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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재생산 위기, 양극화 위기 풀려면 ‘보육+교육+노동’ 패키지 정책 추진 해야

지난 25일 오후 ‘한국사회 대논쟁’에 참석한 각 분야의 학자들이 한국형 복지국가 모델에 관해 토론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주하 동국대 교수, 신광영 중앙대 교수, 정용덕 한국사회과학협의회장, 안상훈 서울대 교수, 이양수 중앙SUNDAY 편집국장 대리, 이우진 고려대 교수. 조용철 기자
이양수 편집국장 대리=지난해 여름부터 벌어진 무상급식 논쟁을 계기로 양극화·고령화를 극복하기 위한 복지 요구가 확대되고 있다. 12월 대선을 앞두고 복지 공방은 더욱 뜨거워질 것 같다. 산업화·민주화를 거쳐 선진 복지국가로 가는 길목에서 복지 확대, 성장잠재력, 재정균형을 꾀하는 사회적 합의가 시급한 것 같다. 지금 왜 복지 문제가 시급하다고 보는가.

연중 기획 한국사회 대논쟁 ⑧ 한국형 복지 모델

신광영(중앙대) 교수=우리나라의 고령화·저출산 문제가 굉장히 심각하다. 노인빈곤율은 OECD에서 가장 높은 45%에 이르고, 2050년께 65세 이상이 전체 노동력의 60%를 차지한다는 보고서가 있다. 그럴 경우 일본처럼 인구 감소, 내수 위축, 디플레 심화, 경제위기를 겪게 된다. 이제 적정 수준의 복지는 시혜 차원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존립과 재생산을 위해 필요하다. 좌우·여야 모두 정략적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 복지는 내부의 사회적 위협으로부터 국가공동체를 지키는 국방과 같은 역할을 한다.

안상훈(서울대) 교수=어떤 지표를 봐도 한국은 다른 선진국보다 복지수준이 훨씬 낮다. 고도성장 시기에 우리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험을 공유했다. 그게 지나쳐 1998년 외환위기 당시 마땅히 복지를 확대해야 했음에도 제2 도약이 가능하다는 환상에 사로잡혔다. 양극화를 무시한 채 다시 경제성장에 매달렸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도 그랬고 이명박 정부도 정권 초기엔 성장에만 눈을 돌리다 뒷북을 치며 실기(失機)했다. 20여 년 전부터 응축될 대로 응축된 복지 요구가 폭발 직전이다. 복지는 ‘시대적 화두’다. ‘보편적 복지 대(對) 선별적 복지’ 논쟁을 벌일 게 아니라 분별 있는 복지를 해야 한다. 한국형 복지국가는 성장-복지의 선순환이 가능해야 한다. 그러려면 고용, 특히 50% 안팎인 여성고용률을 높이고 여성의 일할 권리를 보장하는 데 방점을 찍어야 한다. 그것이 건설적인 복지국가 전략이다.

이주하(동국대) 교수=한국 사회는 서구의 순차적 발전경험을 압축적으로 이뤄냈다. 그 과정에서 저출산·고령화, 양극화라는 사회적 위험이 중첩됐는데 대처방안이 미흡했다. 한국의 경우 자살률, 노인 빈곤율, 남녀 임금격차, 노동시간 등 나쁜 지표는 OECD 최고 수준이다. 반면 복지 개입을 통해 불평등을 완화하거나 빈곤을 감소시키는 지표들은 바닥을 맴돈다. 미국형이냐, 유럽형이냐 얽매이지 말고 어떤 복지모델로 나갈 것인지 경제시스템과 국가 역할을 어떻게 바꿀지 고민해야 한다. 그런 다음 복지인프라 구축방안을 도출해야 한다.

이우진(고려대) 교수=서구에서 복지 요구가 분출하던 시기는 사회적 위험이 높아질 때, 즉 시장 실패나 경제공황이나 전쟁 같은 게 발생할 때였다. 한국 사회도 지니계수가 낮다고 하지만 부(富)·소득의 편중현상은 미국만큼 심각하다. 경제성장이 평균(平均)을 높이는 거라면, 복지는 분산(分散·평등)을 강조하는 거다. 완전히 독립적인 문제다. 성장에 불리하다 해서 민주주의를 거부할 수 없는 것처럼 복지 역시 마찬가지다. 복지는 시혜가 아니라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불안정성과 사회적 위험을 제어하는 효과를 낸다. 성장·복지를 따로따로 접근하다 보면 이념대립으로 갈 수밖에 없다.

