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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고금통의 古今通義] 외교관

이덕일
역사평론가
우리 역사에서 외교관의 대명사는 고려 성종 12년(993) 대군을 이끌고 침략한 거란 장수 소손녕(蕭遜寧)을 담판으로 물리친 서희(徐熙)다. 여러 신하들이 땅을 떼어주자는 할지론(割地論)을 주장할 때 전쟁불사론을 주장하면서 소손녕과 담판했다. 서희가 소손녕에게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면서 “만약 땅의 경계로 따진다면 상국(上國: 거란)의 동경(東京)도 우리 땅이다”라고 항의하자 소손녕은 철병했다.

 그러나 필자는 『고려사』 『서희 열전』의 이 내용을 읽으면서도 거란이 왜 물러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중국 사회과학원에서 발행한 『중국역사지도집』은 서희가 언급한 거란의 동경(東京)을 현재의 요녕성(遼寧省) 요양(遼陽)시로 비정하고 있다. 같은 책은 거란이나 거란이 세운 요(遼)나라의 수도 상경(上京)은 현재의 내몽골 파림좌기(巴林左旗)에 비정하고 있다.

 필자는 파림좌기 답사를 통해 비로소 거란의 철군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택시기사가 파림좌기에 고려성터가 남아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즉석에서 찾아가보니 사실이었다. 사료를 찾아보니 『요사(遼史)』 『지리지(地理志)』에 “상경 임황부(上京臨潢府: 현재의 파림좌기)는 본래 한(漢)나라 요동군(遼東郡) 서안평(西安平) 땅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었다. 그간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그 한국인 후예들은 서안평을 압록강 대안의 단동(丹東)이라고 우겨왔다. 그래야 한사군(漢四郡)의 중심지인 낙랑군(樂浪郡)이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는 식민사학 논리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후한서(後漢書)』나 『삼국사기』 같은 국내외 사료들은 고구려가 후한(後漢)이나 위(魏)나라 같은 중국의 역대 왕조들과 내몽골에 있던 서안평을 차지하기 위해 여러 번 공격했다고 전해 준다. 고구려 개국 이념인 다물(多勿)이 중국 왕조들을 중원으로 내몰고 고조선의 옛 강토를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구려 태조왕은 서기 146년 서안평을 습격해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태수 처자를 사로잡아왔다. 대방과 낙랑이 황해도나 평안남도가 아니라 지금의 내몽골 파림좌기 부근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동천왕이 재위 16년(서기 242) 서안평을 습격하자 조조의 아들 조비(曹丕)는 2년 후에 장수 관구검을 보내 반격하기도 했다. 고구려는 이런 과정에서 한때 서안평(상경)을 점령하고 성을 쌓았고 이것이 현재까지 고려성터로 전해지는 것이다. 서희가 전쟁불사론과 이런 역사적 사실을 논리적으로 들자 소손녕이 철군한 것이다. 외교는 힘과 논리의 총체다. 새로 출범하는 국립외교원 마당에는 서희의 흉상이 서 있다. 서희처럼 애국심과 역사지식으로 무장한 외교관을 길러내는 산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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