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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고금통의 古今通義] 귀농

이덕일
역사평론가
고향이나 향리로 돌아가 농사짓는 것을 귀농(歸農)이라고 한다. 퇴촌(退村) 또는 둔촌(遁村)도 같은 뜻인데, 퇴촌이나 둔촌에는 혼란스러운 세상을 피해 은거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경기도 광주시에 퇴촌면이 있다. 조선 후기 문신 성해응(成海應)은 ‘신라·고려 유민전(羅麗遺民傳)’이란 글에서 고려 말 왕(王)씨·백(白)씨 성을 쓰는 두 상서(尙書)가 혼란을 피해 이주하면서 생긴 지명이라고 전했다. 둔촌도 고려 말기 인물 이집(李集)의 호다. 이집은 공민왕 때 신돈(辛旽)을 공격하다가 되레 화를 입게 되자 경상도 영천(永川)으로 피했다가 신돈이 주살되자 돌아갔다. 그가 피신했던 영천에 둔촌동이란 마을이 생겼다고 전해진다.

 올해 탄신 250주년을 맞는 다산 정약용의 자(字), 즉 아명(兒名)이 귀농이다. 정약용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불귀의 객이 된 지 24일 만인 영조 38년(1762) 6월 16일 경기도 광주시 마재에서 태어났다. 부친 정재원은 사도세자를 지지하는 시파 쪽에 섰다가 세자가 살해되자 귀향해 정약용의 자를 귀농(歸農)이라고 지은 것이다. 조정을 떠나 농촌에 묻혀 살겠다는 뜻과 정약용도 당쟁에 연루되지 않는 삶을 살기를 바라는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귀농과 퇴촌·둔촌 등은 모두 혼란스러운 정치세계를 피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이는 지배층의 경우고 피지배층에게 귀농은 농사를 북돋운다는 의미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귀농(歸農)은 주로 놀고먹는 백성들을 농촌으로 보내 일을 시킨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삼국사기』는 신라의 소지(炤知) 마립간(麻立干)이 재위 11년(489) 봄 정월에 ‘놀고먹는 백성들을 몰아서 귀농시켰다’고 전하고 백제 무령왕(武寧王)도 재위 10년(510) 봄 정월 제방을 튼튼하게 고치고 안팎에서 일하지 않고 놀고먹는 유식자(<9030>食者)를 몰아서 귀농시켰다고 전하고 있다.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 등에는 귀농이 주로 군역이나 부역 등에 끌려 나온 백성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농사짓게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대일항쟁기 때는 귀농이 민족 해방운동의 일환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일제가 설립한 동양척식회사 등이 영세 농민들의 농지를 대거 획득하면서 몰락한 농민들은 만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도회지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농촌으로 들어가 농민운동을 전개한 것이 귀농운동이었다.

 최근 귀농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 현재의 귀농은 인간을 수단으로 보는 극도의 물질문명에 대한 대안으로 생태적 삶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과거의 귀농과는 다르다. 생태적 생활이 웬만한 도시인들도 선뜻 선택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의 형태로 자리 잡을지 궁금하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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