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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계좌 만들어야…연금·물가연동 상품으로 4층 쿠션 쌓아라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요즘 모임에 가면 ‘은퇴’ ‘이모작’ 같은 말이 화두로 자리 잡았지만 금융권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무슨 연금이다, 월지급식이다, 수익형 부동산이다 해서 베이비붐 세대(1955~63년생)를 겨냥한 은퇴 금융상품이 봇물을 이룬다. 하지만 불과 15년 전만 해도 은퇴상품이란 말조차 거의 쓰이지 않았다.

1997년 외환위기 이전에는 은행 예금이자가 연 10%를 훨씬 넘어 목돈 모아둔 50대 직장인들에게 은퇴 준비는 단순했다. 꼬박꼬박 저축한 돈을 퇴직금과 함께 은행에 넣어 두고 이자를 타먹으면 됐다. 자녀 시집·장가 보낼 때나 큰 병치레라도 할 때 예금 일부를 헐거나 아파트 평수를 줄이는 식으로 대처하면 됐다.

바로 이 점이다. 세상이 변했다는 걸 절감해야 한다.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 여러 굴곡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른 15년간 은퇴준비 방식이 상전벽해가 됐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 은퇴준비의 출발점이다.

계속 거슬러 올라가 보자. 외환위기 이후 금리가 3분의 1 토막이 나자 원금·이자를 합쳐 나눠 쓰는 개념의 연금이 대표 은퇴상품으로 떠올랐다. 또한 자녀에게 물려줄 것이 적다 보니 상속자산을 만들기 위해 종신보험에 들기 시작한다. 은퇴자산에서 보험상품의 비중이 급증했다. 은행의 입지는 확 줄었다. 그래서 은행권은 아파트 등 부동산 대출 영업을 강화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으면서 은퇴시장을 둘러싼 금융권은 또 한번 요동친다. 저금리가 지구촌 전반적 추세로 자리 잡고 장기적 인플레 압력이 겹친 데다 부동산 불패(不敗) 신화마저 꺾이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은퇴를 해도 30∼40년 더 살기 때문에 근검절약도 한계를 보였다.

평생 모아놓은 재산 다 까먹는 경제수명이 우리나라의 경우 평균 75세라니 100세 시대에 그 뒤는 어떻게 살 것인가. 30년 안팎의 사회생활로 돈 모으면서 알고 믿었던 재테크 방법이 계속 유효할지 누구도 장담하기 어렵게 됐다. 실질금리 마이너스 시대에 부동산마저 흔들리자 금융시장에선 월지급식 상품이나 주가연계증권(ELS)·채권 같은 증시 상품이 대안으로 떠오르기도 한다.


저금리 시대에 안전한 상품만으로는 해답이 안 나오고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하고 기대수익률을 높일 수 있는 상품, 유동성이 좀 더 있는 상품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다. 은퇴자산관리의 새로운 방향 다섯 가지를 제시해 본다.

①내게 맞는 은퇴설계를 하라

전문 은퇴설계 프로그램을 활용해 은퇴 시점에서 노후 대비 자산이 충분한지를 따져보고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조언을 구한다. 은퇴설계 서비스를 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많다. 받은 사람도 해당 금융사의 상품을 팔아먹기 위한 고객 겁주기가 아니냐는 의심을 하기도 한다.

은퇴설계는 은퇴필요자금 액수를 정하는 단순 계산기가 아니다. 금융상품 한두 가지에 들었다고 은퇴설계가 된 것은 아니다. 제대로 된 은퇴설계는 여러 가지 길 중에서 자신만의 은퇴 후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보는 것이다. 근래 은행이나 보험·증권사들은 은퇴 계층에 대한 영업을 강화하면서 세금·부동산 문제에 이르기까지 은퇴설계 자문서비스를 강화하고 있다. 그 대상도 VIP 고객에 이어 일반고객까지 확대되고 있다.

②은퇴 후 5년 ‘크레바스’를 대비하라

수명 100세 시대 도래로 은퇴 후 활동 기간이 30∼40년에 달하지만 그 초입인 은퇴 직후 5년이 가장 중요하고 위험하다. 히말라야 등반 사망사고 중 절반가량이 정상 정복 후 내려올 때 빙하의 쪼개진 틈인 크레바스(crevasse)에서 일어난다고 한다.

