나 지금껏 나를 두렵게 만든 모든 것과 정면승부를 벌여야 했으니까. 나는 두 가지 결심을 했다. 첫째로 이미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내 본능에는 절대 따르지 않겠다. 그 반대로 가겠다. 둘째로 주어진 상황에서 갑자기 판단하려 하면 다시 충동적으로 본능에 의지할 가능성이 크니 미리 나만의 규칙을 만들어 놓고 반드시 지킨다. 나는 공책을 펼쳐놓고 내가 가장 부족한 부분을 생각했다. ‘어떤 수업시간이라도 반드시, 아무 조건 없이, 시작한 지 5분 안에 손을 들어 무언가를 말한다’ 이게 나의 첫 규칙이었다.”

●그렇지만 하루아침에 규칙을 지킨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아버지가 원래 규율을 중시했다. 그러니 배운 게 있었다. 그리고 형이 내게 큰 깨달음을 줬다. ‘마음이 먼저일까? 행동이 먼저일까?’ 이 질문을 내게 던졌다. 자신감이 없어도 자신감 있는 사람처럼 행동해 보기로 한 거야. 또 한 가지 내 삶의 변화에 큰 도움을 준 것은 운동이었다. 나는 공부 말고 내가 잘하는 게 있는 줄 몰랐다. 열심히 하다 보니 내가 고등학교 육상부와 수구부 대표팀에 뽑혀 있더라.”

●당신 인생에서 백혈병으로 숨진 친구 에반 이야기를 빼놓을 순 없겠다.

 “중국계인 에반은 나의 중·고·대학 절친이었다. 그가 백혈병에 걸린 소식을 알았을 때 나는 스탠퍼드대를 거의 다니지 않으면서 골수 기증 캠페인을 하러 다녔다. 두 달 동안 하루에 두 시간만 잤다. 그런데 미국 사회는 동양인의 고통을 잘 알아주지 못했다. 그때 나는 변호사가 돼서 남을 돕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서바이버에 나간 것도 한국인, 그리고 동양인에 대한 미국 사회의 편견을 깨뜨리고 싶어서였다. ‘봐라, 우리 한인들도 이렇게 리더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다.”

●그렇다고 에반 일 때문에 해병대 장교 캠프에 들어간 것은 일종의 자학(自虐) 아니었을까.

 “내 몸에 있는 모든 에너지를 써버린 것 같았다. 나에겐 뭔가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다. 아버지가 무척 반대했지만, 해병대에서 배운 것도 많고 적응도 잘했다. 상관이 진지하게 ‘짱 막으라’고 권유할 정도로”(웃음).

●하버드도 합격했는데, 왜 스탠퍼드를 갔나.

 “결정하기 전에 하버드를 가봤지. 나처럼 소심한 공붓벌레가 많은 것 같았다. 반면에 스탠퍼드는 실리콘밸리가 옆에 있어서인지 보다 진취적인 느낌이었다. 나는 명성보다 내게 보다 많은 것을 줄 수 있는 곳을 택한 거다.”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한 로펌 변호사, 맥킨지와 구글의 전략 컨설턴트, 조 리버먼 상원의원 입법 보좌관, 연방통신위원회(FCC) 부국장 등 당신의 경력은 너무나 화려하다. 미국 공영 TV 프로그램의 호스트를 지내기도 했고. 그런데 왜 자주 직업을 바꾸는 건가.

 “나는 나 자신에게 더 많은 스토리가 있을수록, 더 많은 경험을 할수록 삶은 풍요로워질 거라고 믿는다. 예를 들어 맥킨지에서 나는 ‘80/20’ 규칙을 배웠다. 경영진단과 결정을 내리는 데는 80%만 맞으면 충분하다. 세세한 법률 분쟁을 다루는 로펌에서는 100% 준비가 끝나야만 행동에 돌입하는 걸 습득했다. 의회에서는 정치의 기술이랄까,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일하면서 설득과 양보, 추진력과 조정 능력을 적절히 배합하는 기법을 배웠다. 이런 게 아직 젊은 나의 미래에 도움이 될 거라고 믿는다.”

●그럼 당신의 종착역은 어디인가.

 “나도 모른다(웃음). 방송 일을 계속할지, 아니면 다시 공직에서 일할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꿈이 있다면 미국 최초의 한국계 대통령을 만드는 거다. 구체적으론 대통령 비서실장이라고 해도 좋고. 남 앞에 서서 한 분야를 지휘하는 것보다 뒤에서 조용히 조정을 이끌어 내는 일이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다. 내가 지금껏 가꿔온 경험을 살리면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메타 리더(meta-leader)라는 말을 쓰는데, 당신이 꿈꾸는 리더의 이상형인가.

 “그렇다. 앞서 말한 대로 나는 타고난 ‘루저(loser)’였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나를 보고 리더라고 한다. 나로선 깜짝 놀랄 일이다. 나는 이상적인 리더란 다양한 상황과 그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빠르게 적응하고 발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다 자신을 앞세우기보다 남을 돕는 소중한 원칙과 가치를 덧붙이면 이 시대 최고의 메타 리더가 되는 거다.”

●정말로 당신한테는 돈이 중요하지 않은 건가.

 “한 번도 돈을 벌기 위해 선택을 해본 적이 없다. 서바이버에 나가지 않고 구글에 계속 있었더라면 지금쯤 백만장자가 돼 있겠지. 맥킨지의 유럽 지역 고위 간부 대저택에 초대받은 적이 있었다. 그 간부에게 후회한 적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5분쯤 침묵하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면서 ‘어느 날 출장갔다 와 보니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갔다. 내가 가족에게 너무 소홀했어’라고 말했다. 훗날 사람들이 빌 게이츠를 어떻게 기억할까. 마이크로소프트를 일군 백만장자일까, 아니면 전 세계 빈곤층을 돌본 박애주의자일까. 나는 후자라고 본다.”

 점심을 마치고 기자와 그는 미국식으로 포옹했다. 그리고 훗날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다. 그때쯤 권율은 무엇이 돼 있을까. 이런 궁금증을 갖는 것도 매일 진화하는 사람을 친구로 둔 즐거움이다.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중앙일보 핫 클릭

PHOTO & VIDEO

shpping&life

뉴스레터 보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 군사안보연구소

군사안보연구소는 중앙일보의 군사안보분야 전문 연구기관입니다.
군사안보연구소는 2016년 10월 1일 중앙일보 홈페이지 조인스(https://news.joins.com)에 문을 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https://news.joins.com/mm)를 운영하며 디지털 환경에 특화된 군사ㆍ안보ㆍ무기에 관한 콘텐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연구소 사람들
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