정용덕 회장=한국사회의 복지논쟁에는 이데올로기 성격이 강하다. 너무 추상적이고 흑백논리가 앞선다.

이양수 국장 대리=오늘 토론에선 12월 대선을 앞두고 여야 정당과 유권자들의 가이드라인이 될 의견을 도출했으면 좋겠다. 여야는 그동안 아동, 교육, 일자리, 생활, 사회적 약자 등 다양한 분야의 복지공약을 쏟아냈다. 반값 등록금이 절대빈곤층 지원보다 더 시급한지 의문스럽다. 우리 사회의 복지우선순위를 어떻게 정해야 한다고 보나.

신광영 교수=복지를 아이템별로 접근하면 산만해진다. 생애과정과 연결해 접근하는 게 더 낫다. 예컨대 능력 있는 여성들의 경제활동 참여율이 낮은 이유는 두 가지다. 남녀 고용차별에다 출산·보육·교육 같은 사회환경 때문이다. 또 주거가 불안하고 교육비 부담과 미래 불확실성이 크기 때문에 출산을 기피하는 것 아닌가. 반값 등록금은 사실 대학생이 아니라 학부모들의 문제다. OECD 국가 중 가계지출에서 차지하는 교육비 부담이 가장 크다. 퇴직연령이 낮다 보니 노인빈곤도 피하기 어렵다. 한국 사회 변화와 개인생애 과정에 맞춰 복지정책을 정하는 게 좀 더 전략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안상훈 교수=복지와 복지국가를 헷갈리면 안 된다. 논쟁의 핵심은 성장·복지에 관한 ‘복지국가’ 전략이다. 그래서 복지를 경제·산업·노동시장과 함께 봐야 한다. 먼저 생애주기 과정에선 보육·교육·의료·고용과 퇴직·노령 등의 분야가 있다. 이와 별도로 장애인 지원 같은 특수한 분야가 있다. 중요한 건 공정성(justice)이다. ‘좋은 사회’나 지속 가능한 자본주의가 되려면 사람들이 경쟁시스템에서 패배해도 그걸 견뎌내고 재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한국 사회의 전체 틀은 굉장히 불공정하다. 절대빈곤층은 공공부조로 최저생계를 보장받는데, 김대중·노무현·이명박 3개 정권을 거치면서 13개 부처에서 292가지 복지사업을 시행 중이다. 중산층과 정규직 노동자에 대해선 국민연금, 고용보험, 건강보험, 산재보험 등 대형 사회보험들이 제공되고 있다. 그러나 노동시장에서 근근이 버티는 비정규직이나 영세기업 노동자, 근로빈민들은 복지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다. 복지의 공정성 차원에서 심각한 문제다. 복지우선순위를 따지려면 먼저 한국 사회의 장기 수용능력, 조세부담 수준을 합의하는 게 필요하다. 지금처럼 개별 복지아이템을 전 국민에게 보편주의 방식으로 제공하자면 답이 안 나온다. 대표적 사례가 반값 등록금이다. 근로빈곤층 자녀들이 대학 진학 시 학자금 지원이 중요한데 이런 게 반값 등록금 구호 속에 묻혀버렸다. 정치권이 자꾸 표(票) 계산을 하다 포퓰리즘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우진 교수=복지 욕구는 성장이 지체될수록 더 크게 분출된다. 그것을 자꾸 성장의 틀에 맞추려 하면 안 된다. 반값 등록금 이슈는 정치권에서 무분별하게 제기한 측면도 있고 사학재단의 부당한 징수를 없애라는 학생들의 요구도 깔려 있다. 공정성 측면에서 보자면 반값 등록금보다 초·중·고교 지원을 강화하는 게 바람직하다.

이주하 교수=여야 정당들의 복지공약을 보면 백화점식 나열이 많다. 이것들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처럼 사회투자적 복지정책 차원에서 통합적으로 엮을 필요가 있다. 정치적 과정을 통해 복지우선순위를 결정할 경우 포퓰리즘의 우려도 있지만 결국 투표라는 정치적 선택을 통해 국민적 합의를 이룰 수 있다. 복지 관련 전문가들은 노동 양극화 해소, 기초생활보장제도 개선, 출산·양육 지원, 노인빈곤 완화, 의료 공공성 강화 등을 우선 과제로 꼽고 있다.

