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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미의 ‘위대한 식재료’] 기장 생멸치

기장멸치축제(4월 19~23일) 첫날, 날이 저물어서야 멸치잡이 배가 귀항했다. 한 이틀 정신없이 멸치가 잘 잡히더니만, 이날은 멸치 떼를 찾아 꽤 오래 헤맨 모양이다. 어둑해지는 저녁 불빛 아래에서, 능숙한 솜씨로 멸치를 터는 모습이 장관이다.

기장멸치축제 첫날 분위기는 대낮부터 달아올랐다. 4월 19일 부산 기장군 대변항(大邊港)가에는 수백 개의 판매 부스 천막이 늘어섰고, 휴일도 아닌데 바글거리는 손님을 맞느라 정신이 없었다. 무대에서는 공연단이 음향 리허설을 하느라 빵빵거리는데, 공터에 진을 친 각설이패들의 트로트 가락이 뒤섞였다. 소박한 지역 축제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그런데 주 무대 옆에 줄지어 세워진 깃대들의 위풍당당한 포스가 만만찮다. 긴 장대에 태극기, 배 이름이 쓰인 선기(船旗), 청·적·황·백·흑의 오방(五方)색이 어우러진 만선기(滿船旗)를 차례대로 달아놓은 것이다. 출어를 나간 배가 만선이 돼 돌아올 때면 이 만선기를 달고 바다 저편에서 위풍당당하게 들어온다. 기를 매단 장대는 이파리까지 달린 긴 대나무이고 오방색 만선기까지 걸렸으니 영락없는 굿판의 신(神)대, 즉 하늘에서 신기(神氣)를 받는 대다. 하늘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연안어업이니, 이 21세기에도 신대에 오방기 걸고 멸치잡이를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작년 가을에 잡은 가을멸치다. 얼려놓았던 것을 구이용으로 해동했다. 씨알이 굵고 살도 탱탱해 제법 생선 꼴을 갖추었다.
투박한 축제 풍경과, 항구 전체를 감싸고 있는 비릿한 생멸치 냄새의 야생적 분위기는, 부산 바닷가 ‘싸나이’ ‘아지매’들의 거칠고 당당한 질감 그대로다. 우리를 안내해 준 이번 축제의 최용학(54) 총괄본부장도 영락없는 부산 사내였다. 까맣게 탄 얼굴에 까만 고글을 쓰고 무슨 말을 해도 웃지 않았는데, 오로지 멸치 배가 만선기 휘날리며 귀항하는 이야기를 해줄 때 잠깐 입가와 뺨에 미소가 서렸다.

그의 설명을 듣고 나니 4월의 멸치축제는 생멸치를 파는 것이 핵심임을 알 수 있었다. 서울내기인 나는, 생멸치의 이 비릿하고 생기 넘치는 냄새를 결혼 후에야 알게 됐다. 부산 출신의 남편과 결혼한 덕분이다. 멸치란 것은 늘 비쩍 마른 작은 물고기일 뿐, 고등어나 삼치처럼 푸르게 반짝거리는 등푸른 생선이란 것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마른 멸치로 햇것이 나오는 때는 7월부터란다. 봄의 산란기가 끝난 7월부터 본격적으로 건조용 멸치를 잡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자잘한 멸치들이 몰려들 때에 여러 배가 한꺼번에 멸치 떼를 에워싸고 그물로 떠올리듯이 잡는다고 한다. 이것을 끓는 물에 살짝 데쳐 말린 것이, 볶아 먹고 국물을 내어 먹는 바로 그 마른 멸치다. 흔히 질 좋은 멸치는 하얗고 푸르스름한 빛을 띤 것이라고들 한다. 말리면서 멸치의 비늘이 말라 하얗게 반짝거리게 되고, 등푸른 생선의 푸른 살빛이 얇은 비늘 밑에서 비치기 때문이다. 오래 되고 질 낮은 멸치는 누런빛이 도는데, 비늘이 다 떨어져 살이 드러나고 육질에 있는 기름기가 절어 살이 누르스름해진 것이다. 멸치가 등푸른 생선이란 것을 알고 나면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항들이다.

