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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화를 지연시키는 최상의 '젊음의 모약'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단발머리를 영어로는 보브컷(bob cut), 프랑스어로는 ‘잔 다르크 컷’이라고 한다. 잔 다르크는 단발머리 원조다. 이처럼 의외의 장소와 영역에서 잔 다르크의 발자취가 발견된다.

올해는 잔 다르크 탄생 600주년이 되는 해다. 그는 중세 말 인물이다. 민족주의의 도래가 한참 많이 남은 시대였다. 잔 다르크가 프랑스를 구하는 과정에서 ‘애국·애족의 정신’이 프랑스에서 싹텄다. 프랑스의 민족주의 사학자 쥘 미슐레(1798~1874)는 이렇게 말했다.

“잔 다르크가 프랑스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프랑스도 스스로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보면 잔 다르크는 ‘시원적 민족주의자(proto-nationalist)’다.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유럽으로 퍼져 나가고 결국 전 세계로 확산된 민족주의의 뿌리에 잔 다르크가 서 있다.

잔 다르크가 실제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 수 없다. 시대상에 따라 잔 다르크는 풍채 좋은, 여성적인, ‘보이시(boyish)’한 모습 등으로 계속 다르게 그려졌다.

유럽통합의 상징이자 분열의 씨앗

잔 다르크는 프랑스에서 정체성과 통합의 상징이다. 그를 유럽 통합의 상징으로 격상시키려는 움직임도 있다. 그는 분열의 씨앗이기도 하다. 올해 프랑스 대선에서 중도 우파 니콜라 사르코지 후보와 극우파 마린 르펜 후보는 잔 다르크의 정치적 유산을 서로 차지하려 신경전을 벌였다.

르펜의 국민전선은 잔 다르크가 6세기 전 ‘불법이민자들’인 영국인을 프랑스에서 몰아낸 것처럼 오늘의 불법이민자들도 고향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당 정치인으로 총리를 지낸 바 있는 미셸 로카르도 끼어들어 일침을 가했다. 잔 다르크가 이끈 병력 4000여 명에서 3분의 1은 외국인이었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엔 비시 괴뢰정부와 레지스탕스 세력 모두가 잔 다르크를 승리를 위한 아이콘으로 삼았다. 샤를 드골 대통령은 ‘잔 다르크 콤플렉스’에 빠져 있었다. 잔 다르크처럼 프랑스를 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으며 잔 다르크의 환생으로 행세했다.

프랑스대혁명 이후에는 왕당파와 공화파 양쪽 모두 잔 다르크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특히 왕당파는 ‘자유의 여신 마리안(Marianne)’을 내세우는 공화파에 잔 다르크라는 맞불을 놨다.

오늘날에도 잔 다르크 모시기 경쟁은 치열하다. 좌파는 그가 ‘농민의 딸’이기에 좋아하고, 종교 성향이 강한 우파는 그가 순결 등 전통적 가치를 표상하는 가톨릭 성녀이기에 좋아한다. 일찍이 미국 여성 참정권자들은 잔 다르크를 전면에 내세웠다.

잔 다르크는 여자도 전쟁에서 싸울 수 있고 리더십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인물이었다. 잔 다르크를 내세우는 금연운동단체가 있는가 하면 잔 다르크와 소통이 된다고 주장하는 영매들도 있다.

‘가톨릭교회의 장녀’라고도 불리는 프랑스에서 잔 다르크는 수호 성인 중 한 명이다. 미테랑·시라크·사르코지 등 프랑스 대통령들에겐 잔 다르크를 찬양하는 게 일종의 업무이자 선거 승리를 위한 필수 레토릭 전략이다.

프랑스 전역에 수만 개의 잔 다르크 동상이 있다. 거의 모든 프랑스 도시에 잔 다르크라는 이름의 거리나 광장이 있다. 파리국립도서관에는 잔 다르크에 대한 책이 2만 권이 넘는다. 그러고도 모자라 매년 잔 다르크에 대한 책이 50권씩 나온다.