은퇴 후 5년은 낯선 생활에 적응하는 과도기라 잘 넘기기가 쉽지 않다. 통계적으로 볼 때도 질병이나 돌연사, 우울증, 황혼이혼, 퇴직금 사기, 사업실패 등 최악의 시나리오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할 가능성이 큰 시기다.

국민연금·주택연금 등 각종 연금도 60대 초·중반이나 돼야 받을 수 있으니 소득 공백기까지 겹친다. 은퇴 직후 5년은 만일에 대비할 여유자금을 연금 외에 준비해 놓아야 한다. 연금은 초장기 상품이라 10년 이내 해지할 때 손해가 많아 크레바스용은 아니다.

③놀고 있는 자산부터 움직여라

지금 쓰는 돈을 아껴서 연금 등으로 저축하라는 말을 많이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쉽지가 않다. 은퇴했거나 곧 할 사람은 소득은 줄고 쓸 건 많은 시기라 저축하기가 힘들다. 따라서 지금 보유한 여러 형태의 자산과 금융상품을 점검하는 일부터 해보자. 방치됐거나 노는 자산을 재정비해 움직이게 하는 것만으로 은퇴자금 부족을 꽤 보완할 때가 있다.

상가점포 등 수익형 부동산이 있다면 수익률이 연 6% 이상 되는지, 이자가 거의 없는 예금은 없는지, 가입한 보험이 당초 목적에 맞는지, 평가손이 심한 펀드를 언제까지 가지고 있을 것인지 등이다. 부동산이나 금융상품의 구성을 시장트렌드와 개인적 은퇴자산 목표에 맞게 재조정하는 것을 자산리밸런싱(Re-balancing)이라고 한다.
 
연금 3총사에 4층 쿠션을 만들라

국민연금·퇴직연금·개인연금을 연금 3총사라고 한다. 국민연금은 물가를 반영한다는 장점이 있고 여기에 퇴직금 개념의 퇴직연금이 가장 기본적인 은퇴자산이다. 이들 기본 연금을 보완하는 것이 개인연금이다. 요즘 은퇴준비의 주류는 결국 이들 3층 연금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된 사람들은 조금 더 욕심을 부려볼 만하다. 지난 30년간은 비교적 물가가 안정된 시기였다.

하지만 앞으로 은퇴자들이 느끼는 체감물가는 예전보다 크게 올라갈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재산가치가 떨어지고 노후생활비도 빨리 바닥난다. 인플레 시대에 살아 남으려면 물가 +α 개념의 4층 은퇴자산이 있어야 한다. 물론 모험이 필요하다. 하지만 은퇴자산이 부족한데 무위험 자산만 찾다간 은퇴빈곤층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⑤별도 은퇴계좌를 만들라

이건 지금 쓸 돈, 이건 노후자금, 이렇게 명확히 구분해 놓은 사람은 의외로 적다. 자녀 유학과 결혼 자금, 창업자금, 노후생활비, 배우자 모르는 ‘비자금’ 등 용도는 다양한데 꼬리표 없이 여기저기 통장에 뒤섞어 넣어 둔다. 결국 은퇴자산은 쓰다 남은 돈이 되고, 자식들에게 노후를 맡기는 형국이 되곤 한다.

더욱이 장수 시대가 되면서 은퇴자산을 관리하는 일 자체가 쉽지 않게 됐다. 은퇴 전용 계좌를 한번 만들어 보자. 은퇴자산이 어느 정도로 쌓이고 나중에 어느 정도의 생활비를 만들어 낼 것인지 따지기가 쉽다. 국내에서 퇴직연금 말고 은퇴계좌를 만든 곳은 거의 없다. 은퇴를 위한 금융상품의 종류가 다양해지기 때문에 증권계좌가 은퇴계좌로서 편리한 면이 많다.



김진영(51) 서울대 국제경제학과 석사를 마치고 20년 가까이 옛 쌍용증권 이코노미스트, 삼성금융연구소 금융전략팀장으로 일했다. 2008년 삼성증권으로 옮겨 2010년 현직을 맡았다.

김진영 삼성증권 은퇴설계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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