멸치회무침. 축제 장터 한 구석에서 경력 수십 년의 ‘아지매’들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머리·내장·지느러미를 한 번에 깨끗이 제거하고 살만 발라내면, 다른 한편에서는 거기에 초고추장과 야채를 섞어 살짝 무쳐낸다.
마른 멸치용에 비해 생멸치로 쓰는 멸치는 잡는 시기와 방법이 다르다. 그물코가 큰 유자망(流刺網·바닷속에 커튼처럼 내려 물고기가 그물코에 걸리게 띄워 두는 어구)으로 봄과 가을 두 차례 잡아 주로 젓갈을 담그고 회나 찌개·조림·구이로 먹는다. 축제라는 이름을 걸고 공식 행사를 만들지 않아도 기장의 대변항에는 4, 5월만 되면 멸치를 사러 모여드는 손님들이 많았다고 한다. 모두 멸치젓을 담그기 위해서다. 마치 초여름이 되면 서울의 마포나루나 인천 소래 포구에 젓갈용 새우를 사러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것처럼 사람들은 큰 들통 들고 멸치 사러 이곳에 모여들었다. 1960, 70년대까지만 해도 집집마다 젓갈을 담가 먹었고, 우리 집에서도 새우젓을 한두 말씩 담갔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경남에서는 이렇게 반드시 담가야 하는 젓갈이 멸치젓이다. 그만큼 이 지방 사람들에게 멸치젓은 거의 간장·된장에 맞먹을 정도로 중요한 기본양념이다. 김치에 넣는 것은 물론이고, 온갖 야채 쌈과 나물 무침에 멸치젓을 넣으며 1~3년씩 폭 삭혀 맑게 거른 액젓은 간장처럼 국에 간을 할 때도 쓴다. 감칠맛이라면 새우도 둘째 가라면 서러울 해물이건만, 진한 맛으로는 멸치를 따라가기 힘들다. 다소 비린 것이 흠이지, 입에 착 감기는 감칠맛과 깊은 뒷맛은 젓갈 중에 최고가 아닐까 싶다. 그것은 확실히 중부지방 사람들이 즐기는 새우젓·조기젓·황석어젓의 말끔하고 깨끗한 맛과는 다른 진한 맛이다. 액젓 역시 멸치액젓이 감칠맛의 깊이에서 으뜸이다. 바로 이런 멸치젓을 봄과 가을에 담그는 것이다.

봄에 멸치젓을 담그는 이유는, 멸치의 살과 뼈가 아직 연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봄에 잡히는 멸치는 길이가 10㎝ 정도로 자잘하고 살이 부드럽다. 시일이 지날수록 씨알이 굵어지고 뼈도 단단해지므로, 가을에 잡는 멸치는 길이가 15~20㎝가량 되는, 거의 정어리나 양미리 정도 크기의 생선 꼴을 갖춘다. 봄에 담근 멸치젓은 석 달 만에 폭 삭아 살이 다 흐물어지는데, 이런 것으로 김치를 담가야 김치에 뼈가 걸리적거리지 않는다. 체에 거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김장 담글 때에 걸쭉한 국물과 건더기를 함께 푹푹 넣어 버무리면 김치가 다소 거무튀튀해지기는 하지만 김치가 익어갈수록 고소하고 맛이 깊어진다. 여기에 자잘한 갈치라도 툭툭 썰어 함께 넣어 담갔다면 그 맛은 금상첨화다.