정용덕 회장=우리 사회의 현행 복지제도에도 문제점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이우진 교수=저소득층은 빈곤상황이 개선되어도 복지에 매달린다는 웰페어 락(welfare lock·복지고착)이라는 단어가 있다. ‘보편복지 대 선별복지’ 논쟁과 관련해 자주 쓰는 개념 중 하나다. 우리도 소득·재산이 일정 수준을 넘으면 복지혜택을 딱 끊을 게 아니라 복지의존도를 단계적으로 낮춰 나가게 관련 제도를 재정비해야 한다. 서비스복지를 무작정 확대하다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수 있다. 복지아이템의 성격에 따라 현금과 서비스 두 가지를 적절히 배합하는 게 바람직하다.

안상훈 교수=복지고착의 가장 큰 원인은 빈곤층에 대한 292가지 지원책을 최저생계비(소득)에만 연계하기 때문이다. 복지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데 정작 수혜자들의 불만은 커질 수 있다. 보육·의료·교육 분야에서 그럴 가능성이 크다. 예컨대 반값 등록금의 경우 대학에서 엉망으로 돈을 쓰는데 국가재정을 투입한들 교육서비스의 질이 높아질 수 있겠는가. 근로동기 부여라는 차원에서 본다면 미국식으로 현금을 주기보다 북유럽처럼 서비스를 직접 제공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신광영 교수=이미 의료·교육·보육 같은 복지 분야에서는 민간업체들이 영리를 목적으로 성업 중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복지서비스 시장화’가 상당히 진행된 셈이다. 공공부문이 주류인 서구 선진국과는 굉장히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정용덕 회장=국가가 직접 복지서비스를 제공하느냐, 아니면 민간을 활용하되 재정을 보조하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우리 머릿속에 복지국가란 1930년∼70년대 말 유럽 진보정권의 ‘큰 정부’와 ‘관료제’로 각인돼 있다. 미국의 레이건 정부, 영국의 대처 정부는 정부 효율을 높이기 위해 그 기능을 줄여 버렸고 토니 블레어는 과거의 노동당 노선과 달리 ‘제3의 길’을 제창하며 아웃소싱을 통해 민간부문을 적극 활용했다. 행정학에선 그것을 ‘신(新)공공관리’라고 하는데 적은 비용으로 효율을 높인다. 요즘 재정위기를 겪는 그리스·스페인 같은 남유럽 국가들은 ‘큰 정부’로 생각되는 복지국가를 운영했기 때문 아닌가.

신광영 교수=남유럽 국가들은 유럽에서 복지수준이 가장 낮은 나라들이다. 공무원이나 공공부문의 복지혜택만 잘 보장돼 있고, 공공부문이 민간부문 위에 군림하는 형태였다. 굳이 말하자면 ‘가족복지국가’라고 할까. 복지 지출이 많아 경제파탄이 난 것처럼 말하는데 사실은 복지가 아니라 사회시스템의 문제다.

이주하 교수=남유럽 국가들의 경우 복지 지출에서 연금 비중이 큰 반면 보육 같은 사회투자적 복지는 취약했다.

이우진 교수=공공부문이 제공하는 보육·의료와 관련해 관료주의 문제가 있다는 건 인정한다. 다만 민간 위탁 서비스를 할 때도 전달체계의 효율화를 기해야 한다. 예컨대 우리 사회에서 보육서비스 같은 경우 민간보다 공공이 훨씬 더 낫다고 얘기하고 공공 보육원의 대기자 행렬도 길다. 민간 보육서비스의 질이 높아지지 않으면서 가격만 높여선 안 된다. 그건 예산 낭비다.

안상훈 교수=요즘 스웨덴에선 복지와 관련한 민간 섹터의 역할이 증대했다. 여기서 제3섹터는 정치성향을 띠는 시민단체가 아니라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같은 것이다. 동아시아에서도 풀뿌리 시민단체나 협동조합, 지역사회에 기반을 둔 비영리 섹터와의 협업을 적극 고려할 만하다. 공공·민간부문의 역할 분담도 필요하고 민간부문에서도 영리·비영리 섹터와의 역할 분담을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복지국가의 새로운 전략 같다. 큰 고민 없이 국가가 모든 걸 맡아선 안 된다.

이양수 국장 대리=12월 대선까지 복지논쟁의 전선은 크게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여야 정당의 복지공약을 보면 다분히 득표 전략을 의식한 측면이 있다. 포퓰리즘 공약을 막을 방안은 뭔가. 복지 확대를 위한 사회적 합의는 어떻게 이뤄나가는 게 바람직하나.

