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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레테의 강물처럼 짧은 오월이 떠나고 있다

김동률
서강대MOT대학원 교수 매체경영
불이 꺼지자 강의실 스크린에 더스틴 호프먼이 나타났다. 빨간 스포츠카를 몰고 버클리 대학에 다니는 여자친구를 찾으러 가는 길이다. 우여곡절 끝에 여친의 결혼식장에 침입해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녀를 잡고 냅다 뛴다. 그레이하운드를 타고 도망치는 라스트 신은 지금도 자주 패러디되고 있는 명장면. 무명의 연극배우 더스틴 호프먼에게 오스카상을 안겨줬고 배경음악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 ‘스카보로의 추억’ 등이 알려지며 사이먼 & 가펑클은 일약 세계 포크음악의 지존으로 떠올랐다. 미국 중산층의 타락한 생활과 1960년대 신세대의 심리적 불안을 그린 영화. 이번 학기 수강생들이 제출한 과제물 중 하나다.



 내가 좋아하는 일간지 칼럼 또는 방송 프로그램을 골라 자기 나름의 근거와 평가를 담아 제출하라는 지난 과제물에 이어 이번 과제물은 ‘내 마음의 영화’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 한 편을 골라 보고 신문 칼럼 형식의 무게감 있는 에세이를 써 오라는 것이었다. 물론 조건이 있다. 그네들이 태어나기 전인 1980년대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반드시 객관적으로 클래식 반열에 오른 작품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출한 과제물은 놀라웠다. 소통과 단절의 문제를 다룬 빔 벤더스의 ‘파리 텍사스’에서부터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 그리고 ‘대부’ ‘시네마 천국’ 등 난해한 것에서부터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작품들이 20대 청년의 시각으로 분석되고 해석되어 있었다.



 ‘닥터 지바고’를 올린 수강생의 선택의 변이 눈에 띈다. ‘친구들과 산행을 간다며 아침부터 온 집안을 한바탕 뒤집고 나간 엄마’에게 급하게 SOS전화를 걸었고, 그런 엄마가 친구분들과 상의해 만장일치로 추천해준 영화가 ‘닥터 지바고’였다는 것이다. 수강생은 무려 다섯 차례 이상 국내 개봉된 이 영화의 어떤 매력이 한국 중년 아줌마들을 유혹했는지에 의문을 갖고 에세이를 풀어 나갔다.



 전설적인 고전 ‘선셋 대로’를 올린 수강생은 첨단 LED 화면으로 70년 전 흑백영화를 보는 아이러니에 당혹했으며, 스탠리 큐브릭의 1968년작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제출한 수강생은 1968년에 상상한 2011년 모습을 그린 영화를 2012년에 본다는 것은 참으로 기묘한 경험이라고 고백했다.



 과제물을 시대별로 분류해 읽다 보니 문득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생각이 든다. 나 또한 청춘의 한때 ‘일 포스티노’를 보고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를 처음 알았다. “내가 그 나이였을 때 날 찾아왔다/난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겨울이었는지 강이었는지 난 모른다”라는 구절에 매료되었던 기억도 이제는 아득하다.



 나의 서재 구석에는 비밀상자가 하나 있다. 대학 신입생부터 지금까지 해마다 사용해 오던 다이어리를 모아둔 것이다. 학교에 다닐 때에는 학생 수첩이었다. 도서 대출증을 겸한 학생증에는 빛바랜 과거가 빼곡하다. 『전환시대의 논리』 『농민』 등 70년대 후반을 휩쓸었던 이념 서적들 리스트가 즐비하고 ‘볼 앤 체인’ ‘러쉬’ ‘섬’, ‘가미’ 등등 이대 입구와 신촌 뒷골목 술집, 밥집들의 낯익은 전화번호도 눈에 띈다. 직장을 다니던 시절에는 제법 멋있는, 이름 석 자가 박힌 고급 가죽 다이어리가, 유학 시절에는 영어로 된 미제 다이어리가 눈에 띈다. 다이어리 속에는 수많은 이름이 등장하고 또 무슨 연유인지 모르지만 빨간 줄이 그어져 있기도 하다. 아니 어떤 이름은 (주로 여자 이름이지만) 화이트로 아예 지워져 있다.



 아주 가끔, 나는 낡은 수첩을 뒤적이며 과거를 반추해 본다. 그런 내가 가장 놀라는 것은 가끔 이름에 해당되는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도 있다는데… 아이로니컬하게도 그런 이름의 대부분은 남친보다는 여친들이다. 축제를 핑계로, 또 서클에서 만나 사귀었던 수많은 여학생들의 이름은 빼곡한데 정작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다는 말이 허망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잊혀진 수많은 얼굴의 저편에는 무엇이 있을까. 나도 그녀들에게 잊혀져 가고 있을까. 그런저런 상념 속에 레테의 강물처럼 짧은 오월이 떠나고 있다.



김동률 서강대MOT대학원 교수 매체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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