그는 셀 수 없이 많은 영화·연극·음악의 소재가 됐다. 베르디와 차이콥스키는 오페라를, 조지 버나드 쇼는 희곡을, 마크 트웨인은 잔 다르크에 대한 전기(1896년)를 남겼다. 특히 『허클베리 핀』으로 유명한 트웨인(1835~1910)은 가톨릭도 프랑스도 싫어했으나 유독 잔 다르크에게 열광했다. 그에 대해 10여 년간 연구하다 결국 전기까지 썼다. 그가 잔 다르크에 집착한 이유는 미국 문학사에서 자그마한 퍼즐이다.

잔 다르크를 상징하는 ‘로렌의 십자가’가 중앙에 있는 레지스탕스의 프랑스 국기.
1920년 5월 16일 잔 다르크는 가톨릭 성인이 됐고 우연히도 같은 해 8월 18일 미국은 여성들에게 참정권을 인정했다. 잔 다르크는 1920년대 이후 미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인물이 됐다.

멕시코의 크리스테로 전쟁(1926~29)에서 1917년 멕시코 헌법에 의한 가톨릭 탄압에 저항하는 가톨릭 여성들은 ‘멕시코의 잔 다르크’로 싸웠다. 유관순을 서양 사람들에게 설명할 때 ‘한국의 잔 다르크’라고 설명하면 쉽게 이해한다. 20세기에 잔 다르크는 전 세계적 위인이 된 것이다.

잔 다르크의 인생에는 그를 ‘내 편’으로 만들고 싶은 숭고한 드라마가 있다. 17세에 집을 떠나 19세에 사망한 잔 다르크의 인생은 극적이었다. 그는 백년전쟁(1337~1453)의 와중에 태어났다. 백년전쟁은 프랑스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포함해 여러 문제를 놓고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벌인 전쟁이다. 태어난 곳은 농촌의 작은 마을 동레미였다. 오늘날에도 인구가 200명에 불과한 마을이다. 1412년 1월 6일생으로 돼 있으나 후세 사람들이 지정한 생일이다.

12세였던 1424년부터 그에게 이상한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대천사 미카엘, 성 카테리나, 성 마르가리타의 음성은 그에게 신(神)의 메시지를 전했다. 프랑스 북부를 차지하고 있던 영국군을 몰아내고, 아직 대관식도 못 올리고 있던 왕세자 샤를(1403~61)을 왕으로 삼으라는 것이었다.

잔 다르크가 들은 신의 음성의 ‘원인’에 대해서는 간질·결핵·정신분열증·편두통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당시 ‘처녀가 프랑스를 구한다’는 예언이 있었다. 잔 다르크가 그 전설을 들으며 자랐는지도 모른다. 잔 다르크가 등장하자 민(民)은 예언 성취에 열광했을 수도 있다.

1429년 17세인 그는 샤를을 만났다. 신하들 사이에 끼어 있었으나 잔 다르크는 그를 단번에 알아봤다. 어떻게 설득했는지 알 수 없으나 샤를의 허가를 받아 투르에 가서 군대를 모집했고 4월 30일 오를레앙에 입성해 영국군을 몰아냈다. 그는 7월 14일 샤를의 대관식에 감격스럽게 참석했으며 샤를은 그를 12월 29일에 귀족으로 만들어 줬다.

마크 트웨인, 연구하다 반해 전기 집필

잔 다르크 군대의 모토는 ‘예수·마리아’였다. 그는 백병전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화살이 박히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군대는 그가 있는 것만으로도 사기가 충천했다. 수십 년 동안 영국군에 지는 게 습관이었던 프랑스군의 놀라운 변화였다.

