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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아들 만날 날 기다리며 촘촘히 메운 화폭…‘오작교’엔 어머니

“어머니는 1995년 일흔여덟 나이에 새 작업을 시작했어요. 스케일이 ‘우주’로 커졌죠. 무한 우주 공간에 오두막을 그려넣은 작품 ‘큰곰자리에 있는 나의 오두막’을 보고 ‘아, 어머니, 정말 대단하십니다’란 말이 절로 나왔어요. 어머니가 진짜 존경스럽더라고요. 그때부터 어머니를 도와드리는 일이 정말 보람 있고 즐거웠어요.”



유로통상 신용극 회장이 말하는 ‘내 어머니 이성자 화백’
그리움을 은하수에 새긴 내 어머니 이성자
신용극 유로통상 회장의 사모곡

 “우리 어머니, 맛있는 거 먹을 때 제일 많이 생각나요. 특히 굴을 참 좋아하셨는데….”



 유로통상 신용극(67) 회장의 사모곡은 절절했다. 그의 어머니는 고 이성자(1918~2009) 화백. 우리나라 최초로 추상화를 그린 여성화가다. 신 회장은 어머니를 기념하고 알리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2009년 ‘이성자기념사업회’를 만들어 회장직을 맡았다. 지난달엔 어머니의 3주기에 맞춰 기념관을 열었고, 이달 말까지 ‘3주기 기념 회고전’을 진행한다. 장소는 그의 사업체가 있는 서울 강남구 신사동 유로프라자다.



글=이지영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유로통상 신용극 회장이 이성자 화백의 ‘3주기 기념 회고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강남구 신사동 유로갤러리에서 어머니의 그림을 둘러보고 있다. 왼쪽 그림은 ‘목성의 도시’(2003), 오른쪽 그림은 ‘우주의 축제’(2000)다. 모두 이상적 미래 도시를 그린 ‘우주 시대’의 작품이다.
 

15년간 헤어진 모자, ‘만유인력’에 끌리듯…



경남 진주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이성자 화백은 일신여고(현 진주여고)와 일본 도쿄 지센여대를 졸업한 뒤 38년 외과의사 신태범(1912~2001)씨와 결혼했다. 두 살 터울로 아들 셋을 낳고 10여 년을 여느 주부와 다름없이 살았다. 그랬던 그가 돌연 화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은 가정불화 때문이었다. 남편에게 딴 여자가 생겼던 것이다. 당시 시대 분위기에선 그냥 참고 넘어갈 만한 일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용납할 수 없었다. 결국 결혼생활은 파경에 이르렀다. 그때가 51년. 6·25전쟁 중이었다. 암울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그는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났고, 파리 화단에서 주목받는 추상화가로 자리 잡는다. 그리고 65년 서울대 교수회관에서 첫 귀국전을 하며 비로소 고국땅을 다시 밟았다. 두고 간 아이들이 모두 20대 청년이 된 뒤였다.



 65년까지 이 화백이 그린 작품에는 아들들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생전 이 화백은 당시를 돌아보며 “밤낮으로 그림을 안 그리면 애들이 어찌될까 불안했고, 애들이 보고 싶어 괴로웠다”고 말했다. 또 “붓질을 한 번 하면서 이건 내가 우리 아이들 밥 한 술 떠먹이는 거다 생각했고, 또 붓질을 한 번 더 하면서 이건 우리 아이들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거다 여기며 자꾸자꾸 그렸다”고도 했다. 그래서 이 화백의 초기작은 다분히 ‘노동집약적’이다. 넓은 캔버스를 촘촘한 붓질로 꽉꽉 채웠다.



 그동안 새어머니와 친할머니의 보살핌을 받고 자란 세 아들은 모두 반듯하게 컸다. 셋째 아들인 신용극 회장은 우리나라 명품 수입업계의 1세대로 꼽히는 사업가다. 몽블랑·버버리·피아제·라프레리·랑방·디올 등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들여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첫째 아들은 조선일보 기자 출신으로 현재 2014 인천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는 신용석(71)씨, 둘째 아들은 서울대 응용미술과를 졸업한 뒤 파리7대학 건축학과 교수를 역임한 신용학(69)씨다.



