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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당에 격분한 류샤오치, 70세 생일 때 식물인간 전락

2004년 여름, 왕광메이(왼쪽 넷째)는 마오쩌둥과 류샤오치 집안에서 최연장자가 자신이라며 베이징 싼환루(三環路) 징두신위안다샤(京都信苑大廈)에 있는 중국음식점으로 두 집안 3대의 자녀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왼쪽 셋째와 오른쪽 다섯째가 마오의 딸 리나(李讷)와 리민(李敏). 오른쪽 첫째가 류샤오치·왕광메이의 장남 류위안(劉源). 왕광메이는 2년 후 세상을 떠났다. [사진 김명호]
1967년 7월 4일, 중공 중앙 판공청 주임 왕둥싱(王東興·왕동흥)이 류샤오치를 찾아왔다. 당 중앙의 의견이라며 베이징 건축공업학원의 조반파 앞으로 자술서 비슷한 것을 제출해 달라고 요구했다. 왕둥싱은 국·공전쟁 시절부터 마오쩌둥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류샤오치는 초등학교 반장이 담임선생에게 제출하는 반성문 같은 자술서를 작성했다. “나는 지난해 7월 18일, 마오 주석이 베이징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당 중앙의 일상 공작을 주재했다. 문혁 초기 공작조를 파견해 학생운동을 진압했고, 50여 일간 공작조를 지지하는 바람에 이들의 착오를 가중시켰다. 지난해 8월 5일, 마오 주석의 사령부를 포격하라는 대자보를 본 후에야 내가 얼마나 큰 착오를 범했는지 알았다. 그전까지는 정말 몰랐다.”

같은 해 9월 초, 총리 저우언라이가 ‘류샤오치와 가족들의 처리방안’을 들고 린뱌오에게 달려갔다. “류샤오치를 푸뤼쥐(福祿居) 전원(前院)에 격리시켜 단독 심사한다. 왕광메이는 미국 중앙정보국의 특수요원이다. 공안부에서 체포해 따로 심사할 필요가 있다. 자녀들은 중난하이에서 내보낸다”는 내용이었다. 린뱌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오 주석에게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린뱌오가 동의했다는 보고를 받은 마오는 저우언라이를 힐끗 쳐다봤다. 이어서 문을 향해 팔을 휘저었다. 알았으니 나가라는 뜻이었다. 다음 날 마오는 베이징을 떠났다.
9월 13일 새벽 3시40분, 군용 지프 한 대가 푸뤼쥐 문전에서 시동을 껐다. 검은 그림자 몇 개가 왕광메이의 침실로 들어가 체포영장을 제시했다. 달빛이 유난히 밝은, 베이징의 전형적인 가을밤이었다.

가족들과 헤어진 류샤오치는 위장병과 당뇨병에 시달렸다. 설사도 멈추지 않았다. 수전증이 심해 침상을 오르내리기 힘들어도 감시원들은 모른 체했다. 매끼마다 밥그릇을 바닥에 놓고 나가버렸다. 류샤오치는 얼굴을 밥그릇에 대고 허우적거렸다. 목욕은커녕 세수도 못하고 면도와 이발도 못했다. 악취가 풍기고 온몸이 붉은 반점투성이로 변해갔다. 얼핏 보면 나병 환자 같았지만 여전히 국가주석이었다.

1968년, 새해가 되자 마오쩌둥은 총리 저우언라이에게 류샤오치 관련 심사조 조장을 겸하게 했다. 그해 여름부터 류샤오치는 고열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폐에도 이상이 왔다. 의사가 언제라도 사망할 수 있다고 하자 할 수 없이 병원에 입원시켰다.

10월 13일부터 2주간 열린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는 류샤오치에게 출당조치를 내렸다.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에게 모든 회의를 진행시켜 저우의 퇴로도 완전히 차단시켰다.

11월 24일은 류샤오치의 70회 생일이었다. 감시원이 라디오를 머리맡에 놓고 나갔다. 웅장한 음악과 함께 24일 전에 끝난 중앙위원회 소식이 흘러나왔다. “반도(叛徒), 내간(內奸), 공적(公敵), 당 부주석 류샤오치 출당·제명” 등 온갖 흉악한 용어들이 튀어나왔다. 엄청난 생일 선물이었다. 분노가 치민 류샤오치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온몸이 땀범벅이 되고 구토가 그치지 않았다. 완전히 식물인간으로 변했다.

1969년 3월 우수리 강변에서 중·소 양군이 무력 충돌했다. 당시 몽골 경내에는 소련의 대규모 탱크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48시간이면 베이징까지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린뱌오는 “소련이 중국을 침략했을 경우 류샤오치를 내세워 괴뢰정부를 구성할 가능성이 있다”며 비밀장소로 이전시킬 것을 지시했다.

허난(河南)성 카이펑(開封)에 진청(金成)은행 대형금고가 있었다. 온갖 전화(戰禍)를 겪으면서도 끄떡없을 정도로 견고한 1930년대의 대표적인 건축물이었다. 이곳에서 류샤오치는 27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1921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지 48년 만이었다. 류샤오치 사망 직전,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황용셩(黃永勝·황영승)은 중앙군관회(軍管會)를 대표해 왕광메이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다. 저우언라이의 동의를 그날로 받아냈다.

왕광메이 옆에 어슬렁거리던 저승사자를 밀어낸 사람은 마오쩌둥이었다. 최종 결재를 받으러 온 저우언라이에게 “판결을 유보해라. 조사를 엄격히 하되 관대하게 처리하고 잘 보호하라”고 천천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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