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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발라’ 상징, 독특한 블루를 사랑한 색채 마술사

프랑스는 르네상스 이후 세계 미술계를 선도했다. 문화·예술 융흥에 부심했던 프랑스 발루아 왕조 프랑수아 1세(1515~47 재위) 국왕의 공이 컸다. 그는 당대 최고의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초빙한 뒤 루아르 지방에 정착시켜 프랑스 미술의 초석을 놓게 했다. 다빈치는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인 ‘마라노’ 가계 출신이다. 이후 프랑스엔 시대별로 많은 화풍이 이어졌다. 고전주의, 로코코, 낭만주의, 사실주의, 인상파, 야수파, 입체파, 다다주의, 추상파, 초현실주의 등이다. 각 화풍을 대표하는 대가도 많이 배출됐다.
‘에콜 드 파리’는 1905년부터 약 30년간 프랑스 미술계를 이끌었다. 각자 화풍이 다른 외국 화가들이 파리에 모여 활동한 화파(畵派)를 말한다. 이탈리아 유대인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를 제외한 이들 다수는 동유럽 유대인이다. 모이즈 키슬링(폴란드), 샤임 수틴(벨라루스), 자크 립시츠(리투아니아), 쥘 파신(불가리아), 마네 카츠(우크라이나) 등이 1세대 에콜 드 파리의 주요 유대인 화가다. 유대인은 아니지만 스페인 말라가 태생의 파블로 피카소도 이 화파에 속한다. 피카소와 더불어 20세기 양대 최고 화가로 불리는 유대인 마르크 샤갈(사진) 역시 초기 에콜 드 파리를 대표했다.

슬라브 전통미술 영향으로 몽환적 화풍
샤갈은 1887년 당시 제정 러시아령인 벨라루스 비데브스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모이즈 샤갈로프다. 아버지는 청어장수였다. 어려서 유대식 가정교육을 받았다. 1906년 당시 러시아 수도이며 문화·예술의 중심지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건너가 그곳에서 2년간 왕립미술학교를 다녔다. 그의 초기 화풍인 자연주의 초상화와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어 유대인 화가 레온 박스트를 사사했다. 박스트는 회화뿐 아니라 장식미술과 무대장치의 당대 대가였다.

1910년 샤갈은 스승 박스트를 따라 파리로 옮겼다. 미술학교 아카데미 줄리앙을 다녔다. 화려한 색채의 슬라브 전통미술의 영향을 지닌 그는 이때부터 몽환적인 색채의 귀재라는 호평을 받았다. 앙리 마티스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와도 만났다. 이 시기엔 야수파 마티스와 입체파 피카소의 영향을 받았다. 또 아방가르드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와도 친하게 지냈다. 시간 나는 대로 루브르 박물관과 파리 시내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선배 대가의 작품을 접했다. 들라크루아(낭만주의), 쿠르베(사실주의), 르누아르(인상파), 툴루즈 드 로트렉(후기 인상파) 등은 그가 특히 주목한 화가였다.

샤갈은 1913년 한 독일 화랑의 초청으로 베를린에서 성공적인 첫 개인전을 열었다. 다음해 유대인 약혼자 벨라 로젠펠트와 결혼했다. 벨라는 그의 미술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동반자였다. 1917년 공산혁명 이후 샤갈은 잠시 소련 미술단체의 간부직을 지냈다. 그러나 공산체제와는 도저히 공생할 수 없음을 느낀 그는 23년 파리로 돌아와 프랑스에 귀화했다. 이때부터 환상적인 색채를 바탕으로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 화풍에 정착했다. 유대인이지만 기독교적인 모티프도 회피하지 않았다. 유대교 신비주의 ‘카발라’에도 호기심을 갖고 있던 그는 작품에 카발라 신앙의 상징적 색채인 청색을 특히 부각시켰다. 이 특이한 파란색은 그의 작품 대부분에 투영됐다. 대형 화랑이 밀집한 파리 아브뉘 마티뇽의 거물 화상들은 일약 주목받는 화가로 급성장한 그의 작품을 높은 값에 거래했다. 그는 유화 외에도 수채화, 석판화, 삽화, 스테인드글라스, 벽화 등으로 다양하게 작업했다.

유럽 전역에서 나치 독일의 유대인 박해가 심해지자 샤갈은 프랑스 남부에 잠시 머물다 41년 미국으로 피신했다. 미국 체류 중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의 벽화를 그렸다. 47년 프랑스에 돌아와 기후 좋고 풍광 수려한 남동부지역 프로방스에 정착했다. 드골 대통령 시절 10년간 문화장관을 지낸 문인이며 친우인 앙드레 말로의 부탁으로 샤갈은 파리 오페라 팔레 가르니에(1875년 개관)의 새 천장화를 맡아 64년 완성했다.

미국 체류 시절인 44년 아내 벨라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크게 상심한 샤갈은 한때 작품 활동을 중단했다. 그러다 52년 유대인 여성 발렌티나 브로드스키와 재혼하면서 활력을 되찾았다. 66년 샤갈은 17점 연작인 ‘성경의 메시지’를 비롯한 그의 대표작 30여 점을 프랑스 정부에 기증했다. 니스 시는 시유지를 제공해 샤갈의 업적을 기리는 국립 샤갈박물관을 건립했다. 73년 그의 86세 생일에 맞추어 개관했다. 샤갈박물관은 이후 니스 관광명소가 됐다. 85년 자유로운 영혼의 색채마술사 샤갈은 수많은 대작을 남긴 채 97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니스 시 외곽 생 폴 드 방스에 묻혔다. 2004년, 2010년 등 두 차례 한국에서 샤갈 전시회가 열렸다.

‘성경의 메시지’ 등 대표작 30여 점 기증
샤갈은 다양한 주제를 다뤘다. 러시아 농부, 유대인, 동물, 생선, 연주자, 서커스 곡예사, 성서, 천사, 어린이 등이다. 피카소와 같이 화풍도 여러 차례 바뀌었다. 자연주의에서 시작해 야수파, 입체파, 표현주의, 초현실주의를 두루 섭렵했다. 모딜리아니와 같이 불우했던 동시대 거의 모든 동료 화가들과는 달리 그는 비교적 복된 삶을 살았고 또 장수했다.

샤갈은 평생 자기 작품을 사랑하고 성원해준 애호가들에 대한 보답을 항상 의식했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작품을 정부에 기증했다. 그를 후원한 갤러리와 개인 소장가들도 애지중지하던 샤갈의 작품을 전시용으로 위탁했다. 대가의 명작은 몇몇 개인의 독점물이 아닌 만인의 공동자산이라는 취지에서다. 미술품을 지성의 속물적 과시를 위한 수단 또는 안전한 투기자산쯤으로 여기는 우리 일부 소장가들의 행태와 대별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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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