신광영 교수=한국의 사회복지 지출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7.6% 정도다. 다른 OECD 국가들은 20∼25% 수준이어서 복지 지출은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런 가운데 선거와 표를 의식하는 정당들을 견제하려면 언론과 시민단체, 전문가들이 제대로 역할을 해야 한다. 언론도 정당이 발표하는 복지정책을 그대로 받아쓰지 말고 유권자들이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다양한 팩트와 분석을 제공해야 한다.

이주하 교수=복지는 결국 정치 문제다. 그런 점에서 많은 선진국이 비례대표제와 다당제를 핵심으로 한 합의제 민주주의 모델을 갖고 있는 게 두드러진다. 복지 논쟁에선 선
거·정당제도의 영향도 크다.

안상훈 교수=정치권이 죽었다 깨어나도 못하는 얘기가 ‘증세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각 정당은 내심 국채를 발행하거나 연기금을 끌어다 쓰는 방안을 궁리하는 것 같다. 미래
세대의 부담을 생각한다면 정답이 아니다. 정치권부터 복지 확대와 증세를 함께 얘기해야 한다. 서구 복지국가 중 독일·스웨덴·프랑스 등은 사회적 합의 아래 조세정의, 조세개혁을 꾀했다. 이런 나라들은 국민 부담률과 사회복지지출 비율이 비슷한 수준을 보인다. 그리스의 경우 국민부담에 비해 복지를 많이 줬는데 그게 공공섹터에 집중되는 이
상한 구조를 보인다. 그러면 사회적 대타협이 힘들다.

신광영 교수=대타협이 이뤄지는 건 경제가 잘나갈 때가 아니라 위기 국면에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분명히 사회적 위기에 빠져 있다. 빈곤율도 미국 다음으로 높고, 자살률과 불평등 정도도 엄청 높다. 우리가 부닥친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대타협을 해야 할 시기다. 그렇지 못하면 일본처럼 장기 불황의 늪 속에 빠져 희망과 대안을 찾기 힘들다. 일본의 경우 80년대 후반부터 젊은 층의 취업이 어려워져 결혼·출산 문제가 발생했다. 반면 덴마크·스웨덴은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면서 고실업·저임금 문제를 복지와 연계해 해결했다. 그 결과가 전혀 다르지 않은가.

이우진 교수=우리 사회도 프레임 전환이 필요하다. 복지 욕구는 분출할 수밖에 없는데 그 폐해만 강조하다간 이념 논쟁이 평행선만 달리게 된다. 설혹 야당이 정권을 잡더라도 복지국가는 금방 실현되기 어렵다. 인내심과 상호 신뢰가 필요하다. 누가 정권을 잡든 금융통화위와 맞먹는 위상의 ‘재정복지위’(가칭)를 만들어 복지 관련 정책을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추진하는 방안도 논의해 보자. 이젠 ‘어떻게 하느냐’를 놓고 지혜를 모을 때다.

정용덕 회장=어느 나라든 ‘금융통화위’에 대해선 탈(脫)정치 인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재정·복지정책이라는 건 예외 없이 정치적 이슈다. 정파·세력 간의 자원 배분과 나눠먹기가 횡행한다. 그런 각축장에 ‘협의체’를 가동하기란 어려울 것 같다. 구색을 맞추는 위원회 형태로는 일을 할 수 없다. 정치현실의 파워들이 위원회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노사정위도 안 되고 있지 않나. 여야 정치권의 복지공약을 모두 이행하려면 5년간 268조원이 필요하다고 기획재정부가 최근 밝힌 바 있다. 이럴 경우 국민들이 얼마나 더 조세를 부담할 용의가 있는지도 의문스럽다.

안상훈 교수=최근 실시된 국민인식조사 결과를 보면 우리 사회도 점점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것 같다. ‘내가 더 받으면 세금을 더 내겠다’ ‘보편적 복지보다는 공정한 복지를 하자’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 12월 대선에서도 유권자들이 포퓰리즘 공약을 걸러낼 것이라고 생각한다. 복지 형태와 관련해선 ‘현금 복지’보다 ‘서비스 복지’를 강화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보육 같은 복지서비스의 이용료를 계층에 따라 차등 부담시키면 국민들의 조세저항은 줄어들 수 있다. 물론 복지서비스 수혜 과정에서 공정성과 효율에 대한 믿음을 줘야 가능한 얘기다.

