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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칼럼] 김정은의 유화 메시지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김정은은 만수대 의사당에서 할아버지 김일성의 혼령을 지하에서 불러내고 대륙간탄도미사일로 인공위성을 지구궤도에 올려 지하-지상-우주를 연결한 3차원의 우주쇼로 ‘김정은 시대’를 열려고 했다. 최고인민회의가 김정은을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으로 추대하는 절차가 무르익는 시각에 맞춰 인공위성 광명성3호가 지구 궤도에 진입했다는 보고가 회의장에 들어오면 5000명 대의원들이 우레 같은 함성과 박수로 김정은시대의 개막을 맞이하는 것이 4월 13일의 시나리오였다. 이 진행표에 맞추느라 발사 시간과 날짜는 과학이 아니라 정치에 맞춰졌다. 그러나 광명성3호를 실은 탄도미사일은 2분도 안 돼 공중에서 분해·폭파되어 서해 깊은 곳에 수장되고, 새 지도자의 존엄과 공화국의 위엄도 함께 추락했다.

 놀라운 일은 그 뒤에 일어났다. 북한 당국은 지체 없이 인공위성의 궤도 진입 실패를 시인했다. 실패해도 성공했다고 선전할 것이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김일성의 탄생 100주년인 태양절 행사의 하이라이트로 계획한 우주쇼가 물거품이 된 불상사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큰 혼란 없이 넘어갔다. 김정은도 흔들리는 기색 없이 담담한 모습으로 태양절 열병식 단상에 섰다. 그리고 최초의 대중연설을 했다. 현장에 있던 북한 전문가 박한식 조지아대 교수에 따르면 열병식 현장의 모든 사람이 김정은의 예고되지 않은 연설에 놀랐다.

 장중하고 현란한 언어를 나열한 20분간의 처녀연설을 생체 해부하듯 뜯어보면 주목할 만한 구절, 의미심장한 메시지일 수도 있는 표현이 들어있다.

 당연히 김정은의 연설은 선군, 군사우위 일색이다. 김정은은 강성국가와 사회주의 강국 건설에 군이 나서야 하고, 조국의 부강번영도 군이 선도할 것이라고 말했다. 혁명도 선군혁명이다. 김정은 체제의 핵심기반이 군이라는 사실의 생생한 증언이다. 강성대국은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았다. 북한은 여러 해 2012년을 강성대국의 문을 여는 해로 선전하고 준비해 왔다. 그러나 새 지도자의 최초 연설에서 강성대국은 강성국가, 사회주의 강국으로 대체되었다. 이것은 북한의 어려운 사정에 대한 김정은의 정확한 인식에 바탕을 둔 현실주의 노선을 예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정은은 배고픈 국민에게 “인민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며,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게 하는 것”이 당의 확고한 결심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경제강국 건설과 인민생활 향상이라는 큰 목표를 달성하는 데는 평화가 더없이 귀중하다고도 말했다. 북한 주민들이 언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지 알 수 없지만 백성들의 생활 개선을 위해 평화가 절실하다는 말은 미사일 쏘고 선군혁명을 소리 높이 외치는 강경한 분위기에서는 의미 있게 들린다. 가장 주목되는 메시지는 연설의 끝머리에 나왔다. 그는 통일과 민족의 평화번영을 바라는 사람이면 누구와도 손을 잡을 것이고, 통일을 위해서는 책임감과 인내심을 갖고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김정은의 이 말은 단순한 수사(修辭)인가. 최근 북한이 쏟아낸 남한 비방과 북·미 합의와 안보리 결의를 위반하면서 인공위성 발사한다며 대륙간탄도미사일 실험을 강행한 북한의 망동을 생각하면 통일과 민족의 번영을 위해 누구의 손이라도 잡겠다는 말은 앞뒤가 안 맞는 공허한 언사로 들린다. 그러나 4월 15일자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김정은 연설 속의 유화 메시지와 맥이 닿는 보도를 했다. 이 신문은 김정은이 1월에 당 간부들에게 경제운영에 관한 경제일꾼들의 생각을 자본주의적이라고 비판만 하지 말고 금기 없는 논의를 통해 북한에 맞는 경제재건의 방법을 찾으라고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총리 최영림이 13일 최고인민회의 보고에서 다른 나라들과 경제·기술협력을 더 강화하겠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을 수 있다. 북한 외무성이 유엔 안보리 의장성명이 나온 뒤에 낸 성명은 2009년 4월 안보리 의장성명 뒤의 성명과 비교하면 그 냉철과 자제가 눈에 띈다. 2009년 성명은 안보리 의장성명을 대북 선전포고라고 비난하고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실험 같은 자위조치를 취하겠다고 협박했다. 이번 성명은 미국과의 2·29 합의 파기를 선언하는 데 그쳤다.

 김정은 연설의 소프트한 부분, 내각총리의 보고, 마이니치신문의 주목할 만한 보도, 외무성 성명의 낮은 톤, 인공위성 발사 실패를 인정한 김정은의 신속한 결단을 일괄하면 조·부(祖·父)와는 다른 젊은 지도자의 상(像)과 그의 새로운 방식이 눈에 띈다. 우리는 가능한 모든 수단으로 북한의 무례망작(無禮妄作)에 대응하면서 김정은의 유화발언의 활용가치를 생각해봐야 한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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