1 이성자 화백이 1949년 창경궁에서 찍은 세 아들 사진이다. 왼쪽부터 둘째 용학, 첫째 용석, 막내 용극. 2 1948년 3월 인천 집에서 찍은 사진. 용학(왼쪽)과 용극. 사진 1과 2는 이 화백이 51년 프랑스로 건너가며 가져갔던 사진으로, 이를 보며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3 이 화백의 2003년 모습. 프랑스 투레트에 있는 화실에서 찍었다.


 15년 만에 만난 아들들 앞에서 이 화백은 강한 어머니였다.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앞서 자식들 비위를 맞춰줄 법도 했을 텐데, 이 화백은 늘 꼿꼿했다.



 “65년 저희 형제와 재회하신 뒤 서울에서 몇 달 함께 살았지요. 그때 둘째형에게 ‘빨리 프랑스로 유학 오라’고 권하셨어요. 그런데 저 보고는 ‘넌 국비유학생이 돼 프랑스에 올 정도가 아니라면 올 생각 말아라. 난 너 공부시킬 만한 능력이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얼마나 섭섭했는지. 형은 합격인데, 나는 왜 불합격인지….”



 훗날 사업을 시작한 신 회장이 주변에 선물할 요량으로 어머니에게 “판화 10장만 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었다. 그때도 어머니는 단호했다. “작품은 선물로 주는 게 아니다”며 거절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작품은 원래 그런 거구나’ 했지요. 구입하지 않으면 소유할 수 없구나…. 그래서 어머니 작품을 하나 둘 사 모으기 시작했어요.”



유로통상 신용극 회장이 어머니 이성자 화백의 흉상을 안고 사진을 찍었다. 흉상은 2009년 이 화백 작고 이후 조각가 이영학 선생이 만든 작품으로, 서울 강남구 신사동 ‘이성자 기념관’ 4층에 있다.
 신 회장이 소장하고 있는 어머니의 작품은 모두 신 회장이 구입한 것이다. 이 화백은 자신이 갖고 있던 작품 300여 점을 모두 고향인 경남 진주시에 기증한 뒤 작고했다.



 이 화백은 평생 한국 국적으로 살았지만, 삶의 터전은 프랑스를 고집했다. 한 번도 한국에 그림 도구를 들고 온 적이 없었다. 임종도 프랑스에서 했다. 대신 세 아들이 점점 프랑스와 가까워졌다. 신 회장은 이를 두고 “마치 만유인력 같았다”고 말한다. 신문기자였던 첫째 아들은 68년 초대 파리특파원으로 발령받아 10년을 프랑스에서 살았다. 유학 간 둘째는 아예 파리 대학의 교수가 돼 프랑스에 정착했고, 셋째인 신 회장은 명품 수입업자로 74년부터 프랑스를 드나들었다.



 “85년부터는 1년에 네 차례씩 프랑스에 갔고, 한 번 갈 때마다 1주일씩 어머니와 함께 지냈어요. 어머니와 아침부터 밤까지 함께 지내며 굉장히 대화를 많이 했죠. 서로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었지만, 만날 땐 ‘찰떡궁합’이었어요. 어느 모자보다 가까워질 수밖에요.”



아흔까지 현역…대지에서 우주로 끝없는 변신



프랑스 투레트에 있는 이 화백의 화실 ‘은하수’. 음양을 상징하는 반원 두 개를 약간 어슷하게 배치한 모양이다. 이는 이 화백의 작품 속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모티브다.
신 회장은 어머니 이 화백을 두고 “희생에 감사…” 유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대신 “존경한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어머니의 열정과 집중력, 예술적 감수성 등을 아들은 자랑스러워하고, 그리워했다.



 이 화백은 54년부터 2008년까지 54년 동안 무려 1229점의 유화를 그렸다. 그 외에도 613종류의 판화 작품과 도자기 479점, 수채화 69점 등을 남겼다. 그는 만년까지 왕성하게 활동했다. 2008년 아흔의 나이에도 100호 크기(162×130㎝)의 유화를 그렸을 정도다.



 이 화백의 작품 세계는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다. 작품의 주제에 따라 크게 열 개의 시대로 구분된다. 맨 처음은 ‘구상 시대’(54~56년)다. 파리의 그랑드 쇼미에르 아카데미에서 미술을 배운 뒤 풍경화·정물화·인물화 등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때 그린 풍경화 ‘보지라르 가에 내리는 눈’을 56년 파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보자르전’에 출품, 평론가 조르주 부다유의 호평을 받기도 했다.