불패 신화를 쌓아 가던 잔 다르크였지만 1430년 5월 콩피뉴 전투에서 부르고뉴 사람들의 포로가 됐다. 부르고뉴는 영국과 결탁한 지방이었다. 부르고뉴는 금화 1만 냥을 받고 잔 다르크를 영국에 넘겼다. 잔 다르크는 영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루앙의 가톨릭교회 법정으로 넘겨졌다. 14개월간 혹독한 신문을 받았다. 이단·주술 등 12개 죄목이 그에게 덧씌워졌다. 재판에 추기경 1명, 주교 6명, 신학자 32명이 동원됐다.

신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은 물론이고 남자 복장을 하고 다닌 것도 죄였다. 교회 입장에서는 잔 다르크가 교회를 통하지 않고 신의 음성을 직접 들었다는 게 난감했다. 성직자들을 통하지 않고 신과 직접 소통했다는 점에서 그를 시원적 개신교 신자(proto-Protestant)로 평가하는 견해도 있다.

잔 다르크는 문맹이었으나 똑똑했다. 재판관들은 그를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 “신의 은총을 받았는가”라고 물었다. 교리상으로 신의 은총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불확실한 게 정답이었다. ‘예’ ‘아니요’ 모두가 그를 단죄할 근거가 될 수 있었다. 잔 다르크는 이렇게 대답했다. “받지 않았으면 은총을 받기 바라며, 받았으면 신께서 은총을 유지해 주시길 바란다.” 신학자들은 그의 총명함에 경악했다.

1431년 5월 30일 잔 다르크는 루앙의 구시장(舊市場) 광장에서 화형당했다. 19세였다. 죽기 전 “예수”라고 외쳤다. 불에 탄 시신의 옷을 벗겨 공개했다. 당시 그가 남자라는 소문이 돌아 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였다. 대중에게 공개한 다음 다시 시신을 태워 완전히 재로 만든 다음 센 강에 뿌렸다. 재로 만든 이유는 그의 유해가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잔 다르크를 단죄한 것은 영국군 영향권 내에 있던 지방 가톨릭교회, 그를 복권시키고 성인으로 만든 것은 프랑스의 국가 가톨릭교회와 세계 가톨릭교회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옥에 갇힌 그에게 교회는 미사 참석이나 영성체·고해성사 등 성사(聖事)를 허용하지 않았다. 잔 다르크가 복권되는 데는 오랜 시일이 걸리지 않았다. 1456년 가톨릭교회는 잔 다르크를 이단으로 단죄한 재판을 무효화했다.

그에게는 많은 신화가 있다. 화형대에서 그의 심장은 타지 않았다는 증언이 있고 죽은 아이를 부활시켰다는 소문도 있었다. 나비떼가 잔 다르크를 따라다녔다는 영국군의 목격담이 있는가 하면, 잔잔한 바다에 바람을 불게 해 배가 움직일 수 있게 했다는 전설도 있다.

잔 다르크도 수정주의적(revisionist) 해석의 공격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일부 16~17세기 학자들은 그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가 왕실의 사생아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샤를을 설득할 수 있었다는 그럴듯한 주장도 제기됐다.

심지어 그가 죽지 않았으며 누군가 그를 대신해 희생됐다는 가설도 나왔다. 잔 다르크는 정치·군사적 목적에 이용된 ‘미친 여자’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그가 전투에 아예 참가하지도 않았거나 참가했어도 소규모 충돌에 불과했다는 설도 있다.

훗날 만들어진 이미지와는 다르게 잔 다르크는 가난한 양치기 소녀가 아니었다. 그의 집안은 부농(富農)이었다. ‘오를레앙의 처녀(La Pucelle d’Orl<00E9>ans)’로 불리는 그는 동정녀였으며 초경(初經)도 하지 않았다. 거식증 때문에 왜소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그가 무거운 갑옷을 입고 말을 탈 수 있었던 이유 등이 계속 미스터리로 남는다.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잔 다르크가 조국을 넘어 세계를 구하는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른다. 재판 중 왜 육아와 같은 여성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군대를 지휘하게 됐느냐고 그에게 묻자 잔 다르크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런 일들을 할 다른 여성들이 충분히 많이 있다.”

김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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