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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프 걸 판타지

TV드라마와 영화, 신간 서적에서 ‘강한 여성’이 대세로 자리 잡고 있다. 권력투쟁을 주도하는 여왕과 스턴트 우먼을 지나서 이제는 나라를 구하는 여군 장교의 모습에 대중은 환호한다. 한마디로 ‘터프 걸’ 판타지다. 무엇이 우리를 강한 여성상에 빠지게 하는가?

TV드라마 속의 여성 이미지는 1960년대 이후 꾸준히 변해왔다. 60∼70년대엔 ‘아씨’ ‘여로’ ‘새엄마’에서처럼 인내·순종·희생의 어머니상이 지배적이었다면, 80년대부터는 화려하고 도시적인 여성들이 주류였다. 21세기 들어 한국 대중문화에서 그려지는 여성들은 성 욕구를 거침없이 표현하고 술·담배에도 익숙하다. 또한 권력투쟁의 전면에 나선다. ‘내 이름은 김삼순’ ‘천추태후’ ‘선덕여왕’이 그런 사례다. 요즘 말로 하자면 ‘터프 걸’들이다. 여성이 변했는가, 아니면 여성에 대한 인식이 변했는가?

여성의 낮은 지위와 여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오랫동안 지속돼 왔다. 1918년 여성이 참정권을 갖게 된 영국에서도 1928년에야 남성과 동등한 참정권이 부여됐다. 잔 다르크와 엘리자베스1세, 예카테리나 대제 같은 몇몇 예외를 빼곤 동서양 역사에서 여성들의 역할은 전반적으로 폄하돼온 것이 사실이다. 매스미디어와 여성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미디어가 성차별의 오랜 역사에서 고착된 여성 억압과 폄하 인식을 재생산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선지 한국의 대중문화 속에서 능동적이고 강한 여성은 ‘어머니’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강한 여성, 즉 ‘터프 걸’에 열광하는 이유는 뭘까? 여성의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사회 진출이 확대되고, 경제력이 강해져 가정·직장에서 여성 리더십을 발휘할 기회가 많아졌기 때문이리라. 뒤집어 말하면 남자들이 더 이상 남자답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적 배경도 작용하고 있다. 90년대 후반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취업난, 비정규직·조기은퇴 확대 등으로 남성 권위는 실추돼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호자로서의 여성, 모성에 대한 그리움이 커지고 있는지 모른다. 60~70년대 어머니의 가장 큰 미덕이 따뜻한 감성과 인내심이었다면, 2012년의 어머니는 물질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강해야 한다.

매스미디어는 끊임없이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생산하며 특정 대상을 재현하는 새로운 기호(記號)도 개발한다. ‘터프 걸’ 신드롬은 바로 여성에 대한 새로운 사회적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다. 연상녀, 알파 걸 등은 보호자로서의 여성상을 그리고 있다. 성녀나 악녀로서의 여성, 어머니·며느리로서의 역할을 강조해온 TV드라마에서 이렇게 다양한 여성상이 나타나는 것은 분명 반가운 일이다. 로맨스와 불륜 사이를 그렸다는 TV드라마 ‘아내의 자격’은 한국에서 문화자본이 가장 풍부한 ‘강남 대치동+전문직업’ 집단에서 평범한 가정주부가 가부장적 질서를 깨고 홀로서기를 하는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주말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에선 좌충우돌 며느리와 속앓이 하는 시어머니가 나온다. 가부장제와 여성주의,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한편으로 충돌하고 한편으로 화해한다. 전통적 의식이 완고한 60∼70대 시청자들도 이런 드라마를 웃으면서 감상한다.

힘과 권력을 상징하는 현실 영역에서도 많은 여성이 약진 중이다. 4·11 총선 때 여야 대표가 여성이었고 여성 경영인, 여성 장교, 여성 파일럿 등은 더 이상 뉴스가 아니다. 재산권, 자녀양육권, 호주제 등 여성 차별 제도 역시 보완돼 나가고 있다. TV드라마 속 상상이지만 시어머니와 며느리도 화해하는 세상이다. 우리 사회가 경계 긋기, 편 가르기에서 조금만 물러선다면 못해 낼 게 무엇이겠는가?



정영희 고려대 언론학 석·박사. 한국여성커뮤니케이션학회 기획이사를 역임했다. 현재 고려대·강원대 등에 출강한다. 『한국사회의 변화와 텔레비전 드라마』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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