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서소문 포럼] 자기 혁신은 진보 정당의 의무다

채인택
논설위원
프랑수아 올랑드 신임 프랑스 대통령이 취임식 당일인 지난 15일 오후(현지시간) 독일을 찾은 것은 놀라운 일이다. 공약인 ‘성장’을 이루려면 유럽의 돈줄을 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협조가 절실했고 그리스 사태를 비롯한 유로존(유로화를 쓰는 나라들) 위기도 시급히 논의할 필요성이 있긴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콧대 높은 프랑스의 대통령이 취임식 날 이웃나라로 날아간 것은 의외다. 독일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유럽의 맹주 자리를 꿰차고 있음을 새삼 확인해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독일은 어떻게 이리도 강한 나라가 됐을까.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직접적인 것으로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1998~2005년 집권) 당시의 과감한 사회개혁이 거론된다. 슈뢰더는 실업수당·연금·건강보험 등 사회보장을 대대적으로 개혁해 과도한 재정 부담을 줄였다. ‘아겐다 2000’ 개혁 프로그램이다. 이렇게 허리띠를 졸라매고 미리 대비한 결과 재정위기를 막아 지금 큰소리를 칠 수 있게 됐다.

 복지를 줄이고 재정 건전성을 강화한 슈뢰더는 아이로니컬하게도 독일 진보세력을 대표하는 사회민주당 소속이다. 이 정당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8명의 독일 총리 중 빌리 브란트(69~74), 헬무트 슈미트(74~82), 게르하르트 슈뢰더(98~2005) 등 3명을 배출하며 20년간 제1당으로 집권했다. 연립정부 참가를 포함, 25년 이상 국정을 책임져 왔다. 그런데 19세기에 생긴 이 정당은 20세기 초 합리적인 사회민주주의를 받아들였지만 근본적으론 혁명을 통한 자본주의 타도를 추구했다. 이 때문에 나치 시절 대대적인 탄압을 받아 지도부는 망명했고 남은 당원들은 강제수용소에 잡혀가거나 지하에 숨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풍찬노숙을 마치고 간신히 당을 재건하자 이번에는 국민으로부터 외면을 당했다. 동서분단 속에 소련의 실상을 알고 있는 유권자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외치는 이념 정당에 고개를 돌리면서 49, 53, 57년 총선에서 연거푸 패배했다. 고민에 빠진 지도부는 59년 11월 당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바꾸는 대혁신을 결의했다. 온천도시인 바트고데스베르크라는 곳에 모여 당 개혁안인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채택했다. 핵심은 마르크스주의 폐기였다. 계급투쟁, 주요 산업의 국유화, 계획경제 등 비현실적인 소련식 정책을 모두 버렸다. 대신 진보의 본질인 인권보장·기회평등·사회정의·세계평화, 그리고 노동자 복지를 앞세웠다. 국유화 대신 산업 발전을 지원해 국가경제를 키움으로써 노동자 임금과 복지를 향상하기로 진로를 수정했다. 시대착오적인 혁명 이데올로기를 내다 버리고 그 자리를 시대정신과 국민요구로 대체한 셈이다. 사민당은 이렇게 당의 정체성과 방향을 완전히 국민 눈높이에 맞춘 대중정당으로 거듭났다.

 그러자 골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떠나면서 국민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선거를 통해 집권하는 길도 열렸다. 66년 연립정부에 참여한 데 이어 69년 제1당으로 드디어 집권에 성공했다. 사민당 지도자로 총리에 오른 빌리 브란트는 도덕적 리더십으로 국제사회에서 진보 정치인의 위상을 높였다. 이런 성공적인 진보의 뒷다리를 잡은 것은 소련에 충성하는 동독의 간첩망이었다. 74년 비서 귄터 기욤이 동독 스파이로 드러나면서 브란트는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하지만 사민당은 국민 지지를 잃지 않아 82년까지 집권할 수 있었다.

 98년 슈뢰더가 ‘새로운 중도’ ‘좌파 속의 우파’라는 기치 속에 독일판 제3의 길을 들고 나와 7년 집권에 성공한 것도 국민 눈높이에 맞춰 자신을 혁신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은 사민당 전통 때문이라는 평가가 많다. 지금은 비록 야당이지만, 사민당의 합리적인 자세는 책임 있는 진보가 가야 할 길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진보정당에서 자기 혁신을 하는 것은 기본적인 책임이자 의무다. 특히 버려야 할 것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 권력이 총 끝도, 당원도 아닌 국민에게서 나오는 민주국가에서는 더더욱 그래야 한다. 한국의 진보정당에 드리는 말씀이다.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중앙일보 핫 클릭

PHOTO & VIDEO

shpping&life

뉴스레터 보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 군사안보연구소

군사안보연구소는 중앙일보의 군사안보분야 전문 연구기관입니다.
군사안보연구소는 2016년 10월 1일 중앙일보 홈페이지 조인스(https://news.joins.com)에 문을 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https://news.joins.com/mm)를 운영하며 디지털 환경에 특화된 군사ㆍ안보ㆍ무기에 관한 콘텐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연구소 사람들
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