이주하 교수=기업 입장에서도 복지가 적절하게 제공된다면 구조조정을 더 쉽게 할 수 있다. 해고당한 노동자들이 실업수당을 받아 재교육·재훈련 프로그램을 밟으면서 좀 더 여유롭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어서다. 그럴 경우 기업도 세금을 더 낼 이유가 있다. 복지가 잘되는 나라에선 남녀가 상대방의 직장·재력보다 성격·매력을 보기 때문에 연애나 결혼도 잘된다고 하더라. 저출산 문제도 해결되지 않겠나.(웃음)

이우진 교수=복지 확대에 대한 신뢰를 얻으려면 일단 수혜자를 늘려야 한다. 내가 낸 만큼 혜택을 받는다는 기분을 느껴야 국민 지지도가 올라갈 것이다. 그러려면 국민부담률 못지않게 수혜율도 보여줄 필요가 있다. 또 증세를 할 경우 소득세를 더 걷는 게 바람직하다. 부가세나 물품세 같은 간접세의 경우 경제학적으로 왜곡효과가 너무 크다.

안상훈 교수=원칙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복지 선진국들은 거의 간접세를 통해 재원을 조달했다. 복지국가를 만들려면 지속 가능해야 한다. 정치권에서 복지를 권리로만 얘기할 뿐 부담과 의무를 거론하지 않는 것은 대국민 사기극이라고 본다. 복지의 틀을 한 번 잘못 짜면 다시 고치기 힘들다. 국민에게 잘못된 환상을 심어주면 미래성장동력을 갉아먹게 된다. 노동과 자본,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다양한 방식의 사회적 타협이 이뤄져야 한다.

신광영 교수=모든 복지를 한꺼번에 할 수는 없다. 여야 정당도 단계적 복지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어떤 방식으로 재원을 조달할 것인지 로드맵을 내놓아야 한다. 언론도 표를 얻기 위해 남발하는 공약을 무작정 기사화해선 안 된다. 엄정하고 정밀한 잣대로 평가하고 비판해야 한다.

이양수 국장 대리=그렇다면 한국형 복지모델은 어떻게 추진하는 게 바람직하나.

안상훈 교수=보편주의 원칙 아래 ‘고용주도형’과 ‘생애주기별 맞춤형’을 결합하는 복지전략을 제안하고 싶다. 사회통합 차원에서 전 국민이 같은 공공서비스를 누리게 하되 재정 사정을 감안해 생애주기별로 가장 중요한 복지를 먼저 실시하자는 것이다. 그에 앞서 취약계층을 챙기는 건 기본이다. 복지정책은 일단 시행되면 뜯어고치기 힘든 만큼 5년 단위가 아니라 30년 단위의 장기전략을 내놓아야 한다. 또한 통일 변수를 감안해 복지재정을 짤 필요가 있다.

이주하 교수=고용과 복지의 연계가 중요한 것 같다. 이를 위해 사회적 일자리와 함께 노동시장 양극화, 2차적 재분배 등의 요인을 감안해야 한다. 독일의 경우 금융위기 이후에도 실업자의 재취업을 중시하는 사회투자적 복지개혁을 지향해 왔다. 그 덕에 빈곤·양극화 문제가 심화되지 않고 있다.

신광영 교수=우리 사회의 ‘인구재생산 위기’가 심각하다. 적정 출산율을 유지하려면 출산·보육·취업과 관련한 어려움이 없도록 여성 복지를 최대한 확대해야 한다. 가족·노동정책까지 포괄적인 업무를 맡을 부처를 출범하는 방안도 검토해보자. 일란성 쌍둥이도 성장 환경에 따라 전혀 딴 사람이 된다. 빈곤층 자녀에 대한 배려와 지원은 결국 다른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것이다. 향후 대선 정국에서 정치권이 장기 비전과 로드맵을 제시하길 바란다.

이우진 교수=‘생애주기별 맞춤형 복지’에 대해 찬성한다. 민주화가 되면 좋은 것만 있는 게 아니듯 복지도 그렇다는 걸 인정하고 들어가야 한다. 분별 있는 복지를 해야 성장과 복지의 선순환이 가능하다.

정용덕 회장=민주주의 국가에서 주요 정책은 결국 사회적 합의를 통해 결정된다. 한국 사회는 합리적인 선택과 합의에 이르는 타협의 메커니즘이 부족하다. 12월 대선을 앞두고 정당들이 내놓는 복지공약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국민들이 현명한 선택을 하도록 우리 언론도 각 정당·후보의 복지공약을 철저히 검증해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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