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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시어머님과 친정엄마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1990년대 중반. 어버이날이었다. 오랜 외국생활 끝에 귀국하자마자 시어머님과 친정엄마를 모시고 미국 동부로 효도관광을 다녀왔다. 들뜬 마음으로 여행준비를 했다. 두 분의 모자며 색안경이며 간식거리와 볶은 고추장까지.

드디어 그날. 남편과 시누이의 배웅까지 받으며 단체에 합류해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나란히 앉으신 두 분. 참 보기 좋았다.

뉴욕에 도착한 첫날, 저녁식사 후 방 배정을 받았다. 두 분이 한방을 쓰시고 난 다른 여행객 중 한 명과 방을 나눠 쓰게 되었다. 오랜 비행으로 피곤하셨던 두 어머니는 일찍부터 방으로 들어가시더니 아침에 약속시간에 맞춰 집합장소인 호텔로비로 나오셨다.

뽀얗게 화장도 하시고 머리엔 ‘구루뿌’로 손질까지 하셨는지 상큼하고 단정하신 시어머님과는 대조적으로, 엄마 모습은 도저히 봐 드릴 수가 없었다. 가뜩이나 숱도 적은 머리는 빗지도 못했는지 한쪽으로 뭉쳐 있고 입술을 잔뜩 내밀고 계신 폼이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다.

사연은 이랬다. 두 사람이 나눠 써야 할 목욕탕. 시어머님이 먼저 들어가시더니 탕 안에 물까지 받아서 알뜰살뜰 씻고 나오시는 바람에 엄마는 미처 머리도 못 감고 대충 씻고 나오시게 되었다는 얘기다. ‘시어머니가 우선이고 친정엄마인 나야 나중인 건 알겠다만, 매일 아침 이렇게 못 씻고 나오게 되면 어떻게 하냐?’

어, 큰일이다. 이건 아니다. 즉석에서 새로운 규칙을 하나 만들었다. “오늘은 어머님이 연세가 더 많으셨던 관계로 먼저 욕실을 쓰셨잖아요. 이제부터는 하루씩 번갈아 순번을 정하면 어떨까요?”

시어머니이기에 더 우선권이 있다는 얘기는 죽어도 하기 싫었다. 다행히 성격이 화끈하고 뒤끝도 없으신 시어머님 덕분에 욕실 순서는 잘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여행 내내 비굴했던 엄마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많이 속상하다. 식당에서도 관광버스 안에서도. 모조리 좋은 자리는 시어머님 몫이었다. 아들이 번 돈으로 당당히 여행을 하신다고 생각하시는 시어머님과 잘난 사위 덕에 덩달아 여행하시게 되었다고 여기시는 친정엄마.

여행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모시고 온 사람도 나인데. 시어머님의 아들 때문이 아니라 친정엄마의 딸 때문에 여행을 하시게 됐다는 걸 모르시나. 아들만큼 교육도 잘 시키고 바르게 딸을 키우신 엄마가 왜 비굴해야만 하는 건가. 이유를 물었다. ‘그래야 네가 편한 거야, 이것아.’ 하신다. 여행 내내 속상했다. 어머님 눈치만 보시던 엄마가 미워 그 후론 두 분을 절대 같이 모시지 않았다.

친정엄마와 시어머니. 결코 동등할 수 없는 관계인가. 미국에서 가깝게 지내던 친구 중에 시어머니와 친정엄마를 모시고 오순도순 재미있게 잘 사는 집이 있었다.

맞벌이 부부가 일터로 출근하는 낮 시간이면 두 사돈이 마치 친자매처럼 사이 좋게 애들도 봐 주고 집안일도 나눠 하고 말동무도 되고 의지도 되고. 노인들 혼자 외롭게 사시는 것보다 좋아 보여서 ‘여차하면 나도 그래야지’ 했었는데 그건 미국이라 가능했나 보다.

지금은 돌아가시고 없는 친정엄마. 가슴이 미어진다. 오래전 ‘집으로’란 영화가 있었다. 산골 그 꼬부랑 할머니가 외할머니였기에 더 가슴 저미는 애절함을 우리에게 전했던 건 아닐까.

그런데 웬걸. 그것도 이젠 옛말이다. 엊그제 어버이날. 우연히 ‘친정엄마에겐 10만원짜리 영양크림, 시어머님에겐 형식적인 2만원짜리 립스틱을’이라는 글을 봤다. 육아부담이 갈수록 심해지고 가정의 중심이 여성으로 옮겨지게 되면서, 육아를 대신해 주는 친정을 더 챙기는 맞벌이 부부가 늘고 있다는 설명과 함께.

하지만 시댁보다 친정을 더 챙기는 것이 어디 선물뿐이겠는가. 앞으로는 생활 자체가 아예 처가 중심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퇴근 후에 아이들이 있는 친정으로 가서 저녁밥 해결하고 아이들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맞벌이 부부들이 많아지는 걸 보면 말이다.

현행 보육시스템이 개선되지 않는 한, 아이 맡길 곳을 찾아 처가에 의존하는 부부들은 점점 더 많아질 터다.

그렇다고 여자 입김이 거세졌다고 호들갑 떨 필요는 없다. 사실이지 시댁이든 친정이든 더 고생한 부모님께 더 좋은 선물을 드리고 싶은 마음. 당연한 것 아닌가.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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