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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파·해외파의 대결, 목표는 코민테른 조선지부

1924년 4월 조선청년총동맹 결성 대회가 열렸던 중앙기독교청년회관(현 종로 YMCA). 서울청년회는 조선청년총동맹으로 사실상 전국의 거의 모든 사회운동 조직을 통합한 셈이었다. [사진가 권태균]
서울파, 즉 서울청년회 계열은 김윤식 사회장 반대 사건과 ‘사기공산당’ 사건 등을 주도하면서 민족개량주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사회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이후 서울파는 두 방향으로 운동을 전개했다. 노동운동을 비롯한 각종 사회운동을 장악하는 한편 공산당을 건설해 코민테른 조선지부로 가입하는 것이었다. 서울파는 이를 위해 양동작전을 썼다. 겉으로는 합법 대회를 개최해 일제 경찰의 시선을 쏠리게 해 놓고 비밀리에 공산주의 조직을 건설하는 작전이었다.

현재의 YMCA.
서울파는 먼저 노동대회를 열어 노동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했는데, 내부 문제가 발생했다. 노동대회 의장 문탁(文鐸)이 일본의 우익단체인 동광회(同光會)와 연관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고등경찰관계연표(高等警察關係年表)’ 등에 따르면 1921년 5월 한국에 지부를 설치한 동광회는 총독 통치를 철폐하고 군사·외교를 제외한 내정(內政)은 한국인에게 맡기자고 주장하는 단체였다. 유사 독립운동처럼 보이는 이런 운동이 참정권 운동인데 일제의 식민 지배를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부분적인 참정권을 획득하자는 것이어서 좌파는 물론 혁명적 민족주의자들로부터도 큰 반발을 샀다.

상해 임시정부의 김지신(金芝愼) 등이 작성한 자료는 데라오 도루(寺尾亨), 구즈우 요시히사(葛生能久),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같은 일본 동광회 간부들이 국내에 지부를 설치하기 위해 방한했을 때 협의했던 단체들에 대해 보고하고 있다. 송병준이 이끄는 유민회(維民會), 이완용이 후원하는 태을교(太乙敎), 정병조(鄭炳朝)가 주도하는 국민공진회(國民共進會), 손병희의 천도교에서 갈라져 친일파로 전락한 김연국(金演局)이 주도하는 시천교(侍天敎) 등이었다. 송병준·이완용 등으로선 군사·외교권을 일본이 장악하는 대신 자신들이 국내 정치를 주도하도록 참정권 허용을 바라마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청년총동맹 결성을 축하하는 음악회 모습. <동아일보 1924년 4월 25일자>
1922년 동광회 한국지부는 일본 대의사(代議士: 국회의원) 아라카와 고로(荒川五郞)를 초청해 명월관에서 환영 연회를 개최했다. 임정 보고서에도 아라카와를 “일본 의회 내에서 그나마 양심 있는 인물”이라고 전하고 있는데, 연회에 참석한 100여 명 중 서울청년회의 이항발(李恒發) 등이 발언권을 요구했다. 일본 의회에 한국 내정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던 동광회 조선총지부 간사장 이희간(李喜侃)이 발언권을 거부하자 서성달(徐成達)·김태규(金泰圭) 같은 청년들은 내정독립론을 신랄하게 공격하면서 “더러운 무리들이 주최한 연회에서 식사를 할 수 없다”고 밥상을 뒤엎었다. 이들은 “내정독립운동자 정훈모(鄭薰謨)와 문탁을 쳐죽이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문탁은 구타당하고 서울청년회에서 제명당했다.

서울청년회는 1922년 9월 7일 공개적으로 노동대회 임시대회를 열어 김사국, 이항발 등을 간부로 선임하는 한편 10월에는 비밀회의를 열어 서울콤그룹을 건설했다. 서울청년회의 김사국, 이영, 김영만, 임봉순, 이중각, 장채극, 김유인 등은 비밀 회의에서 “종래 상해파의 무원칙한 지도를 거부할 것”을 선언하면서 “우리 당은 굳건히 1848년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작성한 ‘공산당 선언’을 습득했고 그 선언은 우리 당 강령의 근본적인 지주”라고 주장했다. 또 “우리 당은 코민테른의 직접적이고 확고한 지도 하에서 전진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는다”고 선언했다. ‘우리 당’이라고 칭하는 것은 나중에 코민테른 지부로 가입할 것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서울콤그룹은 또 “일본제국주의 권력과 제국주의의 주요한 세력을 구성하는 그의 수많은 하수인을 박멸하는 것이 필수이고, 조선의 모든 혁명세력을 민족 해방운동의 통일전선 슬로건 하에 단일한 중앙으로 집중시키는 것을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동시에 근로대중이 이 운동의 중요한 세력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요구된다”며 민족통일전선 결성과 노동자·농민의 헤게모니 장악을 주장했다.