어선마다 세워진 깃대에는, 국적을 알리는 태극기, 배의 이름을 적은 선기, 그리고 만선임을 알리는 오방색의 만선기가 차례로 달려 있다. 맨 위에 이파리까지 달린 긴 대나무를 깃대로 이용하여, 사뭇 굿판의 신대 같은 느낌을 준다
대신 가을에 담근 멸치젓은 따로 쓸모가 있다. 멸치의 씨알이 굵고 살이 단단하므로 다 익은 후에도 살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따라서 멸치 형태가 그대로인 것을 몇 마리씩 꺼내 고춧가루와 마늘 등으로 양념을 해 반찬으로 먹는다. 젓가락으로 헤집으면 살이 잘 발라지는데, 이것을 물미역, 다시마, 찐 호박잎 등으로 쌈을 싸 먹을 때에 쌈장 대신 쓰는 것이다. 잘 손질한 물미역에 따끈한 밥 한 숟가락 얹고, 그 위에 검붉은 멸치젓을 살만 발라 얹은 후 입에 넣으면 어찌나 맛이 있는지 제대로 씹기도 전에 목으로 넘어간다. 봄 멸치로는 이렇게 탱탱한 멸치젓이 되지 않는다. 또 굵은 가을 멸치는 소금을 뿌려가며 구워 먹어도 맛있다.

이러니 경남 사람들이 해마다 멸치 사러 대변항에 몰려온 것은 당연하다. 축제장의 각 부스에서는 전날 잡은 멸치를 쌓아놓고 젓을 담가주기에 바쁘다. 능숙한 솜씨로 소금을 푹푹 퍼 넣고 버무려 비닐에 담고는 플라스틱 통에 쟁여 넣는다. 택배비를 내면 집으로 부쳐주는데 이것을 그대로 두세 달 정도 놓아두면 젓갈이 된다.

젓갈 담그는 과정은 다소 지저분해 보이기도 한다. 씻지 않고 그냥 담그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우젓이든 멸치젓이든 해물을 씻어서 담그는 젓갈은 없다. 바닷물과 뻘을 먹고 자란 해물을 머리와 내장까지 모두 넣어 뻘에서 생성된 천일염으로 버무려 저장하는 것이 젓갈이다. 그저 바다의 청정함을 믿고 먹는 것이다. 그래도 꺼름칙하다면 멸치만 사다 집에서 한번 헹구어 젓을 담그는 수밖에 없다.

멸치젓 담그는 모습. 멸치에 적정 비율로 천일염을 섞어 버무린다. 이대로 항아리에 담아두면 두어 달 후에는 국물이 흥건한 멸치젓이 된다

봄 멸치의 별미가 또 있다. 바로 멸치회 무침이다. 살 많고 쫀득한 가을 멸치를 선호하는 취향도 있지만 최 본부장은 고소한 맛에선 봄 멸치가 한 수 위라며 우리를 먹거리 부스로 데리고 들어갔다. 부녀회 ‘아지매’들이 뼈를 발라 놓은 멸치 살에 미나리 등의 야채를 섞어 초고추장으로 버무리고 있다. 멸치회 무침을 한 젓가락 집어 입에 넣었다. 와, 입 속에서 사르르 녹는다. 멸치는 신선도가 조금만 떨어져도 회로 먹을 수 없는 것이라 이런 별미는 바닷가 사람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전화나 인터넷 주문으로 깨끗이 손질한 회를 배달시킬 수도 있으니 멸치회 먹기가 쉬워졌다.

이 감동스러운 맛을 보니 그저 하늘과 바다가 고맙다. 인간은 제철을 잘 가려 고맙게 받아먹기만 하면 될 뿐이다. 아무리 재배와 양식에 의존하는 먹거리가 많아졌다 하더라도 여전히 하늘과 땅과 바다가 철 따라 맛있는 것을 내려주셔야 인간이 산다. 이 만고의 진리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지난해에는 기장멸치축제를 하지 못했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부산 지역 봄 축제들이 줄지어 취소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과연 이 위대한 식재료의 혜택을 언제까지 받을 수 있을지, 오방색 만선기를 보면서 생각했다.

글=이영미 대중문화평론가 ymlee0216@hanmail.net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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