이 화백의 도자기 작품 ‘다시 만난 사랑 No.1’(1987).
 이후 그의 작품은 추상화로 이행해 ‘추상 시대’(57~60년)를 맞았고, 이는 직선·삼각형·사각형·원 등의 기하학적 부호들로 여성과 대지를 표현하는 ‘여성과 대지 시대’(61~68년)로 이어졌다. 62년 내놓은 작품 ‘내가 아는 한 어머니’로 그는 “파리의 하늘에 떠오른 직녀성”이라는 평단의 호평을 받는다. 이를 계기로 프랑스 문화부가 이 화백의 작품을 한 점 구입했고, 그는 파리의 화단에서 확고하게 자리매김한 화가로 인정받았다. 이런 성공을 발판으로 65년 금의환향, 고국에서 귀국전을 가졌다. 한국의 평론가들 역시 그의 작품에 대해 “한국적 정서와 여성적 섬세함과 감각이 화면 가득 본능적으로 표출되고 있다”며 찬사를 보냈다.



 그가 이렇게 호평을 받았던 주제 ‘여성과 대지’를 단숨에 내려놓은 것은 68년 어머니를 여의면서다. 마침 그로서도 잘 자란 아들들을 눈으로 확인하고 마음의 짐이 가벼워진 터였다. ‘여성과 대지’의 모티브였던 ‘어머니’에서 자유로워진 것이다.



‘오작교’(1965), 146×114㎝
 이후 선과 선, 면과 선을 겹쳐 보여주는 ‘중복 시대’(69~71년), 강렬한 원색을 사용한 ‘도시 시대’(72~74년), ‘음과 양 시대’(75년), ‘초월 시대’(76년), ‘자연 시대’(77~79년) 등을 거쳐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길 시대’(80~94년)와 ‘우주 시대’(95~2008년)로 그의 예술세계는 마무리됐다. 실로 치열하고 끈기 있는 여정이었다.



 어머니 생전 신 회장은 후원자를 자처했다. 97년 프랑스 남부 투레트에 화실 ‘은하수’를 지을 때도, 2007년 책 『이성자, 예술과 삶』(생각의나무)을 펴낼 때도 신 회장의 시간과 정성과 돈이 들어갔다.



 이제 이 화백의 기념 사업에 나선 신 회장의 마음은 분주하다. 우선 유화 작품 전작(全作) 도록을 펴내기 위해 소장처가 확인되지 않은 800여 점의 행방을 찾고 있다. 또 이 화백과 동시대 작가들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고 연구하는 일도 기념사업회의 일이다. 이를 위해 후원회원도 모집 중이다.



 “어머니는 영웅적인 예술가셨어요. 불굴의 의지를 지닌 화가였고, 동양적 향취로 서양의 화단을 공략한 개척자였어요. 영웅이 필요한 시대, 어머니를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지요.”



 신 회장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지만, 흔들림이 없었다.





왼쪽부터 ‘보지라르 가에 내리는 눈’(1956), 73×116㎝,과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길, 1월’(1991), 200×200㎝


‘오작교’ 본 조병화 시인 “그리움 아롱진 다리”



이 화백의 1967년 모습.
신용극 회장에게 어머니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다 좋다”란 밋밋한 답이 돌아왔다. 대신 신 회장은 “유화 ‘오작교’를 볼 때 어머니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세 아들에 대한 그리움의 극치가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가 너무 안쓰럽다”고 말했다.



‘오작교’는 이 화백이 65년 첫 귀국 전시회를 앞두고, 15년 만에 세 아들을 만날 날을 기다리며 그린 그림이다. 귀국전에서 ‘오작교’를 본 조병화 시인은 같은 제목의 시를 지어 이 화백에게 헌정했다. 시의 전문(全文)은 이렇다.



“이것은 동양에만 있는/다리다/이것은 동양에만 있는/눈물이다//이것은 동양에만 있는/그리움/아롱진 사랑이다//동양의 지혜로/가로 노인/은하수/먼 별들의 다리//일 년에 한번/만났다 헤어지는 사랑을 위한/하늘의 다리//이것은 사랑하는 마음 사이에만 놓이는/동양의 다리다//그리움이여/너와 나의 다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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