서울콤그룹의 이런 노선은 제3 국제공산당, 즉 코민테른 노선을 정확히 숙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코민테른은 1922년 12월의 제4회 대회에서 ‘전술에 관한 테제’를 채택해 “코민테른은 모든 공산당과 공산주의 그룹이 통일전선전술을 가장 엄격하게 수행하도록 요구한다”면서 ‘통일전선체 건설을 각국 사회주의자들의 임무’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 테제는 또 “①프롤레타리아트의 총체적 이익을 대표하는 공산당의 핵심을 만들어내는 것 ②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민족 혁명운동을 전력을 기울여 지지하고, 이 운동의 전위로 되고, 또한 민족운동의 내부에 있어서 사회운동을 강조하고 강화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서울청년회는 코민테른의 이런 노선에 따라 겉으로는 각종 사회운동 조직을 결성하고 안으로는 비밀결사를 조직하는 양동작전을 구사한 것이었다. 서울콤그룹은 13명으로 중앙총국을 구성하고 중앙총국 안에 비서부·정치부·조직부·선동부·검사부·노동부 등 6부와 농민과·청년과·여성과·연락과 등 4개 과를 설치했다. 이들의 양동작전은 전조선청년당대회(이하 청년당대회) 개최에서 다시 나타난다.

서울파는 1923년 3월 23일부터 청년당대회를 개최한다면서 2월에 준비위원 명단을 발표했다. 서울청년회의 이영, 천도교 유신회(維新會)의 강인택(姜仁澤), 불교 청년회의 이종천(李鍾天), 대종교 중앙청년회의 민중식(閔中植) 등이 선임되었는데, 일경의 시선이 청년당대회에 쏠린 틈을 타서 2월 20일에 전위당인 ‘고려공산동맹’을 결성했다. 고려공산동맹은 김사국, 이영, 김영만, 장채극, 임봉순 등 17명을 중앙위원으로 선임하고 각도 책임자를 임명했으며, 고려공산동맹 청년부 책임자 이정윤을 책임비서로 하는 ‘고려공산청년동맹’도 결성했다. 명칭을 동맹(同盟)이라고 한 것도 코민테른의 승인을 염두에 둔 것으로서 강령에는 당(黨)이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3월 23일부터 열린 청년당대회에는 94개 단체, 200여 명이 참가했는데 국제공산청년회와 일본공산청년회 등에서 축하문을 보내와 국제연대를 과시했다. 당초 집회를 허가했던 일제는 청년당대회의 성격과 주도 인물을 모두 파악하고 난 후인 청년당대회 마지막 날(3월 29일) 밤 집회 금지령을 내려 대회를 중단시켰다. 그러나 서울청년회도 이미 비밀결사 고려공산동맹을 조직해 감출 것은 감추었다. 일제 고등경찰과 치열한 두뇌싸움을 전개한 것이다.

서울청년회가 사회운동을 주도하자 코민테른 파견원 김찬(金燦)과 박일병(朴一秉) 등은 일본 유학생들 중심의 토요회(북성회)가 1922년 10월 결성했던 무산자청년회를 확대 강화해 대응하기로 했다. 김찬, 박일병 등 22명은 1923년 8월 서울 관훈동 싱거 미싱회사 사무실에서 새로운 청년회 건설을 결의했다. 단체 명칭에 ‘무산(無産)’자가 들어가면 당국이 사사건건 간섭하고 전단 한 장도 마음대로 살포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무산(無産)’ 대신 ‘신흥(新興)’자를 사용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해 9월 ‘경성신흥청년단’ 창립 총회 집회계를 냈지만 일제는 이 또한 불허했다. 결국 1924년 2월 코민테른 파견원과 토요회가 연합한 신흥청년동맹을 결성했다. 김찬·박일병 등은 서울청년회와 합동할 것을 제의했지만 이미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서울청년회는 거부했다. 대신 신흥청년동맹이 결성되는 1924년 2월 서울파는 조선청년총동맹 발기준비회를 열었다. “계급적 대단결을 목표로 청년운동의 통일을 도모하고, 대중 본위의 신사회 건설을 기도하고, 조선 민중해방운동의 선구가 되기 위한 조직”이라고 선언했다.

1924년 4월 21일, 지방에서 올라온 대표들이 경운동(慶雲洞) 91번지 숙소에서 일제히 서울 종로의 중앙기독교청년회관으로 몰려들면서 청년총동맹 발기대회가 열렸다. 서울청년회의 한신교(韓愼敎)가 사회를 보았는데 30~40여 통의 축전(祝電)과 223개 단체에서 600~700명이 참가한 대규모 대회였다. 동아일보(1924년 4월 25일)는 장 내에 종로경찰서의 경관이 다수 출장해 팔에 ‘호위(護衛)’라는 붉은 완장을 차고 단속해 분위기가 긴장됐다고 전하고 있다.

조선청년총동맹에 신흥청년동맹도 가담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이 시기 사회운동의 중심은 서울청년회였다. 서울청년회는 25명의 중앙집행위원에 이영, 박원희(김사국의 부인), 최창익, 임봉순 등 자파뿐만 아니라 김찬, 김단야, 조봉암, 신태악 등 신흥청년동맹 계열도 선임해 명실상부한 전국 단일의 청년단체임을 과시했다. 223개 단체, 4만3000여 명의 회원을 둔 청년총동맹은 청년운동뿐만 아니라 노동운동, 농민(소작)운동, 사상운동, 여성운동 등 모든 운동의 전위를 자임했다. 서울청년회는 이런 실력을 바탕으로 코민테른 조선지부를 자신들이 창건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코민테른의 생각과는 달랐다. 코민테른은 국내에 확고한 기반을 가진 서울청년회보다 자신들이 직접 보낸 파견원들에 의해 공산당이 건설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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