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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떠나는 그들, 돌아온 그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불꽃 튀는 접전이었다. 자는 둥 마는 둥 새벽까지 개표방송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민주화 25년 동안 이렇게 긴장된 총선은 없었다. 희망을 걸었던 후보들이 벼랑 끝에서 곡예하는 상황도 그랬지만, 여야의 판세가 여러 번 요동쳤기 때문이기도 했다. 보수 52대 진보 48, 예상을 뒤엎은 결과였다. 약속론이 심판론의 맹공을 가까스로 막아낸 셈이다. 민주연합의 운동권 고수들은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의 민심 독해술을 따라잡지 못했다. 박 위원장의 말엔 조곤조곤한 진정성이 실려 있었으나, 한명숙 대표의 뚝심 발언은 김용민의 막말과 섞여 잡담처럼 흩날렸다. 강원도와 충청도가 야당을 이탈하자 정치 지도는 홍동황서(紅東黃西)로 정확히 분할됐다. 그리고 어느 한쪽의 독주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황금분할 구도를 명했다.



 민심의 천칭은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인류 최고의 철학자 플라톤에게 맡겼어도 이런 절묘한 분할, 한쪽에 2%를 살짝 얹어준 ‘균세(均勢)적 분할’을 만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정치판에서 50대50은 양자가 팽팽히 맞서 되는 일이 없는 교착상태를 뜻한다면, 민심은 여기에 2%의 비상구를 뚫어줬다. 대선 정국에서 이 승부수 2%를 누가 가져갈 것인지가 흥미롭다.



 그런데 총체적 구도를 두고 공방전을 벌이는 동안 민심의 쓰나미에 밀려 정치 생명의 존망이 엇갈리는 아슬아슬한 장면이 여럿 연출됐다. 여당의 홍준표·정진석·홍사덕, 야당의 김효석·홍재형 같은 비교적 합리적이고 역량 있는 인물들의 익사 사건은 쓰나미가 몰고 온 불가항력적인 부작용인지도 모르겠다. ‘떠나는 그들’은 말이 없다. 그러나 열정, 헌신, 균형감각을 갖춘 인재들이 절실한 한국의 정치현실을 떠올리면 이들의 낙선 사태는 안타깝다. 쓰나미가 휩쓸고 간 가장 아쉬운 정치인을 대라면 필자는 서슴없이 김성식·정태근 의원을 들겠다. 50대 초반의 패기 있는 정치인, 한나라당 내부에 진보기지인 ‘민본 21’을 꾸려 MB정권에서 가장 사나운 감시견 역할을 해왔던 의원들이었지만 심판론 파도에 결국 낙마했다.



 김성식 의원은 국회 출입기자들이 뽑는 최우수의원상(백봉상)을 3년 연속 수상한 실력파이자 정치감각이 뛰어난 재목이다. 국회 재정위원회에 불려온 관료들은 그의 예리한 질문에 쩔쩔매기 일쑤였고, 그가 작성한 재정운영 보고서는 대학원 교재로 쓰일 정도였다. 트럭운전사의 아들로 태어나 서민의 애환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는 주말에 늘 지역구를 돌며 민원을 경청했고 결과를 회신했다. 정태근 의원은 MB정권의 가미카제였다. 한·미FTA 비준 때 여야절충안을 만들라고 단식투쟁을 불사했고, 고소영·강부자 인사정책을 정면으로 들이박았다. MB정권의 탄생 공신이 공격수로 나선 것이다. 지난해 말 디도스 공격과 불법사찰 파문에 그는 김성식 의원과 동반 탈당해 허허벌판에 섰다. 정권 심판에 불을 댕긴 그들이 심판론 쓰나미에 결국 정치생명을 잃었다. 5% 표차를 열성도로 환산한다면 당선되고도 남을 사람들이었다.



 아쉬운 사람들은 또 있다. 익사를 각오하고 적진에 뛰어든 두 사람, 김부겸·이정현이 그들이다. 홍동황서의 중심부인 대구와 광주에 노란점, 빨간점을 각각 찍어보려고 동분서주했으니 정신나간 사람 소리 듣기에 딱 맞았다. 한국 정치의 고질병 지연(地緣)투표 장벽에 온몸을 던져 산화한 사람은 별로 없다. ‘세상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뿌린 싹이 자라도록 거름 주고 물 주겠다’는 그들의 소감엔 미래 희망이 싹텄다. 이들의 투혼에 민심은 40% 지지율로 응답했다.



 ‘떠나는 그들’의 빈자리를 메우듯 그들이 돌아왔다. 심상정·노회찬 조(組)다. 노동투사 심상정은 익사 직전 구출됐고, 노동이론가 노회찬은 일찌감치 승전보를 울렸다. 이들이 바로 통합진보의 주류인 주사파의 과격 급진 행보에 완급 조절을 수행할 사람이다. 노동판에 인생을 바친 이들 진짜 고수들 외에 나꼼수의 막가파식 선동정치와 주사파의 음험한 친북정치를 교정할 대안세력은 별로 없다. 명박산성에 밀려 외곽에 주둔해 있던 노동군단의 총공세가 예상되는 이 시점에 ‘전복적 방식’이 아닌 ‘사민주의적 의회정치’로 풀고자 하는 세력이 돌아왔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재벌 총수도, 거리 행상도 동등하게 ‘한 표’로 치환되는 선거에서 프랑스의 사회학자 토크빌은 ‘다수의 폭정’을 목격했다. 그러나 인류는 ‘소수의 독단’을 시정할 방법을 달리 발명하지 못했다. 한겨울에서 봄까지 용암처럼 요동쳤던 민심은 홍동황서, 52대48이란 균세적 분할에서 일단 멈췄다. 대선 정국에서는 또 다른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인지 두고볼 일이지만 쏟아진 용암에 파묻힌 그들은 아쉽고, 용케 돌아온 그들은 반갑다. 정치란 민심에 생명을 맡기는 직업, 그 위태로운 줄타기에서 ‘천사